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명을 소중히 하라

본문 : 출애굽기 20장 13절

설교자 : 최종혁

 

어쩌면 ‘살인’은 우리와는 가장 멀리 있는 죄일 것이다. 아마 설교 시간에 ‘살인’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잘 없을 것이다. 살인은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나 보편적인 죄로 여겨진다. 지금도 강력 범죄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살인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당연히 살인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하지 않는다. 다른 죄 때문에 감옥에 갔다온 사람들은 주변에 한 둘 쯤 있을 수 있지만, 살인한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 것이다. 그만큼 살인은 중범죄고 그래서 흔하지는 않다. 당연히 ‘일반 서민’인 우리들에게 있어 살인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접할 수 있는 범죄일 뿐이다.

 

그러니 당연히 “살인하지 말라”는 제 6계명 앞에서는 우리가 조금은 당당할 수 있다. 다른 성경의 명령들에 대해서는 항상 작아지고 ‘제가 죄인입니다’와 같은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을 때가 많은데, 살인에 대해서 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 이야기하려 하고,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이 말씀에 더 순종할 수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 보길 원한다.

 

‘살인’이 딴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명령의 의미를 통해 살펴보고, 그럼 어떻게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지를 명령의 적용을 통해 살펴보자.

 

명령의 의미

명령의 의미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명을 소중히 하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사람의 생명’이고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해당된다.

 

십계명은 그 이름 때문에 단순히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말라는 명령의 목록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살펴본 다른 계명들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지 않다. 십계명은 단순히 ‘행동’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가치관’에 대한 말씀이고 그에 따른 삶에 대한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계명의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때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를 하나님은 10개의 말씀을 통해 가르쳐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이 이웃을 존중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살인하지 말라”는 간단하고 분명한 명령이다. 히브리어에는 ‘죽이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많이 있는데, 그 중 여기 사용된 단어는 언제나 ‘살인’의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 명령은 기장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살인을 금한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이 모두 살인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심지어 죽여야할 때도 있다. 적법한 살인, 필요한 살인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살인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살인’이라는 말에 이미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상하게 들리는 표현이지만, ‘살인’이라는 말을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라는 가치 중립적인 의미의 단어로 보면 그렇다.

 

사실 그런 것으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선택적으로 지킨다고 공격하는 것이다. 예로 낙태에 대해서는 살인이라고 하면서 사형 제도는 왜 지지하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렇게 한다. 몇가지 율법의 예를 통해 이 명령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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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에 해당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기본적으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은 살인이다. 대부분 살인은 악의를 가지고 자기 이익을 얻기 위해 불법적으로 자행된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 폭력이 동반된다. 가인이 아벨에게 행한 것이 살인이다.

 

그런데 살인한 자를 죽이는 것, 즉 사형은 살인이 아니다.

출 21:12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살인한 자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었고, 이것은 살인에 해당되지 않는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사형을 집행한 사람을 또 사형해야하는 모순에 빠진다. 이것은 단지 율법시대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정부의 역할에 대해 말하면서,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공의를 행한다고 말했다. 그때 바울이 사용했던 표현은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였다. 칼이 반드시 사형 집행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형도 공의를 행하는 일에 포함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예수님도 빌라도가 사형을 집행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셨었다(요 19:11).

 

다음으로, 고의성이 전혀 없는 사고로 인한 죽음의 경우, 살인이 아니다.

출 21:13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내가 그를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사람을 죽였다 해도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닌 경우는 후에 ‘도피성’이라 불리는 곳으로 가서 제사장의 보호 아래 살아갈 수 있었다. 고의성 없이 사람을 죽게 한 경우는 살인에 해당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을 죽게한 것에 대한 결과를 감당하기는 해야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살인으로 보시지는 않는다. 21장 28절도 이런 차이를 언급한다.

출 21:28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일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인 경우, 소는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 값을 치르게 되지만 그 주인까지 추가로 형벌을 받지는 않는다. 이 역시 사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9절을 보면 주인도 형벌을 받는 경우가 있다.

출 21:29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말미암아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동일하게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인 경우이지만, 이 경우는 주인도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책임을 져서 사형을 당해야 한다. 즉, 살인을 한 것으로 인정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가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을 주인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단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치면 미필적고의나 부작위로 인해 사람을 죽인 경우다. 어떤 결과가 발생할 수 있음을 알면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거나 혹은 일부러 그렇게 한 경우다.

 

이 경우 소의 주인은 살인을 해야겠다는 직접적인 동기가 없다. 하지만 반대로 이웃을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의지도 없다. 하나님은 그것을 살인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중요한 부분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는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 뿐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보호해야한다는 의미도 있음을 이 경우가 이야기해 준다.

 

신명기에도 비슷한 취지의 계명이 있다.

신 22:8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지붕에 난간을 만들라고 하신 것도 바로 제 6계명의 연장선에 있는 계명인 것이다. 이웃을 안전하게 보호할 책임이 있다.

 

다음으로 출애굽기 22장 2-3절에도 살인과 살인이 아닌 것이 구분되어 있다.

출 22:2-3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3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이 말씀은 밤에는 도둑을 죽이면 괜찮지만 낮에는 죽이면 안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말씀은 정당방위에 대한 말씀이다. 요즘은 밤도 낮처럼 잘 볼 수 있지만, 과거는 그렇지 않았다. 밤에 집안은 칠흙같이 어두워 아무 것도 분간할 수가 없다. 그때 누군가 침입한 것을 인식하고 가족을 보호하기위해 싸우다가 그 사람을 죽인 경우는 정당방위가 성립한다는 말씀이다. 낮에는 충분히 상황을 분간할 수 있고,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막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는 살인죄가 성립한다. 정당방위는 살인이 아니지만, 그것을 핑계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다.

 

이것을 조금 더 확장해 보면 가정이 아니라 국가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벌어지는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살인에 해당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누가 선이고 악인지가 불분명한 경우도 있고, 전쟁의 명분이 잘못된 경우도 많고, 또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용한 사람들도 많다. 그런 것들을 이야기 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 중에 적군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님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실제로 구약에는 많은 전쟁이 기록되어 있고, 그 전쟁으로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을 내리기도 하셨고 백성을 보호하기도 하셨다. 신약에서 세례 요한을 찾아 왔던 군인들에게 요한은 회개를 말하면서 당장 사람을 죽이는 군인 집단에서 나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도 백부장 같은 사람들에게 군인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앞서 사형 제도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 아래서 시행되어야 하고 또 시행하는 사람이 있어야 했던 것처럼, 군인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살인이라고 하신 것과 살인이 아니라고 하신 것들의 예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 기준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왜 똑같이 사람을 죽이는 것 같은데, 어떤 것은 허용이 되고 어떤 것은 허용이 되지 않는가? 조금 죽이는 것과 많이 죽이는 것의 차이인가? 개인이 죽이느냐, 집단이 죽이는냐의 차이인가? 아니면, 누가 죽이고 누가 죽느냐의 차이인가? 그렇지 않다. 이런 것들은 세상에서는 기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하셨다. 하지만, 사람을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는,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때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보호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명을 취해야할 때, 그것은 정당한 것이며 하나님은 그것을 살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있지만, 훨씬 적극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보호해야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유

그럼, 왜 사람의 생명은 이렇게 특별하게 보호를 해야할까? 사람의 생명이 다른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을까?

 

사실 하나님은 이 율법의 계명을 주시기 훨씬 오래전에 이미 같은 말씀을 하셨었다. 창세기 9장에서, 홍수에서 구원을 받은 노아와 노아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셨던 말씀처럼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이제는 전과 다르게 ‘모든 산 동물’을 채소 같이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해도 여전히 그 생명을 존중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고기는 피째 먹지 말 것을 명하셨고, 거기에 더하여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다름을 분명히 하시면서 그 이유도 말씀해주셨다.

창 9:5-6 5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출애굽기 말씀처럼 사람을 죽이면 그것이 짐승이든 사람이든 하나님은 그 생명의 피를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동물을 죽이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사람을 죽여서는 안됐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가 있지 않다. 물론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 실제적으로 사람이 생존하고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 만약에 실용성이나 효율성이 이유라면, 어떤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인간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특별히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그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은 더욱 특별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해야한다. 마치 우리가 어떤 사람을 존중하면 그 사람과 관련된 물건도 존중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진은 종이에 잉크나 토너가 묻은 것에 불과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을 나타낼 때 우리는 그 사진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비슷하게 하나님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그렇게 귀하게 보시는 것이다. 사진이 우리를 나타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십계명의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그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존중한다면 마땅히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존중해야 하고,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그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이렇게 존중을 받아야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아야할 이유, 사람의 생명이 소중한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을까? 모든 사람이다. 사람의 성별, 나이, 피부색, 민족 등에 관계 없다. 사람의 육체적 능력, 지적인 능력도 관계 없다. 장애의 유뮤도 관계 없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지만, 사람이라면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우리 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보시기 심히 좋아하셨던 그 창조의 때, 모든 인간의 생명은 존중 받아 마땅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다른 어떤 존재, 심지어 우리도 아닌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생명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생명을 주관하시며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사형을 명하신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함이다. 정당방위가 가능한 것도 마찬가지고 전쟁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정당방위를 넘어서 사람을 해하는 행위, 다른 사람을 보호할 책임을 다하지 않는 행위는 오히려 살인 행위로서 하나님은 금지하셨다. 생명의 근원이시며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주신 명령이고, 특별히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써 확언해주신 것이다. 다른 모든 죄도 마찬가지지만, 살인은 그런 생과 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로서 죄가 되는 것이다.

 

정리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계명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하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계명은 그 생명을 해하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생명을 보호하는 것으로, 더 나아가 그 생명을 참되게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돌아가 보자. 이 비유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사람은 누구일까? 당연히 강도들이다. 사람을 완전히 죽이지는 않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도들만 제 6계명을 어긴 것은 아니다. 이 사람을 발견했던 제사장과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이 계명을 어겼다.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어떤 이유 때문이었든지 피하여 그냥 지나갔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그 생명을 보호하지 않았고 그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만이 그 생명을 소중히 여겨 불쌍히 여겼고, 그래서 바로 가까이 가서 치료를 해주어서 그 생명을 보호했고, 주막에 데려가서 끝까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줌으로써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자비를 베풀었던 이 사람이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이다.

 

그럼, 이제 오늘날 우리에게로 와서 이 말씀을 적용해보자.

 

명령의 적용

신기하게도 인권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지금도 여전히 생명을 소중히 하라는 이 명령이 적용될 곳은 너무나 많다. 몇가지 이슈들을 3가지로 나눠서 생각해 보자.

 

생명을 해하지 말고 생명의 주인을 기억하라

우리가 ‘내 것’이라고 최후까지 주장할 것이 아마 ‘내 생명’일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성경은 우리의 생명조차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해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생명에 대해서 명령하실 수 있고,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동안 그 생명을 소중히 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자살은 살인하는 죄다. 자살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 무조건 지옥에 가는 죄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경의 지지를 받지는 못한다. 자살이 예수님께서 단번에 영원히 이루신 구원을 무효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살이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대한 죄임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살을 반대해야 한다.

 

사실 사회적으로도 자살을 권장하지는 않는다. 자살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미디어를 통해 자살이 미화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라도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은 옳지 않고 우리는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존엄사’나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자살이 권유되기도 한다. 좀 더 적극적으로 ‘조력 자살’이라는 것이 인정되는 나라도 있다. 스스로 생명을 끊을 수 있도록 의사가 처방을 해주는 것이다. 치료를 중단하는 것과 생명을 중단시키는 것의 구분이 어려운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온갖 치료를 다하여 몇 일 혹은 몇 달을 생명만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실제로는 생명을 구하는 길이 아닐 수 있다. 그저 죽음을 조금 더 연기할 뿐인 경우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생명을 우리가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주권을 빼앗는 죄다. 실제로 치료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고려해야할 것들이 많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흥미롭게도 이런 식의 죽음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인간다움’을 주장한다. 나이가 들어서, 병에 걸려서 더 이상, 장애가 있어서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없을 때 그들은 ‘생명’의 의미도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인간의 가치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에 있지, 우리가 그것을 만들어내고 지키고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다움’을 주장하는 자들은 같은 논리로 낙태도 옳다고 주장한다. 어머니 뱃속의 태아는 스스로를 인지할 수도 없고 스스로 결정할 수도 없기에 생명이 있는 ‘인간’일 수는 있지만 인간다운 ‘인격’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태아는 스스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죽더라도 무언가를 빼앗기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산후 낙태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우리가 인간과 인격을 구분할 수 있을까? 어느 순간에 인간이 인격이 되는지 말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 인간다워야 인간이라고 우리가 정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마다 인간다움은 다양하게 드러난다. 일률적인 기준으로 가치있는 생명과 그렇지 않은 생명을 나눌 수 없다. 태아가 되었든, 노인이 되었든, 장애인이 되었든, 어떤 사람이든 그렇게 할 수 없다. 사람은 태어나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그 생명의 가치는 사람이 얻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원치 않는 임신이 있을 수 있고, 아이를 낳았을 때 감당해야할 무게가 두려울 수도 있다. 경제적인 부분뿐 아니라 정신적인 어려움, 주위의 시선도 무시할 수 없다.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가 그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이 생명을 해할 수 있는 권리를 주지 않는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생명을 해할 권리를 주지 않으셨다. 낙태는 하나의 선택으로 생각할 수 없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권이 높아지고 사회적 약자가 보호받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고 허울좋게 들리는 구실이 늘었을 뿐, 오히려 그들의 생명은 더욱 위기에 처해있는지 모른다. 생과 사의 문제에서 우리는 그 주인이 누구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생명을 택해야 한다.

 

생명을 보호하고 삶을 누리게 하는 참된 이웃이 되어라

첫번째 적용이 ‘강도가 되지 말라’라면 두번째 적용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되지 말라’라고 할 수 있다. 강도는 적극적으로 생명을 해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소극적으로 생명을 해했다. 생명을 보호하고 그 삶을 참되게 누리게 하는 이웃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의무를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지붕에 난간을 만들라는 계명을 주셨을 정도로 구체적으로 삶에서 생명을 보호하는 것을 중요하게 보셨다. 오늘날 우리도 주변에 있는 이런 필요를 돌아보야 한다. ‘안전 제일’을 자신에게 그리고 남에게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위험성이 다분한 행동을 그냥 괜찮겠지라고 생각하고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소가 받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면 잘 단속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호해야할 책임이 주인에게 있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들어야한다. 차를 빠르게 모는 것은 이런 면에서 자랑할 일이 아니다. 나와 동승자, 통행자의 생명을 보호할 책임이 운전자에게 있다.

 

이웃을 사고로부터 보호하는 것 뿐 아니라 그들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우리가 기억해야할 의무다. 사회의 취약 계층, 약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그런 면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악한 일을 한 경우뿐 아니라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지 못하거나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이 육체적 피해나 상해를 입지 않도록 지키고 보호하고 예방하지 못할 경우, 그는 이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입힐 옷이 있는데도 어떤 사람을 벌거벗겨 내쫓는다면, 당신은 그가 얼어 죽도록 방치한 것입니다. 사람이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도 먹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가 굶어 죽도록 방치한 것입니다. … 왜냐하면 당신은 그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고 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육체의 궁핍과 생명의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조언하고 도와 주지 않는 모든 사람을 살인자로 일컫는 것은 정당합니다.”

 

야고보도 비슷한 말씀을 했고 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자기 자신의 경건 뿐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닮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 58:6-8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우리가 대한민국의 가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이웃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가지고 가까운 자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필요를 돌아보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일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음으로 살인하지 말라

우리가 앞서 말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막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분노하고 비방하는 것이 마음의 살인이다. 예수님은 그 죄만으로도 우리가 지옥 불에 들어가기에 충분하다고 말씀하셨고 사도 요한도 그 안에 영생이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 중 단 한번도 남을 미워하지 않거나 화내지 않거나 비방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살인 사건이 발생한 현장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아무리 생명을 직접 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보호하고 참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다고 해도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결국 제 6계명은 우리로 예수님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셔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구원자 예수님을 바라보게 한다. 자신을 미워하고 분노하며 죽이기까지 했던 그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내려놓으시고 참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한다. 내 안에 있는 미움과 분노는 그래도 아무도 죽이지는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한 사람을 죽였다. 바로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그 예수님의 생명으로 새생명을 얻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더욱 더 이 계명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생명을 소중히 해야 한다. 미움과 분노를 내려놓고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생명부터 그렇게 해야한다. 그 사람들이 어떤 자격을 갖추어서 내가 그렇게 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구원하신 자이거나 구원하기 원하신 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 그들에게 우리가 만난 복음의 빛을 우리의 사랑의 말과 사랑의 행함으로 선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이웃사랑이다.

 

도전

십계명의 6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니 그 생명을 소중히 하라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제 우리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기억하고 참된 이웃이 되어, 우리 육신의 생명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이 땅 가운데 높이 선포하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