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본문: 고린도전서 5장 1 – 13절

설교자: 조정의

고린도 교회 가운데 있던 분쟁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다가 갑자기 범죄한 성도를 교회 밖으로 내쫓으라고 권면하는 내용이 어색하게 이어지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바울은 주께서 허락하시면 고린도 교회에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그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경고했다(고전 4:19). 그들은 각종 지혜와 언변을 뽐내며 교만하게 자신을 높이려 애썼지만, 실상 그들 가운데 나타난 능력은 범죄한 성도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복음의 지혜와 능력으로 교회 안에 일어난 죄를 어떻게 해결할지 전혀 알지 못할 정도로 무능력하고 형편없었다. 

건강한 몸은 절대로 병들지 않는 몸이 아니라 병을 이겨내도록 제 기능을 다하는 면역체계가 작동하는 몸인 것처럼, 건강한 교회는 절대로 죄가 발생하지 않는 교회가 아니라 어떤 죄가 발생하든지 그 죄를 다루어 회개로 이끄는 복음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는 교회이다. 교회가 죄를 다루는 방식을 가리켜 ‘징계’라고 하고 징계의 최종 단계가 바로 ‘출교’이다(마 18:15-20). 요즘 같은 시대 아무리 잘못했다기로 성도를 교회 밖으로 내쫓는 배부른 교회가 어디 있겠냐마는, 유평교회는 출교를 견실히 실천하는 교회다. 함께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어져 가기 위해서 우리는 본문에 명백히 나타난 하나님의 면역체계를 믿고 따른다. 누가 출교의 대상이고, 출교의 목적이 무엇인지 배워보자. 출교가 단순히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와 교회를 복음으로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감사와 기쁨으로 순종하자. 

1. 출교 대상: 악한 사람(1, 2, 9-13절)

고린도 교회 중에 있었으나 그들이 제대로 다루지 못한 죄는 구체적으로 음행이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1절). 음행(포르네이아)은 ‘매춘’을 뜻하는 단어이지만 일반적으로 부부 관계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성적인 죄를 가리킨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중에 있던 죄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다: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1절). “아버지의 아내”는 생모가 아니라 아버지가 이혼 또는 사별 후 얻은 아내를 말한다. 아무리 생모가 아니라도 아들에겐 어머니다.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하는 것은 이방인 중에서도 심각한 범죄로 여겨지는 문제였다(유대교-사형):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1절). ‘취하다’는 동사는 문자적으로 ‘가졌다’는 것을 뜻하고 이는 현재형으로 이 악한 행위가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행위라는 것을 말해준다. 죄를 회개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죄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있는 성도를 어떻게 평가하고 다룰 것인지 이미 판단을 내렸다: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3절). 하지만, 그가 먼저 문제를 제기한 것은 교회가 왜 죄 문제를 복음의 지혜와 능력에 따라 다루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2절). 교회 가운데 죄가 발생한 것에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고(통한히 여김), 음행을 즐기고 있는 성도를 교회 밖으로 쫓아내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교만하여졌기 때문이라고 책망했다. 죄를 다루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교만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죄의 질병에 걸린 지체를 회복하고 몸 전체를 건강하게 하기 위하여 죄를 다루라고 명령을 내리시는데, 몸인 우리가 그 명령에 따르지 않고 ‘내가 볼때 괜찮으니까 그냥 내버려두자’라고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9-10절까지 내용을 보면 고린도 성도들이 어떤 식으로 교만한 마음을 품었을지 추정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이전에 쓴 편지에서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라고 했다(9절). 그런데 성도들은 ‘어떻게 그런 자들과 도무지 사귀지 않고 살 수 있어. 세상 모든 사람이 거의 다 그런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은 바울의 기준이 비현실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한 말의 의도를 되찾으려고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10절). 

바울의 기준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 성도에게 적용해야 할 것이었다. 고린도 교회 성도는 세상에서 누가 그런 기준을 만족시키겠냐고 판단하며 은근슬쩍 성도도 그 기준을 벗어나도 상관없다고 교만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 형제 또는 자매라고 말하는 자는 죄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못을 박는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11절). 죄에 대한 교회의 건강한 반응은 참된 회개이지 묵인이 아니다. 죄는 다뤄야지 넘어가선 안 된다.

하나님의 기준은 교회 안팎의 사람에게 모두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이 죄라고 말씀하신 것은 누구에게나 죄다. 하지만 교회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할 권한이 없다(진리를 말해줄 수는 있지만). 그들을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12-13절). 하지만, 하나님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판단하라고 하신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12절).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 대하여 교회는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할 의무가 있다(13절).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죄를 용납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요 8:7). 그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주님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간구하셨다(요 17:15). 복음의 능력이 살아있는 교회는 죄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죄에서 돌이키게 한다. 복음은 회개하는 죄인을 언제든 용서하고 회복시키는 은혜를 제공한다. 하지만 복음은 회개하지 않고 머물러 있기 원하는 죄인을 반드시 징계한다. 성적인 죄, 돈을 사랑하는 죄, 하나님보다 무언가를 더 숭배하는 죄, 폭언을 쏟고 속이는 말을 하고 술 취하고 방탕한 죄 등 모든 크고작은 죄는 교회 밖으로 쫓아야 한다. 그 죄를 버리지 않고 계속 머무는 성도는 그 죄와 함께 교회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2. 출교 목적: (1) 성도 회복(3-5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와 함께 있지 않았다(에베소). 그러나 그는 마음으로는 진정으로 그들과 함께 교회에 있는 사람처럼 교회 안에 일어난 죄 문제를 판단하고 다루기 원했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3절). 바울이 내린 판단은 사도적 권위가 실려있었지만, 단순히 주관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자기가 세운 교회에 어처구니없는 범죄가 일어난 것에 화가 나서(명성에 흠집) 혹은 교회가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에 답답해서 감정적으로 반응하며 출교하라고 호통친 게 아니었다.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인 교회 안에 죄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바울 자신은 이미 판단을 내렸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 모두가 함께 같은 판단을 내리기를 간절히 요청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4-5a절).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라는 말에 주목하라. 교회가 함께 내리는 판결은 단순히 사람의 판결이 아니다. 주 예수의 능력으로 내려진 판결이다. 주님은 교회 말을 듣지 않는 범죄한 성도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불신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약속하셨다(마 18:17-18). 교회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분의 뜻에 따라 성도를 불신자로 분별하여 내쫓는 것에는 하늘의 권세가 함께한다. 주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8:20, 바울, 너희, 주님).

교회 밖으로 쫓아내는 것을 가리켜 사탄에게 내주었다고 표현한다(5절). 영적인 자원과 돌봄이 제공되고 은혜의 방편을 풍성히 누리며 복음의 기둥과 터로 보호받는 교회와 단절된 자는 사탄, 세상, 연약한 자기 육신 등 적군이 점령한 지역에 무방비 상태로 무장하지 않은 채 투하된 것과 같다(프라이어, 102p). 그런데,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징계를 내리는 이유는 처벌이 아니라 회복이라는 것이 놀랍다: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5절).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실제로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는 성찬을 함부로 대하는 죄로 인해 육신이 병들고 죽음에 이른 자들이 제법 있었다(고전 11:30). 그러나 출교된 자의 육신을 멸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이기보다 그가 즐기는 죄다. 죄는 육신과 혼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주범이다(술 취함-방탕함-육신의 질병과 피폐한 삶). 출교라는 극단적인 징계를 내리는 이유는 교회와 단절된 슬픔과 고통을 통하여 그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죄를 미워하고 회개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래서 주 예수의 날에 그의 영혼이 최종적인 멸망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범죄하게 만드는 발은 찍어버리고 눈은 빼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저는 다리와 한쪽 눈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는 것이 멀쩡한 몸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막 9:45, 47). 교회가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를 불신자로 여기고 출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혹시 그/그녀가 공동체에서 찍어버린 바 되고 빼버림을 당할지라도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을 진정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복음은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이 있고, 출교는 최후의 처방이다.

3. 출교 목적: (2) 교회 거룩(6-8절)

교회가 죄를 용납하는 것은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고전 3:1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6절).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가 죄인을 그 죄에서 돌이키지 않아도 괜찮다고, 거룩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 교회에 죄를 그대로 가지고 머물라고 하는가!

교회가 끝까지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를 출교하는 두 번째 목적은 교회를 거룩하게 지켜내기 위해서다. 바울은 이것을 유월절 예식 때 사용된 음식을 통하여 설명한다. 구약시대 유월절 예식을 치를 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누룩을 말끔히 제거해야 했다. 누룩은 빵이나 술을 부풀게 하는 발효제였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전에 만들었던 반죽 일부를 남겨놓았다가 그것을 효소로 삼아 새 반죽을 만들었다. 언제나 집안에 누룩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월절 절기 동안에는 누룩이 전혀 발견되지 않도록 새로운 반죽으로 떡을 만들어야 했다. 그것은 그들의 옛 삶 곧 죄악된 삶을 버리고 새 삶 즉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유월절에 바쳐진 희생제물이 그들의 정체성 곧 언약의 피로 맺어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그렇게 살아야할 근거를 제공했다.

바울은 마찬가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제 누룩 없는 백성이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7절). 교회가 내버려야 할 묵은 누룩은 8절에 진술된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이다. 교회는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명절을 지켜야 한다(8절). 이 말씀은 악에 머무는 자가 주의 만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금해야 할 근거를 제공한다. 또한, 교회가 유월절 양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명절을 지킬 때마다(떡으로)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순전한 마음과 그에 따른 진실한 행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우리는 유월절 희생양 그리스도 예수를 기념할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누룩을 제거해야 한다.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을 제거하고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복음에 반응하며 구세주를 찬양해야 한다. 이 과정은 교회를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는 일이며, 회개하지 않는 죄를 징계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물었다(6절). 온 교회를 거룩하게 지키려면 아무리 작은 죄라도 남겨둬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병원에 빗대어 말한다. 모두가 죄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병자라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의사에 빗대어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고 하셨다(눅 5:31). 맞다. 우리 모두 죄라는 병에 걸린 자이고 영혼의 의사이신 주님이 필요하다.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눅 5:32).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라. 세상에 영적으로 건강한 자는 없고 의사이신 주님이 쓸데없는 자도 없다. 그러나 스스로 건강하다고 착각하며 주님을 거부하는 자는 의인이 아니라 가망 없는 죄인이다. 그래서 복음의 능력이 살아있는 교회는 죄인을 절대로 편안하게 놔두지 않는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거나 거부하는 죄인을 회개하도록 징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