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명을 잃은 교회는 들을지어다
본문 :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설교자 : 이 병 권
말씀의 제목을 보고 ‘교회가 어떻게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나’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은 영원하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기에 생명을 잃은 교회라고 하면 그 말자체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다 같은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 건물을 가지고 교회 간판을 달고 있지만 교회라고 말하기 어려운 교회도 있습니다. 차라리 문을 닫았으면 하는 무늬만 교회인 곳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모양을 갖추고 있지만 하는 일을 보면 교회라고 말할 수 없는 가짜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사이비 교회나 이단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대로 행하지 않고 진리에서 떠난다면 그래서 교회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이름에 합당한 삶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생명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죽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생명을 잃은 교회, 죽은 교회였습니다. 존 맥아더는 사데 교회를 박제 동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비유합니다. 박제로 만든 여러 동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 동물원과 같을까요? 박제되어 죽어있는 동물은 살아있는 동물과 겉모습은 비슷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지켜보면 그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커지고 더 분명해집니다. 생명이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를 만듭니다.
생명을 잃은 사데 교회는 돌이키지 않으면 하늘과 땅 차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아직 기회가 있기에 아직 돌이킬 수 있기에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또한 주님의 이 엄중한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사데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는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말씀으로 우리를 일깨워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계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 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사데 교회에 하시는 말씀도 서머나 교회처럼 분량이 적은편입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가 분량이 적은 이유는 서머나 교회와는 정반대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책망 없이 칭찬을 받았는데 사데 교회는 칭찬 없이 책망을 받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머나 교회가 심한 고난으로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부요했고 생명으로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반면에 사데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생명력 있고 괜찮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생명이 없는 죽은 교회였던 것입니다. 사데 교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간단하게 이 한 마디로 요약됩니다. ‘너는 죽은 자로다’
오늘날 교회 중에는 서머나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교회가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사데라고 이름 붙이는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이름을 사용할 때 사용하지 않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사데라는 이름이 그러합니다.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남동쪽으로 약5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는데 주전 1,200년 정도에 세워졌고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특별히 사데는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였는데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남쪽으로만 접근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난공불락의 성으로 이름을 떨쳤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또한 사데 가까이 있는 팍톨루스 강에는 많은 사금을 캘 수 있었는데 그렇게 생산한 금으로 사데는 많은 부를 누렸습니다. 최초로 금화가 개발된 곳으로 전해지며 금화를 보급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고고학자가 폐허가 된 사데의 터에서 금을 제련하는 수백 개의 도가니를 발굴하기도 했습니다.
사데가 언덕 위에 있는 도시라는 사실은 군사적으로 큰 이점이 있었지만 도시가 성장할 공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언덕 아래에 새로운 도시가 생겼고 사데는 점점 그 명성을 잃어가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한때 이름을 떨쳤지만 과거의 일이 되었고 지난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데 교회도 이러한 도시의 모습을 닮아있습니다. 사데 교회도 도시처럼 쇠퇴의 길로 점점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일에 사데 교회를 방문한다면 이런 문제를 볼 수 있을까요? 사데 교회가 드리는 예배를 온라인으로 참여한다면 어떨까요? 유튜브로 교회가 모여서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그 모습을 본 우리가 사데 교회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1절에 이름은 사람들의 평가, 평판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데 교회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사데 교회를 보고 좋게 평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은 다르게 평가하십니다. 주님이 사데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 3:1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세상은 너를 살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너를 죽었다고 말한다.’
사데 교회로 노래를 만든다면 가사가 이러합니다. 주님이 주목하기보다 세상이 주목하는 교회, 중심이 주를 향하기보다 화려한 겉모습을 추구하는 교회, 서로가 서로를 깊이 알기보다 세상이 알아주길 바라는 교회, 생명을 잃은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의 중심을 보시고 그들의 행위를 아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를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사데 교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지, 얼마나 풍성한 물질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가지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삶을 아시고 그들의 삶으로 평가하십니다. “네 행위를 아노니”
그러면 사데 교회의 행위가 어떠했기에,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러한 책망을 받은 걸까요? 무엇이 생명을 잃은 교회가 되게 했을까요? 사데 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2절과 4절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계 3:2 …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여기 말씀에서 ‘온전하다’는 말은 가득 채워진 것을 의미입니다. 반대로 온전하지 못한 것은 비어있는 부족한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사데 교회는 채워지지 못한 상태로 텅 비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빈 잔과 같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교회에 사람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는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예배와 섬김과 찬양과 기도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떡을 떼며 교제하고 교회로서 수고를 합니다. 그 행위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비어있었습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부실합니다. 이름은 그럴듯했지만 실속은 없습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형식은 있지만 상한 마음은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갈급함이 없습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하고 높이지만 마음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와는 달리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을 두려워하고 피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닮아있습니다. 버가모 교회처럼, 두아디라 교회처럼, 세속에 빠진 모습으로, 죄에 관대한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4절에 그러한 사데 교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데 교회의 온전하지 않은 행위가 이렇게 표현됩니다.
계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명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데 교회의 대부분이 그 옷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를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성적인 방탕함에 빠집니다. 고난을 피하기 위해 세상의 유혹에 넘어갔고 세상을 따릅니다. 사데 교회의 대부분이 세상을 따르며 거룩함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결국 죽은 교회가 된 것입니다. 세상을 따르며 세상과 함께 하면 고난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옷이 더러워지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진흙탕에 들어가 뒹굴면서 옷이 깨끗하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잃은 교회, 하나님 앞에서 그 행위가 온전하지 못한 교회, 세상과 함께 함으로 그 옷이 더렵혀진 교회, 사데 교회의 실상입니다.
혹시 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면, 더 악화되기 전에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돌이켜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을 잃은 교회가 회복할 수 있도록 처방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처방대로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치료하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회복을 위한 처방은 다섯 개의 명령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다섯 개의 명령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명령“깨어라”입니다. 가장 먼저 이 명령이 나옵니다.
계 3:2 너는 일깨어 …
우리 성경에 “일깨어”라고 되어 있는데, 깨어라는 명령입니다. 그만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한파가 계속되는 추운 겨울에 바깥에서 잠들면 얼어 죽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고 잠들지 않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추운 겨울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그러합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잠들지 않도록 계속해서 수고해야 합니다. 잠들어 버리면 생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할 일은 깨어있는 것입니다. 눈을 떠야 합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교회는 세속이라는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되고 죄가 주는 달콤한 꿈에 취해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상태로 계속 방치한다면 살아있는 건지, 죽은 건지 알 수 없는 식물인간처럼 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깨어라는 명령을 그냥 가볍게 흘려보내지 마십시오. 깨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둘째 명령“굳건하게 하라”입니다.
계 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
굳건하게 하라는 말은 넘어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세우는 것을 말하는데 본문에서 무엇을 그렇게 해야 하는지 조금 헷갈릴 수 있습니다. 쉽게 이해하면, 죽음에 이르지 않고 남아 있는 것, 아직 생명이 남아 있는 것을 굳건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시기를 놓치면 남아있던 생명마저도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회복을 위해서는 그 생명을 강하게 붙잡아 세워야 합니다. 넘어가지 않도록,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고정시켜야 합니다. 유혹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고난이 와서 부딪혀도 쓰러지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굳건하게 그 자리에 서서 세상과 맞서는 것입니다.
셋째 명령“회개하라”입니다.
계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
회개와 연결된 세 개의 명령입니다. ‘생각하라 지키라 회개하라’, 이름하여 ‘회개 3세트’
1세트 생각하라,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억하라는 명령입니다. 말씀에 “어떻게”라고 되어 있어서 어떻게 받았는지, 어떻게 들었는지 그들의 태도를 기억하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법적인 이유로 ‘어떻게’보다 ‘무엇을’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how’보다 ‘what’이 더 좋은 번역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을 받았으며 무엇을 들었는지 기억하라’
사데 교회는 그들이 받음으로, 그들이 들음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진리의 말씀, 사도들이 전한 그 진리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2세트 지키라,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하라는 명령입니다. 너희가 받았고 들었던 진리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 진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지키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거할 수 있도록 굳게 붙들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빼앗으려는 악한 세력들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공격에 넘어가지 말고 계속해서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전해질 때,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 지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쉽게 빼앗깁니다. 그 결과는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정말 귀한 것을 악에게 빼앗기지 마십시오.
3세트 회개하라, 진리로 자신을 살피고 돌이키라는 명령입니다. 생명을 잃은 교회가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생명을 지킬 수도 없고 회복할 수도 없습니다.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회복을 위한 처방, 다시 정리하면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세 가지 명령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서 생명에 유익한 것은 굳건하게 하고 생명에 해가 되는 것, 죄로부터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처방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계 3:3 …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사데 교회에게는 좀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사데가 역사적으로 함락된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두 번 모두 파수꾼이 성벽을 제대로 경비하지 않아서 일어났습니다. 밤중에 몰래 절벽을 타고 들어온 적을 발견하지 못해서 패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데 교회가 깨어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잠자고 있고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세상으로 만족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도둑같이 그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엄중한 경고입니다.
이 경고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도 깨어 있어야하고 우리도 굳건해야하며 우리도 회개해야합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나에게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생명으로 살아있음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생명이 없는 자처럼 자고 있다면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내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생각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묘사됩니다.
계 3:1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인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성령님과 교회의 인도자들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교회에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과 교회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들을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따라서 교회를 살리는 능력은 오직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권자 되심을 기억하고 주님이 생명을 주관하고 계심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매달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생명으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렇게 사는 것이 어렵다고 힘들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타협하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생명이 없는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있기에 더 갈등이 되고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 생명을 잃은 교회, 죽었다는 평가를 받은 사데 교회에도 소수의 남은 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데 교회의 대다수가 주님이 아니라 세상을 따르고 있었지만,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며 충성했던 소수의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충성된 자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자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깨어서 세상을 따르지 않고 주님을 위해 헌신합니다. 주님이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생명을 주셨기에 그 생명의 가치를 알고 생명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적은 숫자라 하더라도 주님께는 숫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수라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소수를 택하십니다. 소수를 통해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소수가 될 수 있습니다. 주위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으로 도전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주님께서 세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흰 옷과 생명책, 그리고 시인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세트와 같습니다. 이기는 자는 영원한 의로움 상징하는 흰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또한 생명책의 이름이 상징하는 영원한 안전을 보장받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받게 될 상입니다.
여러분은 그날에 주님이 주시는 상이 기대가 되십니까? 주님이 주신다니까 그러려니 하는데 특별한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자일수록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할수록 더 가난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영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은 더 부요하게 되고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됩니다.
경고의 말씀이 전해졌을 때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은 말씀의 가치를 알기에 귀하게 여기고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더 풍요로움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이 말씀으로 경고를 받아야 하는 사람, 일깨움이 필요하고 회개가 필요한 사람은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건성으로 듣습니다.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집중해서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가치를 모르고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찔림을 받아 주님께 용서를 구하며 돌이켰던 경험, 말씀으로 도전을 받아 열정으로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던 경험, 말씀으로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기도했던 경험, 그렇게 말씀으로 변화되어가는 나를 경험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더 가난하게 될 뿐입니다. 어쩌면 영적으로 죽어있기에, 생명이 없기에 나타나는 증상일지도 모릅니다. 있는 자는 더욱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가 어떤 상태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적으로 부요한 자입니까? 아니면 영적으로 가난한 자입니까? 영적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생명을 잃은 자처럼, 그렇게 영적으로 잠자고 계십니까?
사데 교회와 같은 모습이 우리 교회에는 없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사데 교회처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텅 비어있는 부족한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만족에 빠져 그 옷을 더럽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평가라는 거짓 안전에 속아서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흐려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생명을 더욱 힘 있게 드러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생명으로 회복되어 할 부분이 있다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회복이 필요한 곳에는 회개도 필요합니다. 회복을 원한다면 정말 마음을 찢으며 죄를 버리고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그냥 대충 얼버무리면서 넘어가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복은 회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간절히 구하며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사데 교회가 이 편지를 받았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생각하면서 주님이 우리 교회에 편지를 보내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생각해봅니다. 어떤 칭찬을 하실까요? 어떤 책망을 하실까요?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만약 사데 교회처럼, 생명을 잃은 교회라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주님이 주신 처방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깨어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생명을 잃은 교회가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굳건하게 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생명을 잃은 교회가 아니라 생명을 전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생명을 잃은 교회가 아니라 생명을 누리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주신 생명을 충만하게 드러내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