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심판이 할 수 없는 것

본문: 로마서 2장 1~16절

설교자: 이병권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심판에 대해서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설명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들,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어 버리고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사는 자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내버려 두심으로 그들이 이르게 되는 결국은 사망,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이 무서운 심판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불경건과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 그 사실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즐거운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박수를 치며 ‘그들에게는 심판이 마땅해!’ 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와는 차원이 다른 악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심판은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놀고 있을 때 어른이 와서 한 아이의 잘못을 지적하면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전 안 그랬어요.’ 방금까지 같이 놀아놓고 자기는 아니라고 하면서 혼나는 아이의 잘못을 친절하게 알려주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큰 잘못을 해서 욕을 얻어먹는 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뉴스에 나오는 사건들의 범죄자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 그럴 수 있습니다. ‘난 저 사람과는 달라’ ‘저 사람은 심판이 마땅해’

 

우리는 죄를 미워하고 어떤 일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합니다.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주 범하는 실수는 우리가 죄인을 대할 때 마치 나는 그 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처럼 나를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교만이 일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함으로 나를 그 사람보다 더 높은 위치에 두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우리가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런 자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자주 하는 일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바울은 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을 말할 때 그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사용하는 표현을 보면 “그들이”, “그들을”, “그들에게” 입니다. 그들이 불경건과 불의를 행했고 그들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었고 그들이 진리를 무시함으로 타락했고 그들이 하나님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표현을 바꿉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네가 너를 정죄함이다.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다’ 바울은 “그들”이 아니라 “”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말할 때, 그렇지 그냥 두면 안 돼! 진노가 마땅하지! 맞장구치던 자들의 입을 단번에 막아버린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대상에 대해서 몇 가지 견해가 있지만, 당시 문학 양식으로 사용되었던 가상의 대화 상대를 두고 수사적인 질문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도 이러한 표현 방법이 사용되는데(약2:20) 가상의 대상이지만 실제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팀 켈러는 1장과 2장의 대상에 대해서 우리가 탕자의 비유로 알고 있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아들에 관한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비유에서 동생은 아버지의 재산을 낭비해버리고 방탕하게 삽니다. 그런 동생과 달리 형은 좋은 아들입니다. 아버지 뜻을 따라 삽니다. 하지만 비유에서 동생뿐만 아니라 형도 회개가 필요한 아들이었습니다. 로마서 1장에 회개가 필요한 사람이 탕자와 같다면 로마서 2장에 회개가 필요한 사람은 탕자의 형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바로 당신이 탕자의 형과 같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당신도 회개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의 경고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불경건하고 불의를 행하는 자들, 우상숭배하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죄 가운데 사는 자들, 그런 악한 자들과 어떻게 내가 같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이런 잘못된 생각을 깨뜨립니다. 자기 방어와 자기 논리에서, 자기기만과 착각에서 빠져나와 정신 차리라고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고 정신 차리십시오. 당신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심판하시는 날에 하나님 앞에서 ‘저는 살인 한 적이 없어요!’라고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심판은 저기 있는 저 사람,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저 죄인에게 어울립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미워한 일이 없어요.’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고(마5:22),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요일3:15).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순수하고 깨끗할까요?

 

저는 제 딸들에게 이런 저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면서 나는 얼마나 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생각처럼 잘 하지 못하고 실수할 때가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이들의 잘못 중에서 잘 참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들이 엄마를 함부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제가 과하게 반응을 해서 스스로 반성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이들이 엄마를 함부로 대할 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훈계하면서 정작 살면서 보면 제가 아내를 함부로 대할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훈계하면서 내가 같은 잘못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2: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심판, 피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심판이 할 수 없는 것, 하나를 발견합니다.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될 것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심판을 면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를 회개에 이르도록 인도하십니다.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집을 부리며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직접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6절부터 11절은 두 절씩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교차대구적 구조라고 하는데, 단락의 제일 위와 제일 아래에서부터 시작해서 둘씩 짝이 되는 것입니다. 6절과 11절이 짝이 되어 심판의 원리를 말하고 7절과 10절이 짝이 되어 선을 행하는 사람과 그 결과를 말하고 8절과 9절이 짝이 되어 악을 행하는 사람과 그 결과를 말합니다.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2: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2: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2: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심판의 원리는 이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행한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시기에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납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악을 행하는 자는 진노가 있습니다. 그 원리와 결과가 분명하기에 둘씩 짝을 두고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바울은 로마서의 주제라 할 수 있는 1장 16절과 17절에서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습니다. 1장에서 믿음을 말했던 바울이 왜 갑자기 여기서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고 말하는 걸까요?

 

여러 견해가 있는데, 그 중에 받아들일 만한 두 가지를 견해를 살펴보면 하나는 여기서 말하는 선을 행하는 것은 믿음의 증거로 나타나는 행함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함에 믿음을 전제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말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그 문제는 이후에 바울이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정말 사람이 선을 행한다면 그에 대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번째 견해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여기 단락에서 믿음을 전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바울이 전개해가는 복음의 강조점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볼 때 이어지는 말씀에서 행위의 한계와 복음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행한 대로”라는 원리가 있고 그 원리에 따라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이 하는 것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그 결과를 받도록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지만 사람은 외모로 취합니다. 예쁘면 용서가 됩니다. 잘 생기면 봐줍니다.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그렇게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의 배경이나 지식이나 가진 것이나 그런 외적인 것들을 가지고 차별하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길고양이가 있어서 먹이를 주려고 해도 예쁘게 생긴 애는 먹이를 주지만 그렇지 않은 애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때로는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대우합니다. 차별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다르게 대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도 관대해집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나름의 핑계를 찾고 변명하기가 쉽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분노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이 자기 생각을 주장하면 완고한 것이고 내가 내 생각을 주장하면 심지가 굳은 것입니다. 남이 지출을 많이 하면 씀씀이가 헤픈 것이고 내가 지출을 많이 하면 마음이 넉넉한 것입니다. 남이 잘못을 지적하면 비판적인 것이고 내가 잘못을 지적하면 예리한 것입니다. 남이 잘 차려 입으면 허영심이 많은 것이고 내가 잘 차려 입으면 패션 감각이 뛰어난 것입니다. 남이 위험을 감수하면 무모한 것이고 내가 위험을 감수하면 용감한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나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차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 행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의로우신 심판(5)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심판이 할 수 없는 것, 또 하나를 발견합니다. 심판은 따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대해서 맞다! 틀리다! 따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공정하게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느냐? 입니다. 내가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출신이 어디이냐?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 누구의 자식이냐? 얼마나 부자냐? 얼마나 잘 생겼냐? 얼마나 똑똑하냐? 이런 배경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 그 행위에 따라 심판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행위에 따라 심판이 결정된다면 그 행위는 무엇에 대한 것입니까? 뭔가 기준이 있어야 그것을 행하고 행하지 않고를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무엇이 행함의 기준이 됩니까? 율법입니다. 율법이 기준이 되어서 행함과 행하지 않음을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율법이 기준인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 아닙니까? 율법이 없는 사람은요? 이방인은 어떻게 합니까? 이방인은 자신이 모르는 율법을 기준으로 심판을 받아하는 겁니까?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바울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양심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도 마음에 새긴 율법, 양심을 따라 행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옳고 그름에 대한 심판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C.S.루이스는 이런 설명을 했습니다. ‘누가 너에게 이런 짓을 하면 좋겠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상대방도 당연히 알고 있는 행동 기준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해도 되는 일, 하면 안 되는 일, 사람은 그런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모르는 사람도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이나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물론, 양심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양심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바꾸고 진리를 외면하기 때문에 또한 양심의 일깨움을 받더라도 그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기 때문에 잘못임을 알면서도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15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양심이 증거 할 때, 죄에 대한 분별이 되기 때문에 나의 죄에 대해서는 “변명”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고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심판이 할 수 없는 것, 마지막 하나를 발견합니다. 심판은 속일 수 없습니다. 심판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핑계를 대며 변명을 하며 속일 수 없습니다. 율법이 내 죄를 증거 하기에, 양심이 내 죄를 증거 하기에 속일 수 없습니다. 나의 죄에 대해서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불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속일 수 없습니다.

2: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하나님이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모든 은밀한 것들을 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죄는 숨길 수 없습니다.

 

심판이 할 수 없는 것,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예외 없이 진리대로 모두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피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차별 없이 행한 대로 공정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따질 수 없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거짓 없이 기준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속일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심판은 반가운 소식은 아닙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심판을 받을 거라는 사실이 좋게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심판이 없다면 복음이 의미가 있을까요? 심판이 없다면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심판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그 행한 대로 공정하게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의로우신 심판을 믿을 때 우리에게 있는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이 말씀을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죄에 대해서 완악한 마음으로 고집을 부리며 회개하지 않는 것은 그 날에 임할 진노를 거듭해서 적립하는 것과 같습니다. 열심히 모은 진노 포인트는 심판하시는 그 날에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가득한 죄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그 풍성한 인자하심으로 회개를 기다려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언젠가 끝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늦기 전에 여러분의 행위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심판에서 구원 받는 것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는 구원의 근거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행위는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정말 구원 받았다면 행위가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위가 증거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자신을 살피시고 주님 앞에 나아가 겸손하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그날에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