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시대를 분간하고 옳은 것을 판단하라
본문: 누가복음 12장 54~59절
설교자: 최종혁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무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54절)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12제자, 사역을 돕는 여인들, 군중들, 종교 지도자들(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 등의 무리)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양한 상황에 있었고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로 예수님은 전체 군중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도 하셨지만 특정 그룹의 사람을 향해서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특히 누가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누구를 향한 말씀인지를 분명하게 기록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무리”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12장에 기록된 말씀들은 일차적으로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라(1~12절),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부요하라(13~21절), 염려하지 말라(22~34절). 주의 오심을 지혜롭고 신실하게 준비하라(35~48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앞의 말씀에서는 그렇게 순종하는 참된 제자는 세상으로부터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겪게 될 것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의 주된 대상은 무리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닌 사람들은 정말로 많았고 각자가 원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병 고침을 바라는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끼니 거를 일은 없으니 따라 다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인지 궁금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뭔가 특별한 것 같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기는 했지만, 기존에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 배워왔던 것과 달라 예수님을 경계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옆에 친구가 가자고 해서, 가족이 가자고 해서 예수님께 나왔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망하셨습니다. “왜 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느냐? 왜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1. 시대를 분간하라 (54~56절)

먼저 예수님은 시대를 분간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두 가지 예를 드십니다.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이스라엘 지역은 지중해 동쪽에 위치하고 있고 서쪽에 비해 동쪽이 높습니다. 지중해를 통과한 습한 공기가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상승하게 되고 비를 뿌리게 됩니다. 따라서 서쪽에 구름이 이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는 가뭄의 끝에 하나님께 비를 구하면서 사환에게 ‘바다 쪽’, 즉 서쪽을 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쪽에서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다에서 작은 구름이 보였고 큰 비가 내렸습니다.

“곧 말하기를” 구름이 서쪽에 일어나는 것을 보면 곧바로 사람들은 ‘이제 비 오겠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즉, 구름이 서쪽에 일어나는 것과 비가 오는 것의 관계에 대해서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똑똑한 사람들만 알았던 것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시간 관찰을 통해 이런 상식이 생겨났고, 따라서 상식적인 사람,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고 인정하는 것이 서쪽 하늘에 구름이 보이면 비가 온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예시를 주십니다.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55절) 이스라엘의 남쪽은 사막입니다. 따라서 남풍이 분다는 것은 사막을 통과한 더운 공기가 유입된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기온이 상승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런 기상 현상에 대한 지식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관찰한 것들을 토대로 쌓게 된 결과물입니다. 오늘날이야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업들도 많고 해서 비가 오고 날씨가 더워지고 하는 것들이 오늘 우산을 들고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떤 옷을 입고 나가야 하나 정도의 문제일 수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농업이 생사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날씨에 대해서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했고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서쪽의 구름이나 남풍을 보면서 그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판단하고 그에 대응하는 것은 이들에게 정말로 중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조금 바꿔서 말하면, 그들은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날씨를 분석하고 그에 적절하게 반응했습니다.

“외식하는 자여”(56절) 외식한다는 것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그런 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위선자들아!!”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상 현상을 보면서 날씨를 예측하는 게 뭐가 그렇게 잘못이라고 예수님은 갑자기 사람들에게 위선자라고 하실까요? 당연히 날씨 예측하는 게 잘못됐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문제는 그들이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중요하게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분간할 수 있으면서 정작 더 중요한 영적인 일에는 무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 외식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들이 정말 이런 영적인 일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어서 그렇게 무지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의도적으로 무지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천지의 기상” “기상”이란 단어는 얼굴, 겉으로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판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성은 우리가 그렇게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먹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올 것을 예상합니다. 겨울이면 비가 아니라 눈이 올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경험과 지식을 통해 지금 보이는 현상을 분석하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 시대” 이런 기본적인 사고를 통해 이들은 날씨뿐만 아니라 ‘이 시대’도 분간할 수 있어야 했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그들 앞에 있는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며 그들은 이 시대가 바로 하나님께 구약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메시아의 시대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예수님 스스로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읽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 4:18-21)”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은혜의 해를 전파하셨습니다. 영적으로 포로된 자들, 눈 먼 자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실제로도 귀신에 사로잡힌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 내셨고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셨습니다.

침례 요한이 예수님께 당신이 약속된 그 메시아인지 질문을 했을 때도 예수님은 비슷하게 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23)” 여기서도 예수님은 동일하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진 놀라운 이적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더 이상 헷갈리게 하지 말고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10:25-26)”

이것이 진짜 문제였습니다. 믿을 만한 증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그분이 행하신 일이 다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증거 분석이 어렵고 복잡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들을 귀가 있고 볼 눈이 있었다면, 그들이 열린 마음으로 그 증거들에 대해 합리적인 추론을 했다면 그들은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그들 앞에 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의 이성을 최대한 활용했지만, 정작 하나님을 아는 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에는 그들의 생각을 멈췄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먹고 사는 일, 사업, 주식, 부동산 등에는 비상하게 돌아가는 머리가 왜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멈출까요?

시대에 대한 무지함은 능력의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고의적인 무관심이었고 고의적인 오해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회개의 말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보다 예수님을 통해 오는 음식, 치유에만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의 근원을 하나님이 아닌 마귀의 왕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너희 행위가 악하니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들은 악한 행위를 숨기기를 선택했습니다. 이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가서 회개하고 악한 일 행하기를 그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지금 하던 일을 계속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대를 분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혹시 이들의 모습 속에서 내 모습이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2. 옳은 것을 판단하라 (57~59절)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57절) 이 말씀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지 너희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앞의 예를 생각해 보면 서쪽에 구름이 일어나서 비가 오려고 하는 것이 보이면 그에 필요한 준비를 할 것입니다. 남풍이 불면 더위에 대한 대비를 할 것입니다. 지금 너희가 이 세대를 바르게 분간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도 너희가 알지 않느냐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 반응일까요? 예수님은 이번에는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58절)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좀 더 직접적으로 “너”라고 말씀하십니다. 57절까진 “너희”라고 하셨었습니다. 군중 속에 숨으려는 자들을 끄집어내서 이것이 그냥 보편적인 문제가 아니라 바로 너의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비유의 상황은 내가 큰 빚을 진 채무자이고, 채권자가 나를 법원에 데려가서 고발하려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실제로 누가 나를 고발해서 재판을 받게 될 때,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의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는 것인 ‘옳은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가는 길에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십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애써야 하고 재판장 앞에 서기 전에 해결을 봐야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먼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장 앞에 세울 것이라고 하십니다. “끌어 간다”는 말에는 강제성이 포함되어 있고 수치를 당한다는 의미도 포함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나는 재판장 앞에 서기 싫고 거부하겠지만, 강제로 그렇게 하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재판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유죄입니다. 너무나 명백한 죄이기 때문에 어떤 변호도 의미가 없습니다. 일단 재판장 앞에 서게 되면 유죄 판결을 받게 될 것이고 옥졸, 즉 감옥을 책임졌던 관리에게 넘겨지게 됩니다.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옥졸은 죄인을 옥에 가둡니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59절) 옥에 들어가도 금방 나올 수 있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지 못한다면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여기 “한 푼”은 렙돈으로서 당시의 가장 낮은 화폐 단위입니다. 오늘날 우리식으로 말하면 ‘일 원’도 남김없이 갚기 전에는 못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다 갚으면 옥에서 나올 수 있다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빚을 완전히 갚아야 한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얼마나 이 심판이 냉혹하고 심각한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재판에 넘겨지면 이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벌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자명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이겠습니까? 재판장 앞에 서기 전에 고발하는 자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재판장 앞에 서면 어떻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 그냥 괜찮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재판장 앞에서 변호를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떻게 감옥에서 돈을 갚을까를 고민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재판장 앞에 서기 전에 “길에서” 화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고발하려는 자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무리들은 마치 재판장 앞으로 끌려가고 있는 채무자와 같습니다. 아직 재판장 앞에 서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앞에 서기만 하면 유죄 판결을 받고 옥에 갇혀야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재판장 앞에 서기 전에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들이 시대를 분간할 수 있다면 이 비유가 어떤 의미인지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빛이 비추고 있었고 그들의 죄악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죄인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그들은 거룩하신 재판장에게 유죄 선고를 받고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 형벌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형벌입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의 개념을 예수님은 모르셨습니다. 그런 개념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시간 동안 죄의 결과에 대한 값을 다 치르고 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굳이 꼭 그 전에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을까요? 죽기 전에 해결하든 죽고 나서 해결하든 단지 선택의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선택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재판장 앞에 서고 형벌을 받게 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습니다. 기회는 지금, 재판장 앞에 서기 전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마치 거대한 제국이 작은 나라를 정복하기 전에 전령을 보내서 항복하라고 경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항복하면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받아 주실 것입니다. 지금이 기회라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하셨던 말씀은 시대를 분간하고 옳은 것을 판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상황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는 것이었고, 그에 맞는 행동은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전(몇 가지 교훈)

1. 다수에 속해 있다고 안심하지 말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무리’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무리에 속해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안도하고 있었습니다. ‘설마 이 많은 사람이 틀렸겠어. 설마 저 전문가가 틀렸겠어. 설마 저 많은 교인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틀렸겠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혹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하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가 중요합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습니다.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협착합니다. 무리에 속해 있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2.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겸손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더 큰 표적을 원했습니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표적을 보면 그것이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이미 충분히 예수님은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거절하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고 겸손하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보았다면, 그들은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우리도 더 많은 혹은 확실한 증거를 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지옥에서 누군가는 ‘나에게도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더라면 믿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들어 보십시오.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27-31)”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증거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겸손이 필요합니다. 눈을 감고 보여 달라고 하면 보여 줄 수 없습니다. 귀를 막고 들려 달라고 하면 들려 줄 수 없습니다. 겸손히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증거들을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이 옳은 지 알 것입니다.

3. 기회는 지금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설 날이 있을 것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설 사람도 있고, 아버지이신 하나님 앞에 설 사람도 있습니다. 재판장 앞에 서면 모두가 유죄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를 보면 재판장이 판결하고 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분명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재판장에 가서 우리를 변호하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재판장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고 계신 여러분은 아직은 ‘길’에 있습니다. 화해할 수 있습니다. 회개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

지금이 기회입니다. 잠시 후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을지 모릅니다. 누구도 모릅니다.

4. 화해한 자들은 기뻐하고 감사하라.

길에서 화해한 자들은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요 5:24)”,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확신 가운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화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아십니까?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0-22)”,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우리가 영원히 갚아도 갚지 못할 죄의 값을 무한하신 예수님이 대신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다 갚으셨습니다.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으셨습니다. 여러분이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아직 이 기쁜 소식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 바로 이 시간이 여러분의 마지막 기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