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

본문: 고린도전서 12장 1-11절

설교자: 조정의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로 시작하는 본문은 이제부터 새로운 주제를 다룰 것을 알린다. “신령한 것”(프뉴마티코스)은 ‘영적 특성을 가진’ 대상을 가리킨다(사람, 2:15; 3:1, 복음, 9:11, 음식, 음료, 반석, 10:3, 4). 문맥 안에서는 “성령이…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11절) “은사”(롬 1:11)라는 것이 분명하다. 은사에 관한 사도의 가르침은 14장까지 이어진다. 그만큼 고린도 교회 내에서 은사에 관한 잘못된 이해와 오남용 문제가 심각했다. 19세기 은사주의(오순절주의) 운동이 미국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대한민국 대다수 교회를 전염시키면서,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실천하는 교회를 찾아보기 무척 힘들어졌다. 사도 바울이 살아있었다면 분명히 이 주제를 다룬 편지를 더 자세히 길게 써서 교회마다 바로잡게 했을 것이다. 

앞으로 몇 번의 설교를 통하여 성령님께서 친히 교회에 나누어주시고 자신을 나타내시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시는 은사가 무엇인지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기를 간구한다. 많은 교회가 따르는 이교도적 방식을 적극 거부하고, 반대로 신비로운 성령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거나 활용하기를 거부하려는 태도가 있다면 진심으로 돌이키고, 각 성도를 통하여 성령이 힘 있게 일하시고 교회를 함께 지어져 가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1. 성령의 은사는 이교적이지 않다(1-3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신령한 은사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기를 간절히 원했다.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는 표현은 복잡한 만큼 바른 교훈으로 그들이 깨우치기를 진심으로 갈망하는 사도의 심정을 보여준다. 바울은 3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바른 것을 알게 하겠다’고 설득한다. 그들이 잘못된 것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우상 숭배자들이었다. 우상 신전에서 신의 호의를 받기 위해 많은 신비로운 예식과 종교 활동에 참여했었다. 기독교와 이교도 모두 그들이 믿는 신과 접촉하고 계약을 맺고 예배하고 은혜를 얻는다. 그래서 기독교로 개종한 성도들은 과거 자신들이 따르던 신들을 대하듯 하나님을 대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령함과 이교도의 신령함은 상당히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이 알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시고 기록한 책을 주시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지만 이교도 신들은 황홀경에 빠져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교감하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더럽히고 미친 듯이 행하게 만든다.

바울은 그들이 구원받기 전에 추구했던 이교도적 신령함의 특징을 잘 안다고 말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 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2절). 그때 그들은 입이 있으나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는 죽은 신을 섬겼다(시 115:5; 렘 10:5). 하지만, 지금 그들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섬긴다. 말 못 하는 신과 교제하려면 비언어적인 방법을 총동원해야 한다. 비정상적인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그냥 끌려 간다. 말씀하시는 참 하나님과 교제할 땐 그냥 말하면 된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뜻을 감추지 않으시고 알려주신다. 그 뜻에 순종할 때 기쁨과 만족과 축복을 누린다.

그러니까 참 하나님만 섬기는 교회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이끄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이교도가 하는 방식으로 입증할 필요가 없다. 성도는 이교도의 영을 따라 말하거나 행동할 필요가 없다. 성령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는 이교도들이 자기들이 믿는 영과 접신한 것 같은 모습이 아니라 첫째, 어떤 환난과 핍박, 유혹과 시험 중에도 예수를 저주할 자라 모욕하지 않는 것(배교), 둘째,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따르는 것이다(3절). 

오늘날 대다수 교회에서 성령의 교통하심을 느끼기 위해서, 그 뜨거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이교도적인 방법을 추구하는지 생각해 보라. 크게 소리 지르거나, 반복적으로 같은 말을 정신없이 쏟아내고, 황홀경을 추구하거나, 춤추고 뛰고 구르고 눕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는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신령한 것”의 특징과 대단히 거리가 멀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감정을 쏟아낼 수 있다. 눈물을 흘리거나 부르짖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령의 신령함이 우리 가운데 분명하게 나타나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범사에 주로 인정하는 것이다. 기쁨으로 그분이 말씀하신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2. 성령의 은사는 개인적이지 않다(4-7절)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그들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방식에도 문제를 가져왔다. 자기 지혜를 자랑하고 자기가 선호하는 직분을 앞세워 파당을 만들었던 것처럼, 그들은 성령이 주신 은사를 자기 것처럼 자랑하고,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은사를 높이고, 덜 귀히 보이는 은사는 무시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각각 개인플레이를 한 셈이다. 프로축구에서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구단이 세계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를 몽땅 영입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축구는 팀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기량과 실력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함께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유기적인 연합을 만들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성령이 각 성도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시는 것은 개인플레이가 아니라 팀플레이를 하라고 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4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여러 가지인 것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은 것을 세 위격으로 계신 한 분 하나님으로 정리했다(성령, , 하나님). 은사는 영적으로 태어날 때 성령께서 주신 영적 재능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 재능을 타고나는 것처럼 거듭날 때, 영적 재능을 타고난다. 대표적인 성령의 은사는 8-10절에 나열되어 있다. 직분은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교회에서 특별한 봉사에(디아코니아) 전념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 교사가 승천하신 주님께서 직접 세우신 섬김의 직분이라고 말한다(엡 4:11). 사역은 가장 포괄적인 표현으로 성도가 은사를 가지고 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예로 바울은 가르치는 영적 은사를 회심할 때 받았다(행 26:16-18). 그는 사도라는 직분을 받아 모든 사람을 섬기는 일에 전념했다. 그의 사역은 이방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돌보는 일이었다. 

우리는 각각 받은 은사가 다르다. 성령께서 각각 다르게 주셨다. 같은 은사도 분량은 다르게 주신다. 우리는 각각 받은 직분이 다르다(직분이 없을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각각 하는 일이 다르다. 각각 다르니까 각자 알아서 하면 잘 될까?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각자 받은 은사를 자랑하거나 내세우거나 그것으로 경쟁하면 안 된다. 우리가 얻어낸 게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에게 각각 은혜로 주신 선물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같은 성령님께 고용된 한 팀이다. 우리가 은사를 사용할 때, 성령께서 그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셔서 교회를 유익하게 하신다(7절). 우리는 받은 직분을 특별한 지위나 권력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직분은 를 섬기라고 주신 봉사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섬기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 목사나 장로, 집사를 섬기는 게 아니다. 또한 우리는 주와 성도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내 힘으로 한 것처럼 교만하게 말하거나 칭찬을 요구하거나 기대한 칭찬이나 인정을 얻지 못했을 때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은사로 하는 모든 사역은 온전히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신다. 다만 우리는 주를 섬길 수 있음에 감사하고, 성령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사실에 항상 기뻐하고 감격해야 한다(무익한 종). 

존 맥아더 목사는 은사를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매춘이고,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직무 유기라고 말했다(432-3pp). 그러므로 성령이 맡긴 영적 재능을 활용하는 데 다른 성도와 동역은 정말 중요하다. 우리는 은사를 활용할 때, 같은 성령께 받은 은혜로, 같은 주를 섬기려는 목적으로,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 하심을 바라며 함께 동역해야 한다. 그래야 참 유익이 있다.

3. 성령의 은사는 영구적이지 않다(8-11절)

8-11절은 성령이 각각 성도에게 어떤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지 대표적인 예를 제시한다(완벽한 목록이 아니다). 강조하는 표현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따라”(8절), “같은 성령으로”, “한 성령으로”(9절)가 반복되는데, 이는 성령의 은사가 우리의 바람이나 간청, 훈련이나 열심으로 얻어낼 수 없다는 걸 명백히 말해준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11절에서 이렇게 쐐기를 박았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성령께서 성령의 뜻대로 주신다.

8-10절에 나오는 은사의 목록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어떤 사람 / 다른 사람, 9, 10절). 첫 번째 부류는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8절). 칼같이 나눌 수는 없지만, 지식의 말씀은 성경 각 구절의 본래 의미를 아주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말씀의 은사라면, 지혜의 말씀은 그것을 각각 삶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할지 성경의 원리를 가지고 말해줄 수 있는 말씀의 은사라고 할 수 있다. 바울처럼 둘 다 탁월한 은사를 받은 일꾼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한쪽으로 많이 치우친 사람도 있다. 참고로 영적 은사는 육신의 재능과 크게 상관이 없다(똑똑하고 잘 설명하는 데 말씀엔 은사가 없을 수 있다).

두 번째 부류는 이적과 관련이 있다: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9, 10절). 성령의 은사는 영구적이지 않다고 말한 이유는 바로 이 두 번째 부류 곧 이적과 관련이 있는 은사가 오늘날엔 나타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사도들 시대엔 분명 나타났다. 성령께서 분명히 이와 같은 은사를 주셔서 성도가 능력을 발휘하게 하셨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성도를 발견할 수 없다. 성령께서 이제는 이런 일을 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셔서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짧게 하나씩 따져 보자. 

믿음은 구원 얻는 믿음이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산을 옮길 만한” 즉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이다(고전 13:2).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잉태한 사라, 믿음으로 홍해를 건넌 모세, 믿음으로 여리고를 무너뜨린 여호수아,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고, 사자들의 입을 막은 이들을 얘기한다(히 11장). 병 고치는 은사가 무엇인지 정확히 보여주는 인물은 예수님과 사도들이다. 병을 호전시키거나 통증을 완화하는 수준이 아니라 무슨 병이든 완벽하게 낫게 하는 능력이었다. 능력 행함은 치유 외에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키는 능력이다. 가령 귀신을 쫓거나 만물을 다스리거나 죽은 자를 살리거나 반대로 산 자를 심판하는 권세를 예수님과 사도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이런 기적을 일으킨 것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을 기적으로 확증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충분한 말씀이 기록됐을 때, 기적은 점차 사라지고 기적의 은사도 중지됐다.

예언함부터 마지막 방언 통역함까지는 14장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앞서 말하는 내용을 포함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 앞에서 전달하는 은사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엔 각 교회에 이런 은사가 필요했다. 그리고 예언하는 자의 말이 정말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는지 알려면 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들을 분별하는 은사도 필요했다. 각종 방언 말함이 필요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말씀이 모든 민족에게 전달되려면 그들의 언어로 번역되거나 통역할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언어를 익히는 것은 오랜 훈련과 경험이 요구된다. 하나님은 그래서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 믿지 않는 자가 놀라움을 가지고 전달되는 메시지를 주목할 수 있게 하셨고, 또한 알아들을 수 있어야 실질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방언들통역하는 은사도 함께 주셨다. 바울은 13장에서 사랑은 영원하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8절). 영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이 완성됐을 때, 이적을 일으키는 모든 은사와 함께 예언과 방언도 모두 중지되었다.

2008년 신학대학원에서 성경을 공부할 때, 몇몇 한인교회 목사님이 ‘존 맥아더 목사가 성령의 은사를 간과하고 능력을 부인한다’고 성령의 은사를 풍성히 누리고 가르치는 곳에서 배우라고 권했다. 확실히 나는 일시적인 은사는 잊고 영원한 하나님 말씀만 철저히 의지하게 하는 곳에서 배웠다. 그래서 성령의 신령한 능력의 역사를 덜 체험했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성령께서 수천 명의 성도를 말씀 앞에 굴복시키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기 위해 헌신하도록 역사하시는 장면을 봤다. 우리는 황홀경을 경험하진 못해도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황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우리는 온갖 기적과 치유를 경험하진 못해도 날마다 우리를 아들의 형상으로 빚어가시는 기적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신비주의를 배척하지만, 신비로운 하나님과 영생을 누리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