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령과 함께 살아지다

본문 :  로마서 8장 1~13절

설교자 : 이병권

7장 끝에서 우리는 바울의 탄식을 들었습니다. 곤고한 자의 탄식을 보며 우리도 그와 같음을 알고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탄식은 탄식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8장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가능한 이유가 오늘 본문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지금까지 복음을 설명하면서 어느 정도 언급했었던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좀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은 복음에 대한 설명이 성령님께 초점이 맞추어져있다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성령의 렌즈를 통해서 복음을 보고 설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단어가 반복해서 많이 나옵니다. 8장의 전반부라 할 수 있는 17절까지 계산하면 15번 정도 나오는데, 그동안의 로마서 1장에서 7장까지 계산하면 4번 정도 나온 것과 비교하면 8장 전반부 기록에서 바울이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7장에서 바울이 율법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면, 8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성령님과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집중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7장과 8장이 율법과 성령으로 대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7장에서 율법의 무력함을 살펴보았습니다. 율법은 우리 안에 있는 죄, 우리 속에서 벌어지는 죄와의 싸움에서 우리를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성령님은 우리의 능력이 되십니다. 그래서 이제 바울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강조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은 본질적으로 성령님의 능력으로 사는 삶입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 삶이 생명력을 나타내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 삶이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전기차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전기차가 움직이려면 전기가 충전되어 있어야 합니다. 전기가 없으면 전기차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우리 삶에서 성령님을 배제하는 것은 전기 없는 전기차와 같습니다. 전기가 없는 차를 뒤에서 밀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와 같이 성령님이 아니라면, 구원받은 자로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과 함께 살아지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성령과 함께 하는 삶 다시 말해, 성령을 따르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자가 어떻게 성령님에 의해서 달라지는지 그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적용되는 세 가지 표현을 중심으로 본문을 생각해보겠습니다.

1. 예수 안에 있는 자(1-4절)

첫 번째는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얻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선언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책감에 괴로워할 이유도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을 따로 떼어내서 악한 의도로 이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난 무슨 죄를 지어도 심판 받지 않아! 난 하나님이 다 용서해주셔서 괜찮아!’ 이런 식으로 죄를 용납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말씀을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2절에서 4절까지 다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이 놀라운 선언,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생명을 주는 성령의 능력이 죄와 사망에 매여 있던 우리를 해방했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자유’합니다. 자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하나님은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 육신의 연약함으로 불가능했던 일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은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여기 죄로 말미암아 라는 말은 속죄의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죄를 없애기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셨습니다. 죄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하지만 죄는 없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셋째, “육신에 죄를 정하사”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예수님의 육신에 죄를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심판하셨습니다. 

우리가 얻은 자유에 대한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없애기 위해 자기 아들을 사람으로 보내셨고 그 모든 죄에 대해서 아들을 심판하셨기에 우리가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모두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과거형으로 이미 성취된 일을 말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의롭게 되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앞에 있는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현재형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셨고 뿐만 아니라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를 통해 계속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함과 동시에 율법의 성취를 말합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자유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유함으로 율법에 헌신합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율법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그리고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자로서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결혼 언약을 지키라는 말씀에 헌신하고 순종하기 위해 수고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모순처럼 보일 수 있는 이 진리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의롭게 된 자로서 우리는 율법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진 특권과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 율법에 해방되어 다시 성령에 의해 율법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것은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백성 되어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시려고 자기 아들을 보내셨고 성령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2. 영을 따르는 자(2-8절)

우리에게 적용되는 표현, 두 번째는 “영을 따르는 자”입니다.

롬 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4절에 언급되었던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라는 표현이 두 번째 단락에서 중심 주제가 되었습니다. “영을 따르는 자”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령을 따르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목으로 하면 ‘성령과 함께 사는 자’, 육신보다는 성령의 욕구를 따르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을 따르는 자를 육신을 따르는 자와 대조하는데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반면에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고 그 결과는 생명과 평안입니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말은 관심과 애정, 목적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도록 합니다. 나로 하여금 집중하게 만들고 몰입하게 만드는 관심사가 무엇인지,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나의 힘과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지, 나는 지금 어디에 관심을 두고 에너지를 쏟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여러분에게 그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줍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영을 따르는 자이지만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육신을 따르는 자입니다. 영을 따르는 자, 우리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연약하여서 영을 따르는 자이지만 육신의 일을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완벽하지 않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육신과 성령의 다툼과 긴장은 갈라디아서에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지만 로마서의 말씀에서 바울은 육신과 영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를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하 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생명과 평안을 가진 사람, 영을 따르는 자의 특징입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은 이 말씀을 가지고 아주 강하게 적용합니다. 그 적용은 잠시 후에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과 영을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종류의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는 서로 다른 결과가 주어집니다. 사망 혹은 생명입니다. 생각을 어디에 두느냐,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이처럼 중요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을 따르는 자는 ‘생각’합니다. 영의 일 생각합니다.

3. 영이 거하는 자(9-11절)

우리에게 적용되는 표현, 세 번째는 “영이 거하는 자”입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9절부터 바울은 대상에 대한 표현을 바꿉니다. 이제 이인칭으로 “너희”라고 말하면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직접 말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그 소속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그들은 육신이 아니라 영에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 성령님이 그들 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믿는 자는 성령님을 받습니다. 성령님이 믿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신학적인 표현으로 ‘성령의 내주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영이 계시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외 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물론, 더 깊고 풍성하게 성령님의 은혜를 경험하거나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성령님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 거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성도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말하면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주하심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0절은 11절을 함께 보면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바울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죄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지만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 몸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처럼 그 일을 하신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 대해서도 그 일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간단하게 하면 이러합니다. 영이 거하는 자는 ‘부활’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영원히 죽어야 했지만 생명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는 그 생명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체를 통해 그날에 경험하는 것은 사망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에 대해서 반복해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처럼 우리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다시 살 것입니다.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 부활의 완전함과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 일을 설명하기 위해 삼위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부활하게 하시는 성부하나님, 부활하신 성자하나님, 그리고 부활의 영이신 성령하나님, 그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활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부활의 소망에 대해서 어떤 도전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굳건하게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할 것입니다.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새롭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모든 연약함, 질병, 고통, 육체의 한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그때는 다이어트 할 필요도 없고 바이러스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구원은 단순히 이 몸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몸을 구속하셨고 이 몸을 새롭게 부활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활에 대해서 성령 하나님이 보증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셔서 그 자유로 주님을 섬기며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바꾸셔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우리에게 부활을 주셔서 사망의 두려움과 지배에서 벗어나 생명의 주님을 바라보며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런 우리가 이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끝으로 이 진리를 강하게 적용합니다.

롬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서 추가로 우리에게 적용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빚진 자”입니다. 우리가 빚진 자입니다. 얼마나 큰 빚을 졌습니까? 삼위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 연약하고 부족한 내 안에 거하시는 거룩하고 무한하신 성령님,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고 다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진 자입니다.

그러면 빚을 진 자로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육신대로 살면 안 됩니다. 육신대로 살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할 우리가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죽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 육신이 원하는 것, 육신으로 행하는 것을 죽여야 합니다. 여기 죽이다는 단어는 ‘어떤 사람이 죽도록 넘겨주는 것’을 뜻합니다. 특히 사형 선고와 그 집행을 위해 넘겨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이 말씀은 우리가 가지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필요를 거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릇된 금욕주의를 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죄의 본성이 원하는 것을 단호하고 철저하게 거절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저절로 죽도록 기다리거나, 그냥 손 놓고 지켜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거절하고 그 죄를 죽여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 일에 게을러져서 육신을 위해 악을 도모하고 죄를 용납하고 알게 모르게 생겨나는 육신의 생각들을 방치하면 우리는 육신의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육신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빚진 자의 삶이 아닙니다. 합당치 않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각과 죄가 원하는 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유혹이 온다면 그 즉시 거절하고 피해야 합니다. 유혹이 되는 사람은 만나지 말고 유혹이 되는 곳은 가지 말고 그런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생각을 키움으로 죄를 만들지 말고 단호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주님을 위해 마음을 쓰고 몰두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힘만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일 것을 말하면서 “영으로써”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 일은 성령님의 함께 하심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이것은 전쟁입니다. 죽여야 합니다. 죽일 때 우리가 삽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시는 생명의 삶은 몸의 행실을 죽일 때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우리 삶의 기준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해방되었으니 괜찮아! 율법 지키지 않아도 돼! 니가 원하는 대로 해!’ 이런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전에 우리가 할 수 없었던 것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바꾸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믿기만 하면 돼! 순종은 필요 없어!’ 가 아닙니다. 복음은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순종할 수 없었던 우리가 이제는 성령님의 함께 하심으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 죽이시기 바랍니다. 성질 좀 죽이시고 나쁜 생각들 좀 죽이시고 걱정과 근심들 좀 죽이시고 예수 안에 있는 자답게 성령을 따르는 자답게 성령이 거하는 자답게 그렇게 빚진 자답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과 함께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