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세 이야기
본문 : 누가복음 9장 37~43절
설교자 : 이병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동안 누가복음에서 여러 번에 걸쳐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봐왔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으시는 것, 또 비슷한 내용이네!’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 다 알고 있는 거야!’ 이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아무런 기대감 없이 냉소적인 태도로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저의 책임이 큽니다. 제가 할 일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이 저의 부족함 때문에 그냥 계속 들어왔던 식상한 말씀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책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민하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자로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귀담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세 가지의 이야기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 이야기는 세 사람들의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일까요? 첫 번째 이야기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하나뿐인 아들이 있습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들입니다. 아버지로서 아들이 자라가는 것을 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자 행복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들이 이상합니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알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한동안 거품을 물며 몸을 심하게 떨기도 합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증상은 점점 더 심해집니다. 어떨 때는 위험하게 불속으로 들어가도 하고 물속으로 뛰어들기도 합니다. 이를 갈며 스스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합니다. 온 몸이 엉망입니다. 아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들은 단순히 병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악한 귀신이 아들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해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간신히 정말 힘겹게 몸을 추스르게 하면 괜찮은 것 같다가도, 또 다시 같은 일이 되풀이 됩니다. 때로는 무섭기도 합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나온 시간만큼 아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의 흔적들이 쌓여갑니다. 지나온 시간만큼 아버지의 한숨은 커져가고 고통은 깊어갑니다. 언제까지 이런 아픔이 계속될까요? 정말 아무런 희망이 없는 걸까요? 이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뭘까요? 옆에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는 일. 몸을 상하게 하지 못하도록 지켜보는 일. 다친 곳을 싸매주는 일.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런 일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괜찮아질까요? 아이가 나을 수 있을까요?’ 아버지의 바람은 이것뿐입니다. 아이가 낫게 되는 것. ‘내 아들이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냥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때로는 이런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왜 아들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요?’‘내가 뭔가 잘못해서 그런 걸까요? 그렇다면, 제가 그 벌을 받겠습니다. 제발 아들을 살려주세요.‘ 이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는 중에 이 아버지는 너무도 반가운 소문을 듣습니다. 새로운 희망의 소식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젊은 랍비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 랍비가 내 아들을 고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지만, 그자라면 그래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 없습니다. 얼른 그를 만나서 아들을 돌보아 주기를 부탁해야 합니다. 그런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이 계시다는 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여기 계시다고 듣고 찾아왔는데, 그의 제자들만 있고 그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듣자하니 제자들도 병을 고치며 놀라운 일을 행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선생님이 안계시니, 제자들에게 부탁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주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제자들은 이 아버지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들어줍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웬걸, 아무리 해도 안 됩니다. 제자들은 당황합니다. 이게 아닌데, 사람들 앞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이 아들을 고치기 위해 제자들이 돌아가며 용쓰지만 안 됩니다. 여전히 귀신은 아들에게서 나가지 않습니다. 아들에게 있는 귀신은 제자들도 어찌할 수 없는 특별한 귀신인가 봅니다. 아버지에게 그나마 남아있었던 희망이 사라져 갑니다. 이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 그분 밖에 없습니다.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렸던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이 아버지는 지금 다른 사람의 형편을 살필만한 처지가 아닙니다. 얼른 그에게 가서 큰 소리를 지르며 간절히 도움을 구합니다. ‘선생님! 간청합니다. 제 아들을 돌보아 주십시오! 하나뿐인 아들입니다’ 예수님의 허락하심을 받고,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자 귀신은 마치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처럼 아들을 거꾸러뜨립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괴롭히고 있는 더러운 귀신에게 말씀하십니다. ‘귀신아 내가 너에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어떻게 되었을까요? 첫 번째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여기서 귀신들린 아이를 생각해보십시오. 안타까운 마음이 드십니까? 아이는 귀신에게 사로잡혀 자신의 의지와 감정과는 상관없는 행동을 합니다. 귀신의 권세 아래에서 너무도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귀신이 얻으려는 것은 사람을 죄악과 절망의 상태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멸망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귀신에 대해서 말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귀신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사람들을 겁주려고 지어낸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은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그들 나름의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사로잡기도 하고 특별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귀신의 권세에 매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귀신이 원하는 대로 헛된 것을 위해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에서 귀신 들린 아이를 생각할 때 불쌍한 마음이 듭니다.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마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볼 때, 가지는 마음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자신의 상태를 분명히 아십시오.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관계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귀신의 권세 아래 매여서 귀신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이 다 하는 날, 귀신을 위해 준비된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의 어떠한 은혜도 경험할 수 없는 곳, 그 어떤 만족도 있을 수 없는 곳, 그 어떤 기쁨과 희망도 없는 곳, 고통과 슬픔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후회하며 끝이 없는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돌이켜야 합니다. 당신이 지옥에 대해,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든 관계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이며 믿지 않는 당신이 거하게 될 곳입니다. 이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무시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멸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은혜로운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하나뿐인 아들 이야기. 이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영광과 권세를 버리고, 이스라엘 나라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시고, 그 나라를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다가왔기에 제자들을 가르치며 그들을 훈련하는 일에 집중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며, 삼 일이 되어 다시 살아날 것도 알려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 명의 제자에게는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큰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외아들을 돌보아 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요청에서 그의 절박함과 간절함이 묻어납니다. 특별히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것이 그의 간구를 더 특별하게 합니다. 이전에 예수님은 과부의 하나뿐인 아들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야이로의 하나뿐인 딸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하나뿐인 아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 죄인들과 병든 자들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고치시며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 나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이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귀신아 내가 너에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그러자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아이가 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귀신에게 사로잡힌바 되었던 하나뿐인 아들을 되찾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귀신을 쫓아내시는 권위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들, 귀신의 권세에 매여 있는 자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귀신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시며 참된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겸손히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분이 주시는 참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다 놀랍니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랍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크신 능력에 대해서 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그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놀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며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놀라움과 더불어 두려움을 가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만약 여기서 피아노를 치면서 찬양을 부른다면, 어떨까요? ‘아니 피아노를 칠 수 있었어?’ 하며 놀라시겠죠. 그동안 그런 재능을 숨기고 있었나? 혹은 피아노를 배웠나보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여기서 갑자기 비를 내리게 한다면 어떨까요? 밖에 햇빛이 쨍쨍한데 갑자기 비를 내리게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런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냥 그 사람에 대한 놀람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놀람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고 하나님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시는 장면을 보고 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지. 예수님인데 뭐!’ 그런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구하며, 아버지의 도움을 구하셨습니다. 그것은 기도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그분을 향한 믿음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던 것입니다. 그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임의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나타나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그러한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제자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이야기를 나눌 차례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그 아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가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단순히 예수님의 능력만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제자들의 무능력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본문 앞의 내용과 함께 생각하면, 산 정상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영광과 산 아래에서 드러나는 제자들의 무능함이 큰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세 명의 제자들은 깨어있지 못해서 잠을 잤고, 나머지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럼 이 귀신이 너무 강해서 제자들이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걸까요? 예수님은 당연히 사부님이니까 할 수 있고 아직 숙달되지 못한 제자들은 무리였고, 당연한 결과였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렇게 책망하시면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마태복음에는 그들의 믿음이 부족했음을, 마가복음에서는 그들이 기도하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부족했고, 그것은 기도하지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사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로부터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9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어떤 귀신이죠? ‘모든’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허락하셨지만, 제자들이 그 능력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사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냥 묻어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허락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없고 패역하다고 하셨습니다. 패역하다는 말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자원을 그냥 썩히는 일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세 번째 이야기, 그 아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잊고 지냅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적들, 죄의 세력들이 갖고 있는 힘에 압도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악과 맞서 싸우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죄에 대해 너무나 쉽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야’라고 말합니다. ‘나도 다 똑같은 사람인데 뭘!’ 이렇게 나 자신을 변호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유혹과 마귀의 공격에 대항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냥 항복을 선언합니다. 내 앞에 있는 적이 너무 강하다며 겁을 먹고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악의 세력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우뚝 선 골리앗 같은 존재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골리앗은 쓰러졌습니다. 싸움에서 이긴 것은 다윗이었습니다. 용감하게 골리앗 앞에 나아가 그와 맞선 다윗은 승리했습니다. 어떻게 그가 승리했습니까? 그가 가진 무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가지고 있었던 무기, 승리를 가져다 준 진짜 무기는 물매가 아닙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다윗은 살아계시고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위대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능력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는 죄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아들을 따르는 자들은 패배를 거절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아들을 따르는 자로서,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세상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한적한 곳을 찾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항상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가운데 권능으로 그 악한 세력을 쫓아내며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진리를 이 땅 가운데 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본을 좇아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분을 의지함으로, 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자원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능력이 되십니다. 주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능력을 삶으로 경험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들

  1.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합니까? 그 아들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2. 귀신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결국은 어떠합니까?
  3. 왜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나요?(참고; 마17:20; 막9:29)
  4.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5.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