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람은 무엇으로 의를 얻는가?

본문: 로마서 4장 1~25절

설교자: 이병권

 

사람은 무엇으로 의를 얻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의 답을 알고 있습니다. 답은 “믿음으로”입니다. 우리가 알고 지금 쉽게 대답하는 “믿음으로” 라는 이 답은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게 쉽고 간단한 답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이것은 종교개혁을 일으킨 중요한 진리였습니다. 종교개혁가 칼뱅은 의를 얻게 하는 이 믿음을 ‘열린 손’으로 비유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으려고 손을 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의에 이르려고 했는데 그들에게 “믿음으로”라는 이 진리는 그야말로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믿음으로”라는 이 진리가 개혁을 일으켰던 시기는 종교개혁 때만은 아닙니다. 종교개혁이 있기 오래전에 바울 당시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이 진리는 어색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나 전통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더 그러했습니다. 개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믿음으로 얻는다는 이 진리를 설명한 후에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내 생각하고 다른 건 잘 안 듣습니다. 걸러냅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 특히 가족이 뭔가 말하면 잘 안 듣고 고집대로 합니다. 그럴 때 전문가의 말이나 검증된 결과, 증거가 있으면 좀 달라집니다. 상황은 달랐지만 아마 바울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진리를 선포했지만 많은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진리가 그들의 생각과 전통을 깨뜨릴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무엇이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까? 성경입니다. 바울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와서 그들에게 이 진리를 증명합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진리는 바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었는데 그 증거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증인이 되어 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를 확증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증인을 초청한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은 특별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로 큰 민족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복을 받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시작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육신으로 유대인의 조상이었고, 뿐만 아니라 경건에 있어서 그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공경했습니다. 유대교의 대표적인 문헌들을 보면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에 대한 모든 행위에서 완전했고 그의 온 삶을 의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희년서 23:10).

아브라함은 수많은 민족들의 위대한 조상이었고 어느 누구도 영광에서 그와 같은 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율법을 지켰고 그분과 언약을 맺었다. 그는 육신으로 그 언약을 보증했고 시험을 받을 때 신실함을 증거했다(시락서 44:19-20).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생각했고 순종의 모델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율법을 지켰기에 할례를 받았기에 순종함으로 시험을 통과했기에 하나님의 의에 이른 것으로 그들 삶의 본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럼 과연 너희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 한 번 살펴보자!’ ‘아브라함의 삶이 무엇을 교훈하는지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보자’고 말합니다. 우리도 함께 보겠습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통해 확증하는 것,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통해 확증하는 것,

첫째로 아브라함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바울은 “만일”이라고 하면서 가정해서 한 번 생각해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행위로 얻었다면, 내가 한 일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이 이것을 증언합니다.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말씀은 인용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던 바로 그 현장에 가서 한 번 생각해보자’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말씀에서 중요한 단어가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 11번 나오는데, 회계 용어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로 치다’, ’~로 생각한다’ 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롭다고 생각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의롭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를 의로운 자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완벽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마치 그런 것처럼 그를 대하십니다.

바울은 이것을 일하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우리가 일을 해서 돈을 받으면 그것은 일한 대가입니다. 하지만 일하지 않고 행위와 무관하게 품삯을 받으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일한 결과로 받은 보상이 아니라 일한 것이 없지만 은혜로 받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다윗도 같은 진리를 확증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인데 ‘율법’이라 할 수 있는 모세오경의 아브라함에 이어서 이번에는 ‘선지자들’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다윗의 증언을 가지고 옵니다.

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4: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은 자신의 경험으로 이와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시는 사람, 그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행복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나 자신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지만 여전히 죄를 지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우리의 신분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행위로써 경건을 위해 일한 대가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항상 부족하고 항상 불안하고 항상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의에 이를 수 없는 부족한 나, 그래서 늘 죄에 짓눌린 불행한 삶을 살 것입니다.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탕한 삶을 살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이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로 인해 정죄 받지 않습니다. 역설적이고 말이 안 되지만, 팀켈러의 표현으로 하면 ‘의로운 죄인’이 된 것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운 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복을 받은 자이기에 그 복을 알기에 때로 죄에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바울이 아브라함을 통해 확증하는 것,

둘째로 아브라함은 할례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할례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4: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4: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다시 아브라함으로 돌아와서 바울은 이렇게 질문하는 겁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면 할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아브라함을 생각해봐라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언제냐? 할례를 받기 전이냐 받은 후냐?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아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냐?‘ 이 질문의 답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할례를 받기 전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과 할례는 무관합니다.

창15장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아브라함은 창17장에서 할례를 받습니다. 학자들은 15장과 17장 사이의 기간을 대략 14년 정도로 추정합니다. 랍비들은 이 사이의 기간을 29년 후의 일로 계산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할례는 의롭다 하심의 조건이 아닙니다. 결과로서 “”입니다.

4: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할례는 “표와 인침“입니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할례를 통해 자신이 언약 백성임을 기억할 수 있도록 표시로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표시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교복을 입은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교복은 학생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고 학생들의 신분을 보여주는 옷입니다. 그런데 학생이 아니라 제가 교복을 입는다는 어떨까요? 저도 교복을 입을 수 있지만 제가 중학생 교복을 입는다고 해서 저의 신분이 중학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교복을 입는다고 해서 학생이 아닌 사람이 학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그 후에 약속의 징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가 의롭다 하심을 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안 받고’에 따라 영적인 신분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할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해주는 비자가 아닙니다.

만약 할례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 역시 나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할례는 나의 행위로 할 수 있는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마음의 할례입니다. 의롭다 하심은 내가 뭔가 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할례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그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입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통해 확증하는 것,

셋째로 아브라함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바울이 이번에는 율법과 믿음을 대조하는데 약속을 가지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 그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어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상속자가 되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켜서 약속을 받은 것도 아니고 율법을 지켜서 약속대로 상속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 율법이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율법은 약 430년 후에 모세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아브라함 때에는 율법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순종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과 관계없이 아브라함의 어떠함과 관계없이 일방적인 언약을 맺으셨고 신실하게 그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약속의 성취는, 상속자가 되는 것은 율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율법으로 된다고 하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를 가져옵니다.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어떤 사람도 상속자가 될 수 있을 만큼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아니라 율법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파기 되는 것이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의롭다 하심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율법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부족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율법은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상속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은혜로 얻기 위해 믿음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4: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믿음으로 라는 답은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통해서도 증명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저주가 아니라 복이 되기 위해서는,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아닌 믿음은 혈통과 문화와 나라와 시대를 초월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 안에서 우리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고 믿음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행위도 아니고 할례도 아니고 율법도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된 일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17절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며,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입니다.

4: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 진리를 적용합니다.

4: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진리는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능력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제 딸들이 어렸을 때 자주 봤던 그림책이 있습니다. 저도 좋아했던 책인데, 책 제목이 “우리 아빠가 최고야”라는 책입니다. 아빠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듭니다. 그 책을 보면, 아빠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아빠는 슈퍼 히어로입니다. 책에서 아빠를 과장해서 표현하는데 아빠는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책에 나오는 아빠랑 현실의 아빠가 많이 다르기에 어린 자녀에게만 통할 수 있는 그림책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책이 마지막에 가서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책에 나오는 아빠와 현실의 아빠를 연결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 아빠가 최고인 진짜 이유가 마지막에 나옵니다. 우리 아빠가 최고인 진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가 나를 사랑하니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제가 이 책을 통해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은 아빠인 나에게도 정말 이런 아빠가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정말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할 수 있는 아빠, 능력이 무한한 아빠, 어떤 것도 막을 수 없고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아빠, 악당도 무서울 것이 없는 아빠, 나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는 아빠, 그런 아빠가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빠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빠가 세상 어떤 것보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내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아빠가 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최고라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셨고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으니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대상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배우자입니까? 누구를 가장 신뢰할 수 있습니까? 몇 프로까지 믿을 수 있습니까? 사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한계가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따르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100%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를 믿음으로 받아주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답게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가 아빠를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의지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아빠를 따르는 것처럼 우리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지만 우리의 삶은 여전히 의롭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을 신뢰했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실패와 과거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믿음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