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육신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
본문 : 요한일서 1:1-4
설교자 : 최 종 혁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회마다 연극, 찬양, 뮤지컬 등의 많은 행사를 합니다. 그런 행사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일을 기념하고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왜 우리에게 중요할까요? 우리는 왜 매주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고, 왜 일 년에 한 번 날을 정해서 그러한 행사를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 역사적인 사건 자체가 정말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에 대해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자체의 놀라움보다는 그 의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편지입니다. 편지의 시작에는 의례 들어가는 내용이 ‘누가 이 편지를 쓰는가’와 ‘누구에게 쓰는가’, 그리고 일반적인 인사말입니다.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그런 형식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 인사말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있는데, 하나는 굳이 그렇게 명시하지 않아도 서로 다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그러한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었나 생각하면 그의 다른 편지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요한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어떤 인사말을 넣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긴급하게 전하고자 하는 말이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 전체의 축이 되는 표현은 3절의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입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핵심적인 말입니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전했는지, 그리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전했는지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사도 요한을 비롯하여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증인들을 가리킵니다. 직접적으로 보고 들었던 증인들 말입니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열두 명의 사도들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사도들의 증언’, ‘그 증언의 내용’, ‘그 증언의 목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의 증언
1-2절에서는 사도 요한 자신이 예수님을 보았고 그것을 전해주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굉장히 장황하게 표현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1-2절). 한 마디로 사도 요한은 자신이 전하고 있는 이것이 ‘효력이 있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법정에서 생각하면 이 증언은 증거로 채택되기에 충분한 정당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증언해서 전했다”(2절)고 말하고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전했다”(3절)고 말합니다. 그와 제자들이 했던 일이 바로 어떤 사실을 ‘증언’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증언”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이고, “전함”은 특별히 권위를 가지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전한 것이 만들어낸 이야기나 허상, 환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이고 그들은 그 사실을 전할 만한 자격이 있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들의 증언은 세 가지 측면에서 효력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정당한 증인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증언이 그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최소조건이 있어야 했습니다. 먼저, 두 명 이상이 같은 증언을 해야 합니다(신 19:15). 1-4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나’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만이 아닌 많은 사도 최소한 12명의 사도들이 같은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11명에게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너희가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행 1:8),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12번 째 사도로 맛디아를 선택할 때 그 자격이 ‘예수님의 행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한 자’였습니다(행 1:15-26). 그들은 보고 들은 것을 전할 의무가 있었고 그것에 충실했습니다. 그 역사적인 사실을 전해주고, 그 전해진 사람들이 다시 증인이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2천 년이 지나 우리도 예수님에 대해 같은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도들에 대해 교회의 터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에는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목격하고 귀로 들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그는 지금 마지막 남은 제자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을 만한 증인으로서 같은 말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증언이 효력이 있었던 것은, 그들이 역사적인 사실을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1절). 1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멀리 있는 대상에 점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처럼 표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멀리서 듣고, 보고 또 자세히 보고, 그것을 만지기까지 가까이 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또 예수님의 발밑에 앉아서 직접적으로 들었습니다(요한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생략된 많은 말씀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았습니다. 특별히 “눈으로” 보았다는 것은, 꿈이나 환영이나 비전을 통해 본 것이 아니라 육안으로 직접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재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세히 봤다고 말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훑어지나가듯이 본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본 것입니다. 예수님께 손으로 만질 만큼 가까이 나가서 그분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까? ‘사랑’과 ‘희망’은 분명 존재하지만 손으로 만질 수는 없습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손으로 만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물질적인 존재이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식사를 할 정도로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이런 표현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예수님이 실재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증언은 역사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증언으로서의 가치와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증언이 가치가 있는 이유는, 알고 있는 확실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2절). 그들이 본 것은 “영원한 생명”이고 증언한 것도 “영원한 생명”이며 전한 것도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사이에서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이들이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가져와서 독자들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들의 증언이 사상이나 철학,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직접적으로 체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중요할까요? 왜 이렇게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그들이 무엇을 증언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증언의 내용
증언의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은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증언합니다. 이 편지의 서두는 요한복음의 첫 부분을 떠오르게 합니다. “태초”,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 “그분이 나타나셨다”, “증인들이 예수님을 보았다” 등의 내용이 동일합니다. 그는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합니다. 그 예수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이셨다는 것과, 그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분”,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과 같은 표현들은 성경에서 하나님 이외에 다른 존재에게 사용한 적이 없는 표현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들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태초부터 있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우주와 지구도 창조 이후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지만 창조하기 전부터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태초부터 있는 분”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고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예수님이 바로 영원하신 창조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말할 때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헬라인들에게 ‘로고스’는 창조의 힘이었습니다. 우주의 원리, 에너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로고스’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자체를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헬라인에게든 유대인에게든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헬라인에게는 이 예수님이 너희가 알고 있는 창조의 힘이라는 의미였고,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의 하나님과 이 예수님이 같은 분이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들은 죽은 자로 태어납니다. 성경은 “너희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로 죄 가운데 태어납니다. 살아있는 것 같으나 참된 생명이 없는 자들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참된 의미에서의 생명, 하나님께서 처음에 의도하셨던 그런 삶에서 떠나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그러한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삶, 진정한 삶을 주십니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고 하셨던 하나님이 바로 구원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2절에서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로서 우리의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화들 속의 모습처럼 어떤 후광을 가지고 계셨다면 그분은 평범한 인간으로 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여느 아이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천사들이 와서 태어난 아기에 대해 말할 때 머리에 후광이 있는 아기가 아니라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기의 차이는 그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지만 일반 사람과 똑같은 출산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분에게는 조상이 있었고 여느 아이처럼 지혜와 지식이 자라갔으며 그분 역시 부모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잡수시지 않으면 배고프셨고 피곤하셨으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셨습니다. 온전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그러했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이 예수님에 대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가 만난 예수님이 신비하고 어떤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증언의 목적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것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것에 자신들의 삶과 목숨을 걸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 예수님께서 직접 주신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증언의 목적이 그들을 움직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3-4절).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에게 ‘왜 그리스도를 전하냐’고 물으면 흔히 ‘그들로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것과 조금 다른 관점에서 증언의 목적을 말합니다. 그는 “우리와 사귐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귐은 하나님과의 사귐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또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는 깨어진 관계였습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 깨어진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되었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사도들이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분을 영접하여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가 회복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사귈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자들을 또한 하나님은 서로 하나되게 하십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침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4-6).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라는 것은 삶을 공유하는 것이고 사랑으로 행하는 모든 것입니다. 단순히 친해지는 것, 아무 얘기나 나누는 것이 사귐의 전부만은 아닙니다. 서로를 섬기고 사랑으로 하는 모든 일들이 사귐이고 교제입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위해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하신 기도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성도의 하나됨이 왜 중요할까요? 그렇지 않을 때 단순히 좀 불편하기 때문입니까? 성도의 교제와 사귐이 바로 예수님을 이 땅에 드러내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다른 모임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자들이 모여서 하나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안에 다툼이 있다면 세상과 교회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이것을 전한 것은 너희로 우리로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믿는 자들은 마땅히 하나 되어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4절). 사도 요한은 진리 가운데 행하는 자들을 보는 것이 기쁨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평생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 주님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그가 이 땅에서 기쁨을 누린다면 아마도 사도로서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는 것일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자라가는 성도들을 보는 것이 그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도들의 증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고 강조하고 그것을 보고 듣고 전해주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통해 믿는 자들과 함께 교제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요한은 왜 인사말도 생략하면서까지 이 말을 하고 있을까요?
당시 교회 안에 침투하던 이단적인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의 핵심은,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완전히 구분하여 물질적인 것은 악한 것이고 영적인 것은 선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 물질을 입으신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성육신을 실재가 아니라 그렇게 보였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실제 인간이 아니라 환영으로서 나타난 것이었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져온 것도 실재가 아니라 환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였다면 그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온 구원과 사귐이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한 모든 명령이 가짜가 되고 그저 세상에서 잘 살라는 권고의 말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환영으로 온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실체였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셨던 것은 역사적인 일, 실재였습니다. 그저 이런 소망을 품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사귐도 실재입니다. 그저 서로 의지하고 기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명령과 우리의 삶이 실재입니다. 여러분은 역사 속에 실존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계십니까? 그분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고 믿고 계십니까? 십자가의 사역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며 믿는 자들을 구원하셨음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음을, 지금도 살아계셔서 일하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알고 믿고 있는 예수님은 실재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며 당신 삶에 실제로 영향을 끼치는 예수님도 아닙니다.
역사적인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그대로 역사하셔야 맞습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 예수님이 나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가 믿는 분이 실제 예수님이 맞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실제적인 삶의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요한일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씀은(1:5-2:3) 실재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의 죄에 어떤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지에 대해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