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서로 사랑하라
본문 : 베드로전서 4장 8절
설교자 : 조정의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오늘 제가 전달할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단순 명료합니다. 바로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아마도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로 많이 들었던 내용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따르던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요 15:12)는 신약성경 안에서도 여러 번 메아리처럼 울려 퍼집니다(롬 12:10; 13:8; 갈 5:13; 엡 4:2; 살전 3:12; 5:13; 살후 1:3; 히 10:24; 벧전 1:22; 요일 3:11).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 정확하게 말하면 이 계명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십계명 가운데 후반의 여섯 가지 계명이 규정했던 것으로 예수님은 그것을 요약하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27). 어떻게 보면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계속 들어오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신기하게도 그 사랑과 죄를 연결 짓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나서 “왜냐하면”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의 성경에는 “~할지니”로 약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원어성경에는 분명히 “왜냐하면”이 들어있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단순히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막연한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들었던 “사랑하라”는 말씀 가운데 아주 특별한 말씀이 될 것이며 사랑의 본질을 다루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잘 들어보십시오.
죄는 갑자기 뜬금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루고 있는 본문의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4장의 처음부터 죄에 대해 언급합니다. 1-6절까지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무장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 마음”이 무엇입니까? 죄와 치열하게 싸워 승리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바로 이어서 7절부터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죄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말세의 끝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더 죄악에 물들어 갑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돈을, 쾌락을 사랑합니다. 세상의 악한 풍조가 더욱 강력해집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고한 말세는 죄로 인해 고통 받는 때입니다(딤후 3).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나의 죄성과 싸워 이기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과 영적 무감각 사이의 관계는 다음 구절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그 복음의 아름다움과 능력과 광활함이 그렇게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내 마음에서 멀어져 있게 하는가? 왜 나의 생각과 감정은 종종 이런 영광스러운 것보다 ‘내 차는 깨끗한가?’ 혹은 ‘지금 당장 TV에는 무슨 프로가 방영되고 있지?’ 아니면 ‘오늘 먹은 점심이 괜찮았는가?’와 같은 유치한 것에 지배를 받을까? 왜 나는 영원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마치 눈 가리개를 쓰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주 내 인생을 구상하고 그것에 대해서만 골몰하는 것인가? 왜 이 복음은 언제나 그리고 철저하게 내 아내와 자녀들, 직장 동료들, 친구들 그리고 교인들과의 관계 속으로 확산되지 않는가? … 나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죄인이기 때문이고 세속성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내 마음속에 머물며 나를 공격할 것이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까지 나는 그것과 대적하여 싸우고 싶다. 나는 영적 게으름-이 세상이 지속적으로 나를 빠뜨리게 하려고 위협하는 마취된 것과 같은 무감각 상태-과 싸우고 싶다. 또한 나는 이 복음을 힘 있게 수용하고 그것이 나의 행동, 애정, 감정, 욕구, 생각 그리고 의지 이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게 하고 싶다.'(복음이란 무엇인가, 그렉 길버트, 174p)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오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로 이러한 죄의 문제가 다시 대두됩니다. 명령어 “서로 사랑하라”만 봐도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베드로는 이렇게 명령하였습니다. “사랑을 변치 않게 지켜내라”
베드로는 이전에(1:22), 성도는 거듭 났을 때,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데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거듭났다는 것 하나 만으로 형제 사랑이 넘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서로를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어도 성도들 사이에서 그런 사랑이 넘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거듭난 순간, 그 영광스러운 순간에 형제 자매를 향한 거짓 없는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도 말합니다. “또한 낳으신 이(하나님)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성도)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하나님께서 그러한 순결한 사랑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변질됩니다. 왜 그 순결한 사랑이 변하게 됩니까? 왜 그것을 지켜내기가 힘듭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를 보면 우리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받은 좋은 교회였는데 사랑이 없어서 겪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쟁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베드로)파, 그리고 심지어 그리스도파도 있었습니다. 서로 싸우던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너희도 서로 이렇게 섬기라고 하신 주님이 자기 이름을 딴 파를 만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바울은 로마서 1장 29절에서 분쟁은 죄라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분쟁이라는 죄가 그들의 사랑을 변질시켰습니다.
그들은 또한 자랑하고 교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교만해져서 자신만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판단했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께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잘난 것처럼 서로를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 것,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과 자랑의 죄가 그들의 순전한 사랑을 변질시켰습니다. 유평교회가 칭찬받는 이유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배경이나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배움의 깊이가 다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을 가지고 교만해지고 서로를 판단한다면 형제 사랑은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죄가 그렇게 사랑을 갉아먹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또한 교회 내에 존재하는 죄들을 모른 척 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다룰 생각을 안 했습니다. 불의를 그냥 놔둔 것입니다. 제사장 엘리는 자녀들을 사랑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함부로 손대고 예배를 멸시했는데도 그냥 놔두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녀의 죄를 다루는 것이 귀찮고 힘들고 가슴 아프기 때문에 그냥 방치한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엘리와 그 가족들의 죽음을 가져오게 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불의를 방치하였습니다. 그 죄는 그들의 형제사랑을 변질시켰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온유하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눈에 드러나는 불의에 대해 다루지 않았고, 오히려 참고 인내해야 하는 것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법정까지 성도를 끌고 가서 믿지 않는 자들의 손에 의해 재판을 당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 가운데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분노와 무정함과 오래 참지 못하는 죄는 그들의 사랑을 변질시켰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서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아닌가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다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세상에 우상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음식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러나 형제가 그것으로 인해 실족한다면 평생 먹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견해의 차가 형제 사랑에 장애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받지 못했습니다. 서로의 진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서로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받지 못하는 죄는 그들의 사랑을 변질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 교회는 무례하고 자기 유익만 구했습니다. 당시 성찬예배는 식사와 함께 진행되었는데, 먼저 와서 많이 먹은 사람은 배가 부르고, 나중에 온 사람은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배려도 없고 예의도 없었습니다. 자기 유익이 먼저였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가관이었습니다. 당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은사가 뛰어나다고 말합니다. 기도와 설교, 찬양을 잘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사로 남을 섬길까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은사를 뽐내느라 바빴습니다.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는 엉망진창의 예배였습니다. 혼란과 무질서가 그들이 드리는 예배의 특징이었습니다. 훌륭한 은사를 가진 자는 많았지만 그들은 사랑이 없었습니다. 자기 유익만 높이고 배려가 없는 죄는 그들의 사랑을 변질시켰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가 가진 죄의 문제들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러한 죄가 그들이 구원받을 때 가졌던 순수한 형제 사랑을 변질시켰습니다. “저는 형제, 자매에게 실망해서 그들을 사랑하는데 조금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사도 요한이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할까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오래 참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며, 시기하며, 자랑하고 교만하고, 나의 유익을 앞세우고, 성내고, 시기하고, 무례하고, 불의를 기뻐하고, 진리와 멀어지며, 참지 않고, 믿지 않고, 견디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거짓 없는 형제사랑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래서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변치 않게 지켜내라!”
“무엇보다도”라는 말은 이 계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줍니다. 가장 최우선 순위에 있어야 한다, 가장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7절에 나오는 ‘기도’보다, 9-11절에 나오는 ‘섬김’보다 가치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선순위에 있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이 없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섬김은 무엇입니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여러 가지 은사를 나열하고 훌륭한 은사로 서로 섬기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에 대해 13장에서 다룹니다. 13장, ‘사랑장’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가 결론입니다.
베드로도 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계명은 “사랑하라”입니다. 그 어떤 명령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명령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변질시키는 것은 바로 죄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왜 “사랑하라”는 명령 뒤에 이런 이유를 말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최초에 우리에게 주신 순결하고 순전한 형제사랑을 지켜내는 것을 말합니다. ‘덮는다’는 표현은 자칫 잘못하면 교회 내에 있는 죄들을 ‘그냥 눈감아주는 것,’ ‘모르는 척 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불의와 죄가 드러났을 때 조용히 넘어가야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그것이 아닙니다. 죄를 없는 셈 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공동체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막아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죄가 전혀 없는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판단거리가 없고, 분노가 전혀 없으며, 의견의 차이로 다투거나, 분쟁이 전혀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이러한 죄는 교회를 파괴시키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위대하고 훌륭한 교회들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역사가 증명합니다. 그것은 대단한 죄들도 아니었습니다. 아주 작은 죄들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때론 한 두 사람의 다툼이, 때론 몇 사람의 비방이, 때론 한 사람의 죄가 교회를 무너뜨렸습니다. 교회를 찢어놓고 산산조각을 냈습니다. 죄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갖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릴 만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이깁니다. 사랑이 죄의 파괴력을 이겨냅니다. 교회 내에 죄가 발생하더라도 사랑은 그 죄를 이겨내고 공동체를 더욱더 굳건하게 만들어줍니다. 야고보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 5:19-20). 이 말씀을 오늘 말씀에 맞추어 새롭게 바라봅시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 진리를 떠나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죄에서 돌아서도록,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수고하고 헌신합니다. 기도하고 진리를 전하며 자신의 집에 초대하며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돌이키게 하는 데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런 헌신과 형제를 향한 사랑이 그를 생명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고하는 자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누가 진리를 떠나 미혹된 자를 찾아 돌아서게 하려고 노력합니까? 그 눈물과 헌신, 수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입니다. 바울이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행 20:31) 사랑입니다. 성도가 범죄했을 때, 그를 찾아가 온유하게 진리로 그를 회개하게 해야 하는 엄청난 수고를 왜 형제가 감당합니까? 불편하고 힘든 그 일을 우리가 눈물과 헌신으로 해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갈 6:1-2) 형제를 향한 거짓 없는 사랑입니다.
죄는 믿지 않는 자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믿는 자들은 죄의 유혹으로 이끌어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사랑은 죄를 이깁니다. 소아시아 교회는 당시 많은 핍박을 겪고 있었습니다. 외부에서 내부에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한국 교회 역사상 이렇게까지 교회가 외부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적은 없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죄의 유혹 때문입니다. 죄가 교회 안팎에 많은 세상입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무너지고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말에 기울여야 합니다. 사랑은 죄를 이겨낼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사랑을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미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게 된 자들로, 처음 받은 그 사랑을 지켜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여기 이 말에 우리가 형제사랑을 변치 않게 지켜낼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처음에 우리가 어떻게 이 사랑을 갖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여 거듭났을 때, 거짓없이 형제를 사랑하는데 이르렀습니다(벧전 1:22). 우리가 처음에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처음 깨닫고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지 기억했을 때 형제 사랑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주 안의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차올랐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1-12). 주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주가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주를 위해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주의 사랑으로 가득 찼습니다.
죄로 인해 날마다 주를 떠나고 마음에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보다는 허무하고 보잘 것 없는 썩어질 것에 사로잡혀 살던 나를 주님은 먼저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나를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셨습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분께서 나에게 와서 사랑을 베풀어 주실까요?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아닐진데 나 같은 사람의 머리카락 하나도 세시고 먹을 것 입을 것을 생각하실까? 그분은 나의 죄를 못 본 체 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다루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창조주시오 나는 피조물인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허리를 숙이셔서 내게 겸손히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향하여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런 사랑을 베풀어주셨고, 지금도 매일의 일상 가운데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그 사랑의 기쁨이 우리 안에 차오를수록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가치를 잃어갑니다. 다른 것들로 그 자리를 채워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회복하고, 형제 자매를 위한 거짓 없는 사랑을 지켜내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1-4).
유평교회의 목표는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교회를 세우겠다 하셨고 친히 그 터가 되셨습니다. 주님께서 최초의 교회에 남기신 명령은 하나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에 형제 자매를 향한 사랑이 지켜지지 않고 변질된다면 절대 성경적인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짓 없는 사랑이 지켜질 수 있도록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 교만한 마음,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없는지 스스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복음의 가치를 깨닫고 형제를 향한 거짓 없는 사랑을 지켜 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