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새 포도주와 새 부대

본문 : 누가복음 5장 33~39절

설교자 : 이병권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분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그 분이 가르치시는 권위 있는 가르침에 놀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모두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주와 선생이라 부르며 예수님을 따르지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시기하며 대적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지만, 어떤 사람은 끝까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지난 시간에 누가복음에서 본 것처럼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자신이 병들었음을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신의 상태를 모르고 여전히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병들었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사실을 본인이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상태를 제대로 알고 계십니까? 그러면 그 상태에 따라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그 분의 권위와 능력에 대해서 도전하고, 그 분을 대적합니다. 자신의 상태를 모르기에 계속해서 예수님과 부딪히게 되는 겁니다.

특별히 누가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다섯 번에 걸쳐서 연속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은 다섯 번의 논쟁에서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앞선 두 번의 논쟁은 우리가 이미 살펴봤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벌어졌던 죄를 사하는 권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면서 벌어졌던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세 번째에 해당하는 금식에 대한 논쟁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는 안식일에 대한 두 번의 논쟁이 더 이어집니다. 누가는 이렇게 거듭되는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반대가 점점 더 커져가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어떤 논쟁이 벌어지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의문에 대해서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장면입니다. 33절을 보면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라고 시작하는데, 누가는 무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바로 앞에 나오는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언급을 하는 것은 동일한 본문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나오는데, 조금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누가가 의도한대로 누가의 본문 중심으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배경을 생각해보면, 많은 죄인들이 모여 큰 잔치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며 못마땅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금식이라는 규례를 가지고 예수님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다른 제자들과 비교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30절에 있었던 제자들을 향한 비방의 말이 33절에도 이어지는 겁니다. 30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했었는데, 33절에서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금식하며 기도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있느냐’

여기서 뚜렷하게 대조되는 두 가지 생활방식이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구별되는 종교적 생활방식이 서로 맞서고 있는 겁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그럼 무엇이 맞는 걸까요? 금식이 경건한 모습이고 더 수준이 높은 것으로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먹고 마시는 것은 금식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그렇게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금식을 행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만 다르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실천하는 것, 일반적으로 따르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해왔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하는데, 그것과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넘어서 틀렸다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종교적인 것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와 좀 다른 것을 보면, 그런 모습을 보면 우리는 쉽게 잘못되었다, 고쳐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생활 방식은 서로 일치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건한 모습, 올바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생각하면 제자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더 이상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32절에서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그들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만일 예수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면, 왜 죄인들과 함께 회개의 표시가 되는 금식을 실천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이와 같습니다. ‘아니, 죄인을 불러 회개시킨다고 말하면서, 그런데 정작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이 아닌가? 죄인을 회개시킨다면 죄인과 더불어 금식을 해야지, 지금 당신들은 앞뒤가 안 맞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요‘

금식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경건을 실천하기 위한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특히 죄에 대한 회개와 함께 따라오는 것이 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회개를 이야기하면서 금식은커녕 먹고 마시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그들이 예수님께 금식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이유입니다. 유대인들은 금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경건한 사람들이 따라야하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부족한 것으로 뿐만 아니라 이들이 하나님의 사람일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금식을 이처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았던 걸까요?

34절과 35절에서 예수님이 이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금식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묘사해 주는 질문으로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를 비유로 이와 같이 기쁜 때에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이 금식을 하는지 질문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녀가 결혼하면 신혼여행을 떠나지 않고, 집에 머물면서 일주일 동안 집을 개방했습니다. 부부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이 잔치 동안에 손님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당연히 혼인 잔치 동안에 손님들은 금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금식에는 적당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계신 동안은 금식이 합당치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사역하고 계시는 지금은 금식의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직접 먹고 마실 수 있는 세상에서 다시없는 정말 소중한 기간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그 분과 함께 하면서 오히려 금식을 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그 분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금식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따르기 위해서 금식하는 거라면, 지금 그들 곁에 계시는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따르면 됩니다.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바로 물어보면 되는 겁니다. 나의 육체적인 필요를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을 더 간절히 구하기 위해 금식한다면,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금식이라는 단계를 거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들 곁에 계시는 예수님께 나아가면 되는 겁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금식 보다 그 분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 분을 직접 보고 그 분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금식의 시기를 잠시 미루어 두신 겁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상황은 변할 것입니다. 지금과 다른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 날이 와서 상황이 변하면, 그에 대한 반응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빼앗기게 될 것이고, 그때는 금식하기에 합당한 시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회개에 있어서 금식의 역할은 어떠합니까? 죄인들이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금식이 따라와야 하는 것 아닐까요? 회개에 있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금식만이 회개의 표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진정한 회개에는 기쁨이 따라옵니다. 나를 받아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 내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우리가 회개를 통해 흘리는 눈물은 통회의 눈물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기쁨의 눈물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금식으로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잔치로도 연결됩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잔치를 엽니다. 죄인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기쁨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수많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회개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기쁨의 잔치인 것입니다.

그러면 금식에 있어서 지금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그 날이라고 말씀하신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 우리는 금식이 필요한 시기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 우리는 금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금식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명령하거나, 금식으로 우리 신앙의 수준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금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금식을 왜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좋은 것이지만, 종교적인 가식을 가지고 잘못된 금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금식을 할 때,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마음과 그 분을 향한 갈망에서 금식하기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금식이라는 형식을 갖추고 떼를 쓰는 겁니다.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 울고 떼를 쓰며 자기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금식하고 있거든요. 하나님이 이거 들어주셔야 됩니다.” “하나님, 이거 해결해주실 때까지 저 밥 안 먹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금식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또한 금식을 통해서 나를 드러내려고 한다든지, 종교적인 열심을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금식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입니다. 여러분, 금식하는 것도 좋은 것이고 금식하지 않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할 때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36절부터 예수님은 또 다른 비유를 통해 영적인 진리를 가르쳐주시는데, 이것은 금식이라는 주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구체적인 예를 짤막하게 소개하면서, 이전 것과는 다른 새로운 것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지금까지의 유대교와 전혀 다른 새로운 것, 우리가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예를 말씀하시며, 그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서 각각 “하는 자가 없나니”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잠깐 살펴보면, 36절에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37절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39절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예부터 살펴보면, 기워야 할 필요가 있는 낡은 옷에서 시작됩니다. 낡은 옷을 수선하기 위해, 새 옷으로부터 한 조각을 떼어 내어 낡은 옷에 붙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낡은 옷을 고치기 위해 멀쩡한 새 옷을 찢는 일입니다.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하면” 만약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새 옷은 찢어질 것입니다. 또한 새 옷에서 떼어낸 조각은 낡은 옷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새 옷을 버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낡은 옷을 위한 일도 아닙니다. 옛 것과 새 것을 서로 섞는 것은 결국 둘 다를 망치는 일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예는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에 대한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플라스틱 용기나 지금과 같은 유리병이 없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포도주를 담기 위해 양이나 염소의 가죽을 사용했습니다. 가죽 부대에 포도주를 보관할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포도주는 익으면서 가스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포도주가 발효하면 설탕이 알코올로 변하면서 이산화탄소가 발생합니다. 부드럽고 신축성 있는 새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새 부대는 늘어난 부피를 감당할 만큼 늘어납니다. 하지만 낡은 가죽 부대는 탄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넣어서 부피가 늘어나면 부대가 찢어집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발효가 끝난 묵은 포도주를 저장하기에 적당한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으려고 한다면, “만일 그렇게 하면” 낡은 가죽 부대는 터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쏟아져 버리고, 낡은 가죽 부대는 더 이상 쓸모없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커다란 손실입니까! 둘 다 못쓰고 버리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새 옷과 낡은 옷 그리고 새 포도주와 새 부대는 결국 같은 주제를 가르쳐 줍니다. 새로운 것은 그것과 어울리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하는 새로운 것은 새로운 형식과 틀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것을 옛 것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함께 할 수 없고 둘 다 망치게 되는 겁니다. 만약 예수님의 가르침을 옛 방식으로 해석하며 따르려 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없습니다. 새로운 것에 맞는 새로운 형식,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 시대가 왔습니다.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새 부대를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동안 해왔던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들을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새로운 각도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새 것을 옛 것에 담을 수 없습니다. 두 가지를 서로 섞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둘 다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세 번째 예로 말씀하십니다. 39절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사람들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익숙하고 편한 옛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새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새 것을 거부합니다.

한 주석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자들은 그저 괜찮은 정도에 만족하면서 새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뛰어난 것을 거부한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새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들 마음이 이미 새 것을 거절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대로 머물기를 바라고, 그 모습 그대로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한 묘사이면서 동시에 경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요점은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금식으로 시작된 논쟁과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 그들이 따르고 있는 옛 것과 예수님이 시작하신 새 것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서 옛 것은 어울릴 수 없습니다. 변화가 필요합니다. 새 시대가 왔으니 사람들은 새 시대에 맞는 새 것을 따라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는 예고도 없이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은 오랫동안 옛 것을 대신할 새 것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에 따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새 시대를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회개의 자리로 부르시고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이 직접 죄인들을 찾아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내가 있는 성전으로 모여라’하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친히 하나님이신 그 분께서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완전히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새로운 길을 많은 사람들이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이 주시는 변화를 기대하고 따르기보다 여전히 옛 습관에 머물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변화에 대해서, 새로운 것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옛것에 너무 길들여지면 새로운 것에 관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하기를 원한다면, 보다 유익한 결과를 기대한다면, 변화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변화 없이 성장하고 성숙할 수는 없습니다.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안주한다면, 늘 그 상태로 머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새 시대를 살아갑니다. 먼저 우리가 주님 안에서 경험한 변화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 임한 성령님으로 인해 우리가 어떤 변화를 경험했는지 기억해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혁명적인 변화입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변화를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안주하며 도태되기보다 끊임없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기 위해 익숙한 것을 버리고 더 좋은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무언가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행하는데 있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저항적이며, 반항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 방식에 만족합니다. 익숙함에 길들여지면, 그냥 이대로가 좋은 것입니다. 때로는 불편함이 있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그냥 잊고 살아갑니다. 변화를 선택하기가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이대로 안주하며 만족한다면 우리는 늘 그 모습 그대로 일 것입니다. 묵은 것이 더 좋다고 말하며 옛 것에 취해서 옛날을 향수하며 살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향한 도전과 변화를 위한 수고는 비록 익숙하지는 않지만, 때로 두려움과 염려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주님 안에서 살아있음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앞으로도 계속 변화하고 성장하기 위해 더 순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며 수고할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변화와 성장을 위해서 여러분이 선택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개인적으로 더 주님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가 안락한 소파가 아니라면,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변화를 위한 작은 노력들을 실천할 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변화를 위한 작은 노력들이 모여서 우리는 보다 더 주님을 닮아갈 것이고 우리의 인생은 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꾸어 질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보다 더 건강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