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3
본문 : 요한일서 1장 5~2장3절
설교자 : 최  종 혁

1장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2장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는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할 때 마음에 가지고 있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는 자, 곧 구원받은 사람들은 삶에 있어서 죄의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삶에서 경험하는 죄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에 대해 ‘의인’이라고 말하고 ‘성도’라고도 말합니다. 거룩하게 된 사람들, 죄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감사가 되지만 여전히 내 삶에 죄의 문제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구원’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대답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만약 구원을, 단지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삶에 있는 죄의 문제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이미 의로워졌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라고 한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죄’는 굉장히 큰 문제가 됩니다.

요한일서는 구원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된 것에 특히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3).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 사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절부터는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하면서 그분의 거룩하심과 진리, 생명이신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 오히려 하나님의 속성과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과 사귐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그분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그 빛 가운데 행합니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해서는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는 전혀 죄가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이냐’, 또는 ‘전혀 죄가 없는 삶이 되어야만 구원받은 사람이냐’는 질문입니다. 또한 ‘나의 삶에 죄가 있는데 그렇다면 이 죄는 진짜가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 삶에 죄의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이 죄는 내가 짓는 것이 아니라 내 육체가 짓는 것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위와 같은 생각들이 당시 교회에 들어왔던 이단적 사상들이 죄에 대해 가르쳤던 것들입니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이 그러한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도 요한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그러한 오해에 대해 사도 요한의 설명을 들어보길 원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은 죄가 없는 삶이 아니라 죄에 민감한 삶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8). 구원받은 자의 삶은 죄가 없는 삶이 아닙니다. 만일 ‘이제 죄는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6). 6절에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하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8절에서는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아니요, 압니다. 우리의 삶에 죄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있다면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진리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10). 이 말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도(6), 자신을 속이는 것도 아닌(8),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렇게 선포하신 하나님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진리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성경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해결책은 그리스도이신데,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 그런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말씀, 마음에 심기어진 진리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죄인들이 보이는 공통적인 반응이 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성전에서 보았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고 말합니다(사 6:5).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눅 5:8).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사도 바울이 그것을 기억하면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합니다(딤전 1:15).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이신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삶에 존재하는 죄들이 어떤 논리를 통해서도 없는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어둠 속에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어둠 때문에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제의 삶에서 성도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을 ‘의인’이라고 말하고 ‘성도’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법적인 개념이며 신분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실제로도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요? 바로 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다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9).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자백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마음 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는 것을 ‘자백’이라고 말하는데, 성경에서 자백은 ‘같은 것을 말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죄라고 말하는 것을 나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자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나 역시 인정하며 그분께 나와 고백하는 것이 자백입니다. 여러분이 한동안 밤에 불을 끄고 생활한다면 집이 더러운지 어떤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을 켠 순간 집이 얼마나 더러운지 보게 됩니다. 그것이 어둠에 있는 사람과 빛에 있는 사람의 분명한 차이입니다. 어둠에 있는 사람은 죄와 더러운 것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빛 가운데 나온 사람은 이제 더러운 죄들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자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빛 가운데 있기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이것은 과거에 한번 일어난 일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매일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는 매일의 삶에서 죄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고 하나님께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계속해서 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이 죄와 싸우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분과 교제하면 기쁨과 만족이 찾아옵니다. 또한 그것과 동시에 죄에 대해서는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큰 죄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곤고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정말 연약한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러한 탄식이 자연스레 나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할수록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 하나님을 닮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죄에 민감한 삶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9).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그의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케 하십니다. 성전에 올라간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종교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송받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죄인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을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했던 세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의롭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며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구하는 자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미쁘시고 의로우사”라고 말합니다. “미쁘다”는 것은 신실하다, 약속을 잘 지킨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4).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 대해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신실히 지키십니다.

또한 “의롭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되어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의롭게 심판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여러 차례 공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서 의로우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없는 셈 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4-26).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에 이미 해결된 죄의 문제를 다시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죄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용서를 안 해주시면 어떡하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시고 의로운 심판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죄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자는 삶의 죄를 죄로 인정하고, 그 약속해주신 의롭고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계속 용서해주신다는 약속이 있으니 우리는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될까요? 우리가 죄를 대항하여 싸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차피 이 땅에서는 패배할 싸움이고 죽고나면 승리할 싸움인데 왜 싸워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정말 위험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은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2:1).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쓴 것은 죄를 범치 않게 하려는 것이지 죄를 맘껏 지으라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고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삶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지, 그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티켓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하늘나라 티켓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을 공짜로 얻었는데 마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저는 전철 안에서 사람들에게 종이쪽지를 나눠주고 당첨되면 상품을 무료로 준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당첨된 사람에게 음료를 공짜로 준다고 말하면서 세금으로 10만원을 내라고 했습니다. 구원이 그와 같은 것입니까? 구원에 대해 무료로 천국 가는 티켓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면 죄와 싸워야 하는 삶은 뭔가 이상합니다. 우리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신 것은 귀한 일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구원의 가장 중요한 사실은 창조주와 우리의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죄와는 계속해서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사랑과 계명이 어떻게 함께 갈 수 있을까요? 진정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2:3). 예수님을 안다는 것, 그와 친밀한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죄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2:4-6).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날마다 구원을 이뤄가는 사람,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입니다. 죄에 안주해 있는 사람은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그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빛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때로 실수해서 넘어지기도 하고 연약함에 사로잡혀 있기도 합니다. 반복되는 죄를 보면 내가 구원받은 사람 맞나 싶고, 죄가 너무 큰 것 같고 너무 많은 것 같으며 너무 잦은 것 같아서 더 이상 죄 용서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기가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사탄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네가 그러면서도 빛 가운데 행하는 자라고 할 수 있어?”, “네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야?”, “예수님이 너 같은 사람을 위해 죽었을까?”, “너도 염치가 있으면 그냥 있지 그래”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이 사도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말씀을 봅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2:1).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고 너무 많은 죄와 너무 잦은 자백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을 때에도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서 말씀해주시는 대언자가 계십니다. 대언자는 옆에서 돕는 사람이고 법정에 선 변호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돕는 분,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신 예수님께서 이제 다시 삶의 회복을 위해 돕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대언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감정에 호소하거나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대언하시되 의로우신 방법으로 하십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2:2).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셨기에 의롭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하여 ‘그의 죄가 맞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문제를 대신 해결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화목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오실 예수님의 모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영원한 제물이 되셨고 스스로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영원한 제사장과 영원한 제물이 되셨기에 그 제사는 “한 영원한 제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2:2). 예수님의 희생은 사도 요한과 이 편지의 독자들의 죄만 겨우 담당했던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도 남을 정도로 예수님은 무한하신 분입니다.

죄는 강력합니다. 때로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도 그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기억하십시오. 그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은 그 죄보다 훨씬 강하시고 무한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감당치 못할 죄는 없습니다. 이런 것을 알면서도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나와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보다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됐다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다시 제가 가졌던 질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믿는 자는 삶에 존재하는 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믿는 자의 삶에도 죄는 존재할까요? 그렇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사는 한 그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하나님처럼 완전한 삶은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있는 것을 없는 것이라고 하거나, 그것에 지나치게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원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마치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삶에서 죄를 인정하고 그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이 싸움은 평생 싸워야 할 싸움입니다. 그러나 우리만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 죄들과 싸우는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고 죄와 싸우는 여러분의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선한 소원을 주시고 행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고 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방심하지도 마시고 낙심하시도 마십시오. 약속을 믿고 하루하루의 싸움을 싸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