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아브라함의 죽음
본문 : 창세기 25장 1-18절
설교자 : 이병권

 

오늘 본문은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생애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열네 장에 걸쳐서 기록되었고, 오늘의 본문인 25장에 와서 마무리됩니다. 75세의 나이로 자신의 고향을 떠났던 아브라함은 여러 많은 일들을 겪었고 이제는 인생의 마지막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한 해가 끝나가는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인생을 계절로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인생의 사계절 중에 겨울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겨울은 힘이 있고 활동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그런 느낌은 아닙니다. 그처럼 인생의 마지막 때를 생각하면, 우리가 겨울을 생각하는 것처럼 분위기 좋고, 긍정적이고, 뭔가 가능성이 보이는 그런 모습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인생의 마지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해서 그냥 움츠려들거나 연약해지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고, 과거만을 회상하며, 추억 속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어떻게 인생의 마지막을 보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1) 25장은 아브라함이 그두라라는 여자를 후처로 맞은 일로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언제 후처를 맞이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 일부는 이 일이 사라가 죽기 전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라가 죽은 후의 재혼했다고 보기에는 아브라함의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에, 늙은 아브라함이 여러 자녀를 낳기에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자신이 더 젊었을 때 둘째 부인을 맞이했을까요?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것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내인 사라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100세에서 나이를 더 먹으면 하나님이 아이를 낳게 할 수 없을까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24장과 연결해서 읽으면 자연스럽게 사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이 재혼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배열과 또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 동사가 이 일이 사라의 죽음 후에 있는 일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아브라함은 사라가 있는 동안에는 또 다른 아내를 두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일이 사라가 죽은 후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나이가 137세 때에 사라가 죽었으니, 아브라함은 적어도 137세 이후에 재혼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재혼한 아브라함은 일반적인 우리 정서로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나이에 그냥 혼자 살지, 뭐 하러 재혼을 하나?’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습니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아브라함은 혼자서 삐걱거리는 쇼파에 앉아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보다,

방한구석에 앉아 하루 종일 TV를 보는 것보다, 남은 삶 동안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더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 더 좋은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난 늙었기 때문에 이제 할 수 있는 게 없어!’라고 생각하기보다, 두 손 놓고 가만히 죽을 날을 기다리기보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을 보다 사는 것처럼 살기위해서 더 나은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제가 미국의 그레이스 교회에 갔을 때 봤던 것이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여러 곳에서 수고하며 섬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주일 아침 일찍부터 오셔서 주보를 나눠드리는 분도 계셨고, 또 곳곳에서 봉사하시는 연로하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연세가 많으신 부친님 모친님들이 모이기를 힘쓰기 위해서 수고함으로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십니다. 따뜻한 방에서 그냥 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오셔서 자리를 지키시는 모습이 참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교회에 크고 작은 행사들이 있을 때마다 참석하셔서 주방에서 봉사하시고, 여러 수고를 맡아하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정말 작은 일이라도 주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감당할 때, 그러한 섬김이 우리의 삶을 더 생기 있고 활력 있게 합니다. 그러한 수고는 우리의 인생을 그저 나이만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좋아지는 인생으로 만들어 갑니다.

이어지는 2절에서 4절까지는 아브라함과 그두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과 그 후손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두라와의 사이에서 총 6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까지 낳은 자녀라고 하면 이삭과 이스마엘이 전부였는데, 30대가 아니라 130대 후반이 지나서 아브라함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자녀를 낳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이름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꾸시며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번성하여 큰 민족이 되었고 아브라함은 그 많은 민족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12절부터 이스마엘의 족보가 나오는데,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열두 명의 아들은 열두 지도자가 되고 번성하여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거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그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말한 것을 깜박하거나 잊어버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어떤 것도 걸림이 없으십니다. 어떤 것도 그분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고 적고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하는 것은 그분에게는 의미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을 잊지 않으시고 그 모든 말씀을 지키십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나이가 들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약속을 이루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75세라는 늦은 나이에 시작한 믿음의 여행! 아브라함은 안전한 곳을 떠나 모험과도 같은 삶을 살면서 때로 실수도 했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그를 빚어가셨습니다. 그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어 죽음을 앞두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을 정리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5)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물려줍니다. 여러 아들들 중에서 약속의 아들인 이삭만이 아브라함의 상속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이삭만을 사랑하고, 다른 자녀들은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6)

아브라함은 다른 자녀들에게도 재산을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했던 일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그들로 이삭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게 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아들들과 이삭을 분리시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한 것은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전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에게 그렇게 했었습니다. 그와 같이 그두라에게서 낳은 자녀들에게도 똑같이 이삭을 떠나게 합니다. 이삭이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가는데 문제가 없도록 한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의 이런 조치가 없었다면 살면서 계속 많은 갈등으로 서로 부딪힐 것입니다. 그두라의 자녀들은 여섯 명이지만 이삭 혼자입니다. 그들이 힘을 합쳐서 나쁜 마음을 먹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일들을 미리 막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다음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마치고서 아브라함의 삶은 마무리됩니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7-8) 아브라함의 나이 175세에 그는 믿음의 여행을 마쳤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아버지의 집을 과감히 떠났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신뢰함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100년의 세월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은 삶이었지만, 그는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자신의 조카 롯과 갈등이 있었을 때 관대함으로 그에게 양보했습니다. 롯이 위험에 빠졌을 때는 그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나아가 승리하기도 했습니다.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소돔 성을 두고 중보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두려움에 빠져서 거짓말을 한 적도 있었고, 과거의 잘못을 그대로 되풀이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다림이 길어져서 초조해졌을 때 아내의 조언을 받아들여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실수와 연약함에도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무지막지한 순종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삶은 ‘믿음의 조상’ 이라는 수식어와 ‘하나님의 벗’ 이라는 놀라운 별명을 얻게 했습니다(약2:23). 이 모든 것은 그를 택하셨고, 그를 부르셨고, 그를 인도하셨고, 그를 위해 친히 준비하셨고, 그의 삶에 함께 하셨고, 그의 예배를 받으셨던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그 일에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믿음으로 감당했습니다. 이제 이 땅에서 아브라함에게 허락된 시간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끝은 영원한 끝이 아니라 진짜를 위한 또 다른 시작일 뿐입니다. 그가 믿음으로 바라보았던 영원한 곳에서 새로운 시간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죽음을 맞이했고 한 세대가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 죽음 역시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그 약속의 성취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15:15)

아브라함은 그 마지막, 죽음까지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죽음을 통해서 교훈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도,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결국은 이 땅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미리 준비하지 못합니다. 마치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죽음을 보며 기억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언젠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이 땅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 때를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이 소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 자체는 절망이지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죽음을 소망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세상이 알 수 없는, 세상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영원한 소망을, 죽음을 통해 바라봅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소망을 바라봅니다. 주님이 주신 살아있는 소망을 기대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이미 장사되어 있는 곳, 막벨라 굴에 장사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명을 누리고 언젠가 이 땅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고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11)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던 하나님이 이삭에게도 복을 주십니다. 마치 이어달리기 경주에서 배턴이 다음 선수에게 넘겨지듯이 하나님의 축복이 다음 세대인 이삭에게 이어졌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또한 이삭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주인공이었던 아브라함은 떠났지만 다음 주인공인 이삭은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의 감독되시는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의 뜻에 따라 이야기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분의 역사를 기록해가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생애는 끝나지만 창세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오늘 본문을 정리하면, 아브라함은 후처를 얻어 여러 아들을 낳았지만,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자신의 상속자로 삼아 모든 소유를 주었고, 다른 아들들은 이삭으로부터 떠나게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수명이 다해서 죽었고 막벨라 굴에 장사됩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어받아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말씀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어떻든지, 그 상황이 어떻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름대로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하신대로 아브라함은 장수하다 평안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했을 때 얻은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그 섭리 가운데 자신을 신뢰하는 자를 통해 자신의 계획과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생애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도 이어지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이삭의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시며 말씀하신 모든 것을 지키십니다.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는 가운데 믿음의 여행에서 계속해서 순종을 선택해야 합니다. 나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영원한 본향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며, 우리가 걷고 있는 믿음의 여행입니다.

작년 9월 30일부터 제가 수요일 말씀전할 때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봤습니다. 시작한지 일 년하고 한 달이 더 지났는데, 드디어 오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한 사람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배울 것이 있었고,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었던 그 모든 사건들 속에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보다는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을 볼 때와 다른 위인전기를 볼 때와의 다른 점입니다. 위인전기는 그 사람의 어떠함을 높이며 그 사람의 특별함에 주목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압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격 없는 자를 택하셔서 어떻게 그 모든 계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지 알아가는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고, 아브라함을 택하셨던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 아브라함의 예배를 받으시고 그의 친구가 되셨던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셨던 하나님의 축복이 이삭에게 이어졌고, 그 축복이 흘러 흘러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왔습니다. 그 놀라운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려드리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기억하실 때마다 그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그를 빚으셔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놀라운 섭리 가운데 빚어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 계속해서 그 선하신 뜻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약속을 신뢰함으로 담대하게 이 땅에서의 믿음의 여행을 계속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