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선한 양심을 가지라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16-17절
설교자 : 조정의
벧전 3:16-17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지난 번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고난 중에서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사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우리는 고난이 진정 선을 행함으로 온 것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고난은 죄로 인해 찾아옵니다. 베드로는 선을 열심히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겠냐고 물었습니다. 선을 행할 때 일반적으로 고난은 적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선이신 예수님을 세상이 핍박한 것처럼 선을 행했음에도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고난이 하나님의 뜻 안에 주어진 것이며 우리에게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이며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덕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베드로는 2장 19, 20절에서 부당한 고난을 참는 것은 아름답고 칭찬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온전한 축복으로 누리려면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않으며 오직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두려워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고난이 바로 기회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우리 안에 세상이 꺾을 수 없는 영원한 소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바로 선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소망에 대해 담대히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진실로 진실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선포하기 원하시며 그 대표적인 방법이 고난 가운데 우리의 순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당시 악했던 왕들과 까다로운 주인들, 하나님을 불신했던 배우자들에게 순종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서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본으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우리를 우리 영혼의 감독과 목자되신 이에게 돌려보내신 그분의 본을 따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부인하고 우리 십자가를 지고 이 예수님을 따를 것을 결심한 자들입니다. 이 부르심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이 부르심을 분명히 기억한다면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항상 주의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모든 환경 가운데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고민할 것입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그분만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겸손히 나를 낮추고 사람들을 온유하게 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15절). 그리고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오늘 본문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선한 양심을 갖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동물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괴로워하는 것을 본적이 있으십니까? 양심은 오직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 눈에 보이는 기관은 아니지만 분명히 인간에게 존재하는 부분입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양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양심에 털이 났다고 하지요. 그러나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양심을 가지고 있냐의 차이입니다.
보통 양심이라고 하면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감정적인 의식기관이라고 생각하지만(죄책감, 후회), 성경에서 “마음”(mind)은 우리가 말하는 감정이 아닌 “생각”에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그래서 양심을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판단 기준을 말합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성경에서는 여러 번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행 23:1),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행 24:16) 혹은 “양심이 증거가 되어 고발한다”(롬 2:15)라고 말합니다. 양심이 우리 삶의 기준점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십시오. 다음의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떤 것이 옳다고 판단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보고 싶은 영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케이블에 올라오지도 않았고 DVD로 출시되지도 않았습니다. 극장에서도 상영이 종료되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게시판에 풀HD영상파일로 누군가가 올려놓았습니다. 클릭 한번이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편하게 집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이렇게 합니다. 당신의 양심은 무엇을 말합니까?
늦은 밤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있습니다. 스포츠 기사를 보려고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니 기사 옆에 선정적인 광고와 사진이 너무 많습니다. 신경 쓰이고 계속 호기심에 눌러보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때 당신의 양심은 무엇을 말합니까?
회사에서 동료들이 직장 상사를 비판할 때, 혹은 교회에서 한 성도가 다른 성도를 비방할 때, 회사의 물품을 다들 내 것처럼 사용할 때 당신의 양심은 무엇을 말합니까?
병원에서 입원했는데 당신을 잘 아는 직원이 병원에 장기주차하는 주차료를 안낼 수 있도록 조치해주겠다고 합니다. 당신의 양심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말을 하고 결정을 하며 그에 따른 행동을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운전하는 운전대, 키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양심입니다.
베드로가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한 것을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면 “양심의 상태를 좋게 유지하라, 지켜내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은 건강한 양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건강한 양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러나 건강한 양심은 우리가 어떻게 지켜내는가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믿음에서 파선하였다”(딤전 1:19)고 말합니다. 또한 양심에 화인을 맞아 감각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경고합니다(딤전 4:2). 양심을 깨끗하게 혹은 선하게 다른 말로는 건강하게 지켜낼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저는 몇 달 전에 대장내시경을 처음 해보았습니다. 수면내시경이었지만 많이 긴장이 되었습니다.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관을 우리 몸에 집어넣는데 그것을 위해 전날 저녁에 금식하고 수십 알의 알약과 몇 리터의 물을 마셔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했습니다. 그래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장이 건강한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건강을 점검하고 어떻게 지켜내야 할 지 신중하게 검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장이 좋지 않은 사람은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건강식품을 먹거나 채소만 먹거나 운동을 합니다. 건강을 지켜내기 위해서입니다.
양심을 건강하게 지키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기준점을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양심은 건강하십니까?
먼저 건강한 양심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양심이 건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기능을 정상적으로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악한 것은 악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정상적 양심 혹은 건강하지 못한 양심은 악을 악이라 하지 않습니다. 행악하는 것을 옳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양심이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신체기관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정도를 만족할 때 우리는 정상이라고 말하고 건강하다고 말합니다. 혈압은 보통 120-80이라고 말하지요. 선과 악을 판단하는 양심이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을 살펴보면 로마서 1장 32절에 다음과 같이 건강하지 못한 양심을 가진 사람에 대해 묘사합니다.
“그들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32)
무엇이 기준입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입니다. 그것에서 멀어진 양심은 건강을 잃어버린 양심입니다. 반대로 좋은 양심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할까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르는 교훈”(딤전 1:11)을 전달하면서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자신이 전달한 하나님의 교훈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기준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선하다고 말하고 악하다고 말하는 것에 악하다고 말할 줄 아는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건강한 양심, 선한 양심입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다 괜찮다고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다 그렇게 한다고 하는 말에 흔들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것이 옳은 것이고 옳지 않다고 하신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건강한 양심이 말하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갈릴리의 한 산에 오르셔서 하신 말씀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너희 양심은 난 살인하지 않았으니까, 간음하지 않았으니까 선하다고 말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악한 것이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과 같이 악한 것이다. 하나님의 예리하고 분명한 선악의 기준으로 무뎌지고 무감각해진 그들의 양심을 일깨우셨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무뎌졌다면, 건강하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혹은 우리의 양심을 계속해서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지켜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항상 살아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 양심을 깨끗하게 지켜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교훈은 그 목적을 위해 주어졌습니다(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딤후 3:16).
반대로 어떻게 하면 우리 양심의 건강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요? 무뎌진, 화인 맞은 양심이 되어버릴까요? 진리를 거스르면 됩니다. 한번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으면 다시 귀를 막기가 쉬워집니다. 계속해서 진리가 아닌 다른 가치관들을 섭취하면 됩니다. 세상이 말하는 기준과 주위 사람들이 인정하는 판단 기준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럴수록 점점 더 무감각한 양심과 멀어진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열심히 선을 행하는 주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그 보혈을 흘리신 목적입니다. 선행의 대가로 때로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난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입니다. 비방했던 그들은 이 땅에서 혹은 하늘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보상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의 면류관을 돌려드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 놀라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분명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선과 악에 대한 예리하고 확실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건강한 양심을 지켜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십시오. 그분의 말씀으로 날마다 당신의 양심을 갈고 닦으시기 바랍니다. 무뎌진 부분을 예리하게 쪼개고 무감각해진 부분을 찔러서 일깨우기 위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충분하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애드가 군지 할아버지가 생각이 납니다. 그분은 한국에서 복음 영상을 보여주시기 위해 영사기를 사서 한국 공항을 통과하여 들어오셨습니다. 새로 산 영사기에 붙는 세금은 엄청났습니다. 세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배려해주기 위해 영사기를 돌려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으면 사용한 물건으로 처리하여 세금을 면제해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나중엔 박스라도 뜯어본 적이 있으면 세금을 면제해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끝까지 이 물건은 새물건이고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답답하게 느껴지십니까?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하게 느껴지십니까? 저는 할아버지의 선한 양심에 감동이 됩니다. 다른 사람은 다 눈감아주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옷자락을 자른 것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모든 일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고백을 하고 싶으십니까? 날마다 선한 양심을 건강하게 지켜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