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본문: 고린도전서 10장 1-13절

설교자: 조정의

악을 즐기는 자가 복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복음의 내용은 알 수 있고, 아는 것을 넘어 동의하며, 심지어 감정적, 의지적으로 동조할 수도 있다(약 2:19). 하지만 여전히 쉽게 원망을 쏟고,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지, 자기와 함께 계신지 시험한다면.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죄를 습관적으로 짓고, 하나님의 자리에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비롯한 돈, 명예, 인기 등 다른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앉혀 숭배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을 심각한 죄로 여기고 자백하여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다들 이렇게 살잖아. 어차피 내 행위가 구원에 지장을 주진 않잖아’라고 과신한다면. 그런 사람을 우리는 썩지 않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분명한 방향으로 달음질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말한 것이다(고전 9:27).

하지만, 고린도 교회에는 악을 즐기는 삶을 살면서 자신의 구원을 과신하는 이들이 있었다. ‘우상 신전에서 사람들과 가끔 시간을 보내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 뭐가 그리 문제야. 난 내 신앙 정도는 지킬 수 있고, 내 구원은 어쨌든 확실하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는 성도들을 바울은 확실한 본보기를 통하여 깨우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2절). 실제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 자들의 예시가 우리를 교만이 아닌 겸손으로, 과신이 아닌 절제로, 염려가 아닌 신뢰로 이끌기를 갈망한다.

1. 그들은 얼마나 은혜받았나?(1-4절)

바울이 선택한 본보기는 “우리 조상들”이다(1절). 본문에 묘사된 것을 보면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달음질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대다수가 민족적으로 이방인이었지만,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믿음으로 함께 이어받았다는 면에서(창 12:3; 롬 4:11, 9:6-8), 이스라엘을 그들의 조상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본보기를 통하여 고린도 성도를 깨우치기 원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1절). 가장 강력한 형태로(이중부정) ‘반드시 너희가 알아야 한다’라고 피력했다.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얘기지만, 그것을 통해서 지금의 상태를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바짝 차려질 만큼 확실한 경고를 받기 원했다.

그 경고의 내용은 5절에 기록된 것처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는 것이다. 더 생생한 사실을 말하면,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남녀 성인 백성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심지어 모세까지). 충격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충분한 보호하심을 얻지 못했나? 기적적인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적이 없는가? 그들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연약하거나 불성실했는가? 아니면 매일매일 하나님의 돌보심과 공급하심을 경험하지 못했나? 그렇지 않다. 

1…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1-4절). 그들 모두 다 같은 경험을 했다. 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임재와 보호를 뜻하는 구름 아래에 있었다. 모두 다 홍해 바다 가운데를 마른 땅으로 지나는 기적적인 구원의 은혜를 맛봤다(출 14장). 그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는 모세였는데, 바울은 그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2절).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인치신 분은(세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름 아래 그들을 보호하시고, 바다에서 그들을 건지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그 모든 여정을 모세를 통하여 하셨다. 모세는 멸망 받을 뻔한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중보 기도한 충성스럽고 인자한 인도자였다(출 32장). 이스라엘은 또한 모두 다 신령한 음식을 먹신령한 음료를 마셨다. 아마도 하나님이 매일 공급하신 음식인 만나와 광야 한 가운데서 하나님만 주실 수 있었던 반석에서 솟은 물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날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공급을 맛보았다.

우리는 종종 만일 우리가 그들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면, 그들처럼 악을 즐겨 행하며 심판받지는 않았을 것으로 과신한다. 우리 믿음이 그들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 조상들과 우리를 그리스도로 연결한다: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4절). 그들에게 모세가 있었다면, 우리에겐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들이 하나님의 구름 아래 보호받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는 구원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사망과 음부를 지나는 구원을 경험한다. 그들이 만나와 물을 마셨다면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참 만나(양식)를 먹고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마신다. 우리가 입은 은혜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크다(히 11:40, “더 좋은 것”). 우리보다 적은 은혜를 누린 그들 중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셔서 광야에서 멸망시키셨다면(5절), 그들보다 더 좋고 큰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하시겠는가? 

2. 그들은 어째서 멸망당했나?(5-11절)

그들 다수가 광야에서 멸망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왜 기뻐하지 않으셨는가? 그들이 모두 다 하나님 은혜를 수없이 경험하면서도 즐겨 악을 행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우리의 본보기로 삼기를 바랐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6절).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고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처벌하셨는지 7-10절까지 몇 가지 사례가 나온다(우상 숭배—음행, 시험, 원망). 반복되는 형식은 ‘그들이 이런 악을 범하여 이렇게 망했으니 우리는 그들과 같은 악을 행하지 말자’라는 식이다(3번).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11절) 악을 행하여 죽고 멸망한 일인데, 그 일은 반드시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목도장, 형판). 충분히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 각각의 사건을 기록하신 것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하신 것이다(11절). 이스라엘에 일어난 일은 반드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해야 한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희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라고 하셨다(롬 11:20-21).

세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먼저, 우상 숭배음행이다(7-8절).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번제를 드리고 먹고 마시고 뛰놀았다(출 32:6). 바울은 그 기록을 인용했다: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음행)’ 함과 같으니라”(7절). 이 일로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백성 모두를 진멸하려고 하셨지만, 모세의 중보로 그 뜻을 돌이키셨다. 하지만, 여호와의 편에 선 레위 자손의 손에 의해 삼천 명가량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죽임을 당했다(출 32장). 바울은 이 일을 교훈 삼아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명령했다(7절).

명백히 우상 숭배의 죄와 음행이 뒤섞인 사건도 있다(민 25장).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머물러 있을 때,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음식이 그 촉매제가 됐다. 모압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그 자리에 초청했다. 그러면 우상 신전에서 그들의 신에게 절하고 바쳐진 음식을 먹고 그러면서 이교도 풍습대로 몸을 섞으며 즐기게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사건은 고린도 성도 일부가 우상 신전에서 음식을 먹고 창녀와 몸을 섞는 일과 매우 유사하다(고전 6장, 8-10장).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셨다. 그래서 염병을 일으키셨고 그날 하루만 이만 사천(삼천) 명이 죽었다(민 25:9, 반올림). 바울은 이 일을 본보기로 삼아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라고 강력하게 권면했다(8절).

9절에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한 사건은 우리에게 익숙한 불뱀 사건이다(민 21장).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길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라고 투덜거렸다(민 21:5). 매일 공급받고 있는 은혜로운 양식을 하찮게 여겼다.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려고 광야에 두신 것이 아니냐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시험(불신)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많은 백성을 죽이셨다(민 21:6). 이들을 본보기로 삼아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라고 바울은 경고한다(9절).

마지막으로 10절에 기록된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한 사건은  민수기 16장에 기록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 사건이다. 이들은 레위 자손으로 회중 가운데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 모세를 거슬렀다. 하나님은 땅바닥을 갈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삼키게 하셨고, 불로 반역자 이백오십 명을 사르셨다. 다음날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여호와의 백성을 너희가 죽였다’며 분개히 여기자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염병을 일으켜 만 사천칠백 명을 죽이셨다(민 16:49). 아마도 천사를 통하여 멸망하게 하는 염병을 일으키신 것 같다(멸망시키는 자). 이것은 반드시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래서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라고 명령했다. 

1-4절까지 그들이 얼마나 은혜받았는가는 5-11절에 일어난 비극적인 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구름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로 건너는 기막힌 경험을 했으며 매일 신령한 것을 먹고 마시고 있고 모세에게 속하여 구원의 여정을 달음질하는 중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악을 즐겨 행할 때 심판을 피하게 해주는 면죄부가 되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악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그 죄의 결과를 그들이 당하게 하셨다. 이것은 자기 신앙과 믿음을 과신하며 여전히 죄를 즐기는 성도에게 무서운 본보기가 된다. 그들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당신이 악을 즐긴다면, 그것을 하나님이 참고 계셔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그래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3. 우리는 이로써 무얼배우나?(12-13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2절). 먼저 우리가 알 것은 우리 조상인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이 모두 다 종말론적인 멸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예: 모세). 하지만, 영원히 멸망당한 자도 배제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바울의 경고에서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은 구원을 잃거나 영원한 운명이 뒤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구원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진실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을 포함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가 넘어지는 것은 그의 (선 줄로 생각하는)과신, 악을 즐기면서도 자기 믿음과 신앙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교만이 결국 복음의 지혜와 능력을 잃어버린 삶, 미지근하고 나태한 삶,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주님께서 입에서 토해내고 싶어 하신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신앙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란 의미다. 성경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경고하고(살전 5:22),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경고한다(엡 5:3). 다시 말해,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하라’는 것이다. 달음질을 멈추지 말라. 싸우기를 그치지 말라. 선 줄로 생각하지 말고, 넘어질까 조심하기를 계속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위로를 주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13절). 여기서 시험은 유혹이 아니라 테스트다. 고린도 성도들 중에서는 우상이 가득한 도시에서 신전 문화가 지배적인 사회 가운데 살면서 거룩하게 사는 것이 무척 힘들다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핍박과 고난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능히 감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위로하신다. 먼저,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고, 시험 중에도 피할 길을 내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이 말을 주의 깊게 보라: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두신 모든 상황과 환경과 사람은 회피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통과하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앞서가신다. 우리를 안고 반드시 완주하게 하신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신 1:31-33).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끝까지 믿고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