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도가 교회에 전수한 복음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설교자: 조정의

사도 바울의 관심은 이제 신령한 은사에서 부활의 복음으로 옮겨졌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도가 선포한 복음의 핵심이었는데(행 2:31-32, 3:15, 26:8), 고린도 교회 성도 중 어떤 사람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라고 부활을 부정하고 있었다(12절).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복음이 약속하는 살아있는 소망을 죽이고, 복음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타오르는 동력을 꺼트린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부활에 관한 올바른 교훈으로 재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1절).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영원히 친밀한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복음”을 바르게 알게 하기를 원했다. 이 편지를 통하여 처음 전해진 복음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부정과거) 복음,” “너희가 받은(부정과거).” 고린도 교회는 단순히 바울이 어디선가 들은 ‘복음’이라는 메시지를 전해들은 것이 아니다. ‘받다’를 뜻하는 파라람바노(παραλαμβάνω)는 ‘최초에 목격한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확실하게 전수해 준 것을 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 바울은 복음의 목격자였고(8절), 바울이 받은 것은 확실히 “주께 받은 것”이었다(고전 11:23). 고린도 교회가 어떤 복음을 받았는지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들이 (복음) 가운데 지금껏 서(완료) 있었기 때문이다. 바른 복음은 교회를 굳게 세우지만, 다른 복음은 교회를 금세 무너뜨린다.

대표적인 유신 진화론자 우종학 교수와 짧은 논쟁을 한 적이 있다. 그는 과학이 이렇게 발전하고, 시대와 문화가 이렇게 많이 달라졌는데, 여전히 과거의 고지식한 교리에 매여있는 것은 미련하고 교만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2절). 복음은 과학의 발전에 따라 발전하는 게 아니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함께 달라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복음은 사도가 전해준 그 말 그대로를 굳게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복음이 발화된 구원의 현재적 은혜와 미래의 소망을 누릴 수 있다. 그러면 사도가 교회에 전수한 복음의 특징은 무엇일까?

1. 오직 성경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3절).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4절). 사도 바울이 한 복음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이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물론 바울은 다른 사도들을 통하여 자신이 계시로 받은 복음이 그들이 주님께 직접 들은 복음과 일치한다는 확증을 얻었을 것이다(갈 2:2, 7).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전한 복음은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계시로 전해주신 복음이었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은 임의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철저히 성경대로 일어난 일이었다. 사도는 그래서 자신이 전한 복음을 요약하면서 “성경대로”라는 말을 두 번이나 사용한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하여 당신의 죽음과 부활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셨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사도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항변했다. 예수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셨다(마 8:32-33). 예수님이 잡혀가는 것을 막으려고 베드로가 칼을 뽑았을 때, 예수님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구할 수 있지만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마 26:54).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나 예수님은 이렇게 그들을 깨우치셨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4-48). 사도가 교회에 전수해 준 복음은 이처럼 오직 성경에 기반을 둔다. 이는 교회를 세우는 복음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뜻임을 강조한다.

2. 오직 그리스도

둘째, 바른 복음은 교회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공로가 오직 그리스도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3-4절). 단 하나의 주어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셨다. 교회(우리)를 위하여.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하여 부정하는 이단과 싸워야 했다(요이 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 영은 거룩하고 육은 부정하다는 이교도 사상(영지주의) 때문에 영이시고 거룩하신 신께서 더러운 육신을 입고 죽임을 당하거나 부활하여 새로운 육신을 입는 것은 미련하고 불필요한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고전 1:23). 그러나 사도는 이것이 성경대로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려면 온전히 사람이 되셔야 했기 때문이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육신의 확실한 죽음과 새로운 육신을 입은 부활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무덤에 확실히 죽은 시신이 묻혔고, 새로운 몸으로 부활했을 때, 무덤은 분명히 비었다. 또한, 주님께서 새로운 육신을 입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여러 증인을 통해 입증된다. 게바열두 제자(5절), 오백여 형제(6절), 야고보모든 사도(7절), “내게도”(8절).

주님은 부활하셔서 시몬(게바)에게 자신을 보이셨고(눅 24:34), 열두(한) 제자가 모인 곳에 나타나 육신을 입고 부활하신 사실을 입증하셨다(눅 24:36-43). 예수님은 또한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는데, 사도가 이 편지를 기록한 시점엔 그중 “대다수는 살아 있”었다(6절).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언할 증인이 이처럼 많았던 것이다.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지 않던 육신의 형제 중 하나였지만(요 7:5),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지도자이자 야고보서를 기록한 저자가 되었다(“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약 1:1). 부활을 보고 자기 형이 진실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이다. 이후에 여러 경우를 통하여 모든 사도와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도 바울에게도 주님은 부활하신 몸을 나타내셨다(7, 8절). 구원이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주권으로 세워진 뜻이라는 사실을 무엇으로 확신할 수 있는가? 바로 육신을 입고 주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통해서다. 창세 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역사적으로 나타내신 공로를 통하여 분명히 우리에게 전해졌다. 믿는 자가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가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이고, 부활 소망을 갖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가 위하여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3. 오직 은혜

세 번째로 바른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가져온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면서(10절), 자신이 복음의 은혜를 받고 또 복음의 은혜를 맡은 자가 된 것 모두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노래한다. 먼저, 바울은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사용했음 직한 표현에 기꺼이 동의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8절),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9절),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9절). 실제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삼 년 반 동안 양육하여 낳은 사도가 아니었다. 사도로 세움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린 철천지원수였다. 그런 그가 심히 미워하던 예수님을 도리어 전파하기 위하여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는 자로 변화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바른 복음을 믿고 또 맡았기 때문이었다(행 26:16-18, 갈 1:1):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엡 3:7).

사도는 또한 자신이 처음 받은 그 은혜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비다’, ‘무능하다’). 그를 사도가 되게 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가 사도로서 수고한 많은 일에 살아있는 능력이 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도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오롯이 자기 힘으로 이루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물론,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10절). 구원은 시작부터 영원히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다. 나의 나 된 것도, 내가 구원의 열매를 맛보며 합당한 삶을 사는 것도 모두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하나님 은혜가 끝까지 능력 있게 역사한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4. 오직 믿음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전파한 동일한 복음(“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11절),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가져다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말하는 복음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가 전해준 그대로 믿었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11절, 부정과거). 그들은 반드시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사도가 전한 그 복음에 관한 전적인 확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한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2절). 여기서 “굳게 지키다”(현재형)는 계속해서 그렇게 바른 복음을 붙들어야 구원의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헛되이 믿다”(부정과거)는 그들이 받은 복음에 관한 바른 믿음이 애초에 없었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라고 말했다(히 10:39). 믿음은 강해지거나 약해질 수 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절대로 뒤로 물러가 멸망하지 않는다. 오르락내리락 하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는다(벧전 1:9). 바울은 에베소 교회 편지하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수단인 믿음까지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이라고 밝혔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믿음은 우릴 구원한다.

그러면 헛된 믿음과 참믿음은 어떻게 구별하는가? 그리스도께 믿음을 둔 형제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 참믿음은 그에 따른 행함이 함께 일한다. 행함은 믿음을 분별하는 도구이자 믿음의 진실함을 확증하는 도구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은 살아있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

마지막으로 바른 복음은 결국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바친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창세 전에 계획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모든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우리에게 살아있는 믿음을 주셔서 결국 영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그래서 구원에 관하여 하나님께 이렇게 영광을 돌린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사도는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10절).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다. 사도가 전수한 복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은혜에 충분히 감사하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려는 의지가 박약한 것이다. 대부분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이나 세상의 유혹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점점 더 지기 힘든 짐이 더해질 때, 내 삶이 큰 가치나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때.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모든 계획을 세우셨다고 말한다.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확증된 그 풍성한 은혜와 사랑으로 언제나 함께 하시며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말한다. 그 하나님을 즐거이 찬송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