제목: 알・여・드리라(롬 6:1~14)
본문: 로마서 6장 1~14절
설교자: 이병권
‘알여드리라’는 제목은 ‘알고 여기고 드리라’의 줄임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탕자의 비유를 한 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고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자격 없는 아들을 위해 잔치를 열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죄인을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우리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탕자가 집에 돌아온 후에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이 된다면 어떨까요? 탕자를 미워했던 형도 아버지의 충고로 마음을 돌이키고 동생을 받아주었고 탕자는 삶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집나가서 방탕하며 지냈던 때를 떠올리며 그때를 그리워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재산을 챙겨서 집을 나가려고 합니다. 혹시 잘못되더라도 아버지는 나를 사랑으로 받아주실 테니 언제든 다시 잔치를 베풀어주시고 용서해주실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집을 나갑니다. 또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는 겁니다.
다시 집을 나간 탕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하는 질문이 그러합니다.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우리가 다시 죄 가운데 거하며 계속 죄를 지을 수 있을까요? 바울은 5장에서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한 사람의 순종으로 우리가 생명에 이르렀다고, ‘은혜’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5:20) 말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선행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면 선을 행할 필요가 있습니까?’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받았다면 이제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복음에 대한 공격이 그러합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죄와 우리의 관계를 죽음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우리가 죄와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죄에 매이지 않습니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죄와 우리의 관계를 죽음으로 설명하면서 이 죽음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결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알려주는데 지금부터 그 중요한 세 가지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알고’입니다.
바울은 세 번에 걸쳐서 ‘알다’라는 의미의 말을 사용하는데 3절 끝에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하고 6절 시작에 “우리가 알거니와”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9절 끝에 “앎이로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세례를 가지고 알려줍니다.
1. 알고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여기 말씀하는 세례는 우리가 구원받을 때 예수님과 함께 하게 되는 영적인 세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물로써 행하는 세례, 정확하게 말하면 침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 이러한 예수님과의 연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식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예수님의 장사되심이 나의 장사됨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나의 부활이 됩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연합을 보다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나도 죽었고 예수님이 살아나셨을 때 나도 살아나서 이제 나는 새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아직 이해하기 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연합의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된 우리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살아나심과 연합된 우리는 사망이 주장하지 못합니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롬 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우리는 또한 그분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소유한 생명과 같은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사망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사망의 권세가 우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연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나의 죽음과 부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연합된 결과, 더 이상 죄와 사망이 나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나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죄의 지배에서 해방됩니다. 더 이상 그 세력 아래 있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더 이상 우리에게 명령하지 못합니다. 전에는 죄의 욕망이 우리를 지배했었고 우리를 속박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고 죄와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새 생명을 얻어서 그 가운데 행할 수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되었기에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죄가 우리에 대해서 무언가를 명령하거나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대에 입대한 청년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군대에 들어가면 자유가 없습니다.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만약에 사람들을 못살게 괴롭히는 문제 있는 선임이 있으면 군 생활이 괴로울 것입니다. 힘든 생활의 연속일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제대를 하고 나면 어떻습니까? 그 모든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자유하게 됩니다. 그 어떤 명령도 따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군대있을 때 나를 그렇게 괴롭히던 선임을 제대한 후에 만난다 하더라도 어떤 명령을 하더라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나는 제대함으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군에서의 다스림과 명령은 더 이상 나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 의와 생명으로 옮겨왔습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이 요구하는 것, 그 지배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게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은혜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첫 단계입니다. 우리는 죄가 아니라 죄에 속한 세상이나 악한 권세가 아니라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을 때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죄의 지배에서 풀려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제대한 것입니다.
2. 여기고
다음으로 ‘여기고’입니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1절 끝에 중요한 명령이 나옵니다. 여기라는 명령입니다. 현재형으로 계속되는 명령입니다. ‘여기라’라고 하니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는 것은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억지로 믿으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는 아닌데 그런 것처럼 속이고 연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는 것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이 사실을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실제로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살아났으니 이제 내 삶은 예수님의 뜻 안에 있다는 사실을 계속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내 삶으로 주장하는 것, 이 진리를 의지하여 사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이고 나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자이다. 나는 예수님과 연합된 자이다. 나는 더 이상 죄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 계속해서 이 사실이 내 삶에 나타나도록 매순간마다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다’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계산하다’라는 뜻인데 수입과 지출을 계산한 결과를 장부에 기록할 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고 내가 겪는 다양한 일들이 있습니다. 내가 보낸 시간들, 내가 사용한 물질들, 내가 한 말과 행동들, 그 수많은 일들을 파악하고 발전을 위해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을 수입과 지출로 계산해서 정리하면 어떨까요? 그냥 봤을 때 한 눈에 들어오지 않고 복잡했던 것들을 간단하게 파악하고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계산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내 인생에 플러스가 되고 무엇이 내 인생에 마이너스가 될까요? 인생을 계산할 때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살아난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장부는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기준은 돈이 되는 것, 명예가 되는 것, 더 많이 가지는 것, 이 땅에서 더 누리고, 더 잘 먹고, 더 잘사는 것, 그것이 플러스입니다. 그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진짜 인생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이고 예수님 안에서 사는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살지만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지만 그들과 다르게 삽니다. 다른 기준으로 다른 가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고 단순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매순간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계속 이 사실을 내 삶으로 주장해야 합니다.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 평가 기준은 단순해집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살면 플러스입니다. 예수님의 살아나심과 함께 살아난 자로 그분을 위해 살면 플러스입니다. 하지만 죄를 따라 내 욕심을 따라 불의를 위해 살면 마이너스입니다.
3. 드리라
바울은 이어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명령이 알려줍니다. 이 땅에서 남는 삶, 가치 있는 삶을 위한 구체적인 명령, 마지막으로 ‘드리라’입니다 .
롬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바울은 13절에서 쌍이 되는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라”는 부정의 명령과 함께 긍정의 명령으로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우리가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새 생명을 가진 자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생명을 누리기 위해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해 내 삶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손에 들려있느냐에 따라 내 삶의 목적과 가치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장인의 의해 만들어진 아주 성능 좋은 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칼이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손에 들려 있다면 어떨까요? 그 칼의 가치가 있을까요? 좋은 일에 사용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위험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칼이 유명한 요리사의 손에 들려 있다면 어떨까요? 그 칼은 좋은 도구가 되어 멋진 음식을 만드는데 귀하게 사용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죄에게 내어주고 내 욕심을 위해 내 삶을 계속 사용한다면 우리 삶은 낭비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의를 위한 도구로 내 삶을 드린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삶이 되고 남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을 채우기 위한 “불의의 무기”로 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무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그분께 내 삶을 내어 드리면 하나님은 그 뜻대로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선하신 일들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혹시, 이 말씀을 듣는 분들 중에 반복되는 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 명령을 가볍게 넘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로 인해 고통과 죄책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결단함으로 죄를 버리고 변화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 실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죄에서 돌이키는 원리는 단순합니다. 정말 당신이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당신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다면 당신에게는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간절하게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죄를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기에 가능합니다.
롬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달라스 신학교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인 루이스 S. 체이퍼는 81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생애 마지막 1년은 휠체어에 앉아서 조직 신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가 좋아하는 강의 주제는 은혜였는데 어느 날 특별히 감동적이었던 강의를 마치고 난 후 그는 성경을 덮고 휠체어를 밀면서 천천히 강의실을 나갑니다. 그러다 문 앞까지 가서 잠시 멈추어 섭니다. 학생들은 모두 나이든 그 교수를 주목하게 되었고 그 때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전 생애를 바쳐 하나님의 은혜를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나는 그것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정말 위대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말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 놀라운 은혜를 받았고 누리고 있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했고 우리를 의롭게 하고 있고 우리를 의롭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살도록 그렇게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옛사람이 원하는 대로 죄의 본성이 원하는 대로 내 욕심을 채우며 죄악 된 삶을 충분히 즐기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 것은 더 이상 더러운 죄로 우리를 더럽게 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은 생명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말씀을 시작하면서 드렸던 질문을 다시 드립니다. 여러분은 다시 집을 나간 탕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럴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할 때가 있습니다. 자주 그렇게 합니다. 한없는 은혜를 받았는데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너무도 쉽게 죄에게 나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집을 나가는 탕자처럼 살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은혜를 받은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러지 맙시다. 단호하게 죄에 대해서 거절하고 의를 위해 삽시다.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삽시다. 우리 주님을 위해 삽시다. 그러기 위해 알고 여기고 드리는 우리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