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빛 가운데 행하게 하는 복음 3

본문: 요한일서 1장 5절 – 2장 3절

설교자: 최종혁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시고 또한 빛 가운데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시고 그 관계의 친밀함을 누릴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분께는 어둠이 조금도 없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빛 가운데 행할 때에 하나님과 사귐을 누릴 수 있다. 성경은 바로 이렇게 빛 가운데 행하게 하는 복음을 말한다.

요한일서 1:5을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었고, 6-7절을 통해서는 그 사실에 기초하여 어떻게 자신을 점검해 볼 수 있는지를 살펴봤다. 점검은 간단하다. 내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이다.

빛 가운데 행해야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들어온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들어온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한다는 의미다. “빛 가운데 행한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변화다. 어둠 속에서 보지 못해서 알지 못해서 잘못된 것을 원하고 소원했다면, 이제는 빛 속에서 보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바른 것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어둠에 속한 것들, 즉 거짓과 죄악과 죽음에 속한 것들이 아닌 빛에 속한 것들을 원한다. 이전의 정욕과 탐심은 십자가에 이미 못을 박았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가장 원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 이런 마음의 소원의 변화가 가장 근본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마음의 변화는 사람의 강력한 의지나 굳은 결심을 의미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새언약의 백성에게 약속하여 주신 것이다. 모세는 결국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실패하여 약속된 저주를 경험하고 다시 회복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것을 예언했다.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면 그들이 달라질 것을 예언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순종의 삶을 살게 될 것이지만,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 먼저다. 이는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새언약의 약속으로 이어진다.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6:26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하나님은 새언약의 백성들(구원 받은 자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약속하셨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마음의 변화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24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미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실 때 그렇게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다. 바로 이 변화된 마음이 행동을 바꾸고 삶을 바꾸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모습이다.

여기서 실제적인 의문이 생긴다. 그럼 구원 받은 사람은 죄를 원하는 마음도 없고 따라서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인가? 논리적으로 그렇게 들릴 수 있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믿는 자를 그렇게 변화시키실 것(영화)이다. 천국에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없는 이유는 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모든 괴로움은 죄의 결과이고, 하나님은 그 죄가 없는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다. 당연히 그 곳에 죄를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다.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래도 나를 그곳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차별도 아니고 불공정한 것도 아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사람은 빛이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온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죄가 없는 삶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그때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믿는 자는 지금 그곳으로 가는 과정에 있다. 죄의 소욕이 내 삶의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죄의 유혹은 여전히 실재하고 죄를 원하지 않는 믿는 자에게는 그것이 가혹한 현실이며 치열한 싸움이기도 하다. 이를 가장 솔직하고 정직하게 표현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바울이다.

7:18–24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이 원하는 것은 선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원한다. 무엇보다 그것을 가장 원한다. 하지만 그 ‘속에 거하는 죄’가 있다. 여전히 죄가 그에게 영향을 주고 있고, 바울은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워 한다. 그래서 속히 이 사망의 몸에서 건짐을 받기를 원한다. 더 이상 원치 않는 죄를 범하면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미워하고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자의 현실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봤듯이 “행한다”는 것은 완벽한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의 방향, 특징, 패턴 등을 의미한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빛”이 그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의미이지, 다른 모든 것은 어떤 영향력도 주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그럼 구원 받은 자도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고 또한 실제로 죄를 짓는다면, 구원 받기 전과는 뭐가 다른 것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죄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죄에 민감한 것이 다르다. 요한일서 1:8-2:3은 죄에 대한 민감함이 두 가지 특징으로 드러남을 밝힌다. 하나는 죄를 부정하지 않고 자백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에 굴복하지 않고 싸운다는 것이다. 죄를 부정하거나 죄에 굴복하는 것은 어둠 가운데 행하는 사람의 특징이고, 죄를 자백하고 죄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의 특징이다.

죄를 부정하지 않고 자백한다(8-10절)

6-7절에서 그랬던 것처럼 요한은 여기서도 두 부류의 사람을 대조하고 있다.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과 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 둘 중 누가 빛 가운데 행하는 자, 하나님과 참된 사귐이 있는 자일까? 언듯 생각해 보면 당연히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일 것 같다. 하지만 성경의 판단은 다르다.

요일 1:8–10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참된 사귐이 있는 사람이다. 왜 그럴까?

먼저 8절에서 묘사하는 사람은 ‘지금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말은 신분적으로 의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 죄가 없다는 의미다. 요한은 지금 계속해서 법적인 측면이 아니라 관계적인 측면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전에는 죄를 지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죄는 나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난 설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도 요한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이 이런 주장을 했다. 삶에 죄가 있지만 그것이 진짜 나라고 할 수 있는 ‘영’과는 관계가 없다는 식의 논리로 실재하는 죄를 부정했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완전 성화’를 주장하는 경우다. 완전 성화는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서 관점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는 어떤 특별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죽음 이후가 아니라 이 땅에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구원 받은 즉시 그렇게 된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고, 구원 받은 후에 ‘두번째 은혜’라는 것을 받아서 어느 시점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쨌든 구원 받은 사람은 법적인 의미에서의 칭의 뿐 아니라 실제로 죄를 범하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존 웨슬리의 영향을 받은 교회들 중 일부, 구원파의 일부, 또한 워치만 니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유사한 주장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의문은 그럼 그들이라고해도 실제로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아닐텐데, 삶에 존재하는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느냐다.

몇 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행동이 아니라 의도에 의해 죄의 유무가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상대방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냈다고 해도 그것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화를 내려고 낸 것이 아니라 말을 하다보니 화가 난 것이면 그건 죄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닌데 사람이다보니 연약해서 순간적으로 나쁜 말을 하거나 거짓말을 한 것은 죄라고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혹은 삶 속의 죄는 단지 습관에 의한 기계적인 반응일 뿐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죄의 지배를 받아 살아왔던 시간만큼 그것이 습관화 되어 어떤 상황에 대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반응하는 것 뿐이지 그것이 죄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좀 더 극단적인 경우는 그렇게 죄를 범하는 것은 구원 받지 않은 증거라고 말하거나 혹은 그 순간 구원을 잃은 것이기 때문에 구원 받아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왜 이런 관점이 비성경적인지는 성경을 조금만 읽어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만약 죄를 저렇게 이해한다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성경의 선언은 거짓일 것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싶어서’, ‘일부러’, ‘남을 괴롭히려고’ 그런 일들을 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들 ‘상황이 그러해서’, ‘나도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 뿐’이라고 말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도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정확히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인의 특징이다.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둑질한 사람이 도둑질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거짓말한 사람이 거짓말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죄인은 죄가 없다고 말한다.

죄인이 죄를 부정하는 것은 크게 보면 두 단계가 있다. 먼저는 죄를 숨기려 하고 숨길 수 없을 때는 부정하려고 한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합리화를 하든지 아니면 어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이 죄인의 특징이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 범죄했을 때 하나님에게서 숨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 죄를 드러내셨을 때,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다윗이 간음의 죄를 범하고 나서 했던 일도 그 죄를 숨기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살인이라는 또 다른 죄를 범하기도 했다.

오늘날 동성애나 낙태 등에 대해서 기독교가 특별히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죄라고 하신 것을 죄가 아니라고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선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인이 죄를 숨기고 부정하는 것은 최소한의 죄의식은 있기 때문인데, 오늘날의 세상은 그런 죄의식 자체를 지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죄는 불법이라”(요일 3:4)고 말했는데, “불법”은 법을 어기는 것 뿐 아니라 마치 법이 없는 듯이 행하는 “무법”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날 세상은 매우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우고 있고 이것이 어둠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정리하면, 8절이 말하는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다. 6절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고 어둠에 행하는 사람을 거짓말하는 사람이라고 했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죄를 부정하고 합리화하면서 자신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자기기만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은 죄를 말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그것을 부정하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앞서 살펴본 예처럼,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의 빛이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로 그 안에 있다면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빛이 비춰서 어둠에 감춰져있던 더러운 것들을 다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깨끗하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아 자신을 속이는 사람만이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10절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현재 죄가 없을 뿐 아니라 죄를 지은 적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8절이 자신이 죄를 지은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10절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요한은 이에 대해서 더 강하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경고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넘고, 자신을 속이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포하셨다.

왕상 8:46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

14:2–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따라서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결국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가 맞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진리고 하나님이 거짓이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빛이고 하나님이 어둠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 안에서 이런 일을 한다.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사람을 구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8, 10절의 결론이다.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하게도 그렇다. 구원 받기 전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죄가 없고 죄인이 아니라고 한다. 어둠 속에 있어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그 속에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따라서 그렇게 말한다면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반대의 특징을 보여야 한다. 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 보지 못해서 죄를 부정한다면,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보기 때문에 죄를 인정한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 선 자들은 갑자기 자신의 죄를 자백하곤 했다.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상한 반응이 아니다. 이 사람들이 남들보다 더 죄를 많이 짓고 살아서 이런 반응을 보였던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현재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에 보인 반응이다. 그때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인 것이다.

여기서 “자백”의 어원을 보면 ‘같은 것을 말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죄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 동일하게 죄라고 말하는 것이 자백인 것이다. 죄를 숨기거나 “하나님, 이건 죄가 아니예요. 제 생각에는 죄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씀하신 것이 내 삶에 있을 때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씀하신 이 죄를 제가 행했습니다”라고 말하며 하나님 앞으로 가져오는 것이 자백인 것이다.

계속 강조하지만 빛 가운데 있기 때문에 죄가 보이는 것이다. 어둠 속에 있으면 더러운 것을 보지 못한다. 궁금하면 한번 실험을 해보라. 집 안을 완전히 어둡게 만들어 두고 생활해보라. 식사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평소 하던 그대로 한번 생활해 보라. 단, 완전히 어두운 상태에서 그렇게 해보라. 나름 정리도 잘 하고 청소도 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일주일 후에 불을 켜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기간이 한달 혹은 일년이라면 아마 상상도 못할 장면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빛은 모든 것을 드러낸다. 이것이 빛 가운데 있는 사람과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의 가장 분명한 차이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볼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갓 구원받은 사람, 영적으로 어린 사람의 특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구원 받고 영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이런 특징은 더욱 분명해진다. 영적인 성장이라는 것은 7절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영적 성장이라면, 빛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나의 작은 어둠도 더 선명하게 보인다. 전에는 죄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던 행위조차도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에게 “이제는 좀 거룩해 지신 것 같냐?”라고 물으면 하나같이 아니라고 답한다. 진짜 아무런 성장을 이루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나의 죄가 더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읽었던 바울의 탄식도 그런 탄식이다. 그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한 것은 그가 연약한 성도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성숙한 자로서 그 죄의 심각성을 더 깨닫고 있기 때문에 탄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은 정말로 ‘완전 성화’를 이루고 싶은데, 그렇지 않기에 나오는 탄식인 것이다. 빛이신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의 기쁨을 너무나 사랑하는 자의 탄식인 것이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이렇게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말은 자백한 죄만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실수로 자백하지 않은 죄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죄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정하고 자백하는 사람이 바로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또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삶 가운데 그렇게 하시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이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약속을 주신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이 약속을 지키신다. 하나님의 의로우셔서 사하신 죄를 다시 들춰내서 우리를 공격하거나 부끄럽게 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확신이다. 빛 가운데 행하게 하는 복음을 믿고 구원 받은 자는 죄를 부정하지 않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죄에 굴복하지 않고 싸운다(1-3절)

여기서 또 다른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어차피 우리 삶에서 죄는 언제나 있을 것이고,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계속 용서하신다면 죄를 계속 신경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죄를 대항해서 싸워야할 이유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냥 그 사실을 인정하고 살면서 죄를 지으면 자백하는 정도로 살면 되는 것 같다. 이 땅에서는 어차피 패할 싸움이고 죽고 나면 다 해결될 문제인 것처럼 느껴진다. 같은 죄가 반복될수록 이런 생각은 더 커져간다.

사실 이런 태도가 ‘완전 성화’를 말했던 웨슬리가 염려했던 부분이다. 지금까지 말했던 부분이 ‘어차피 우리는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어’라고만 들려서 거룩을 추구하는 삶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웨슬리는 강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 웨슬리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거룩함을 계속해서 추구해야 할 것을 ‘완전 성화’를 통해 강조했던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웨슬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거룩한 상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더 큰 오해를 가져올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고, 실제로 그렇게 ‘완전 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웨슬리가 염려했던 부분을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는 아니더라도 죄와의 오랜 싸움에 지친 사람들은 충분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정말 위험하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은혜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2:1에서 이 생각을 즉각 배격한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말씀의 의도를 곡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1:5-10의 말씀은 절대로 편하게 죄를 지을 수 있게 하거나, 죄는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살라고 주어진 말씀이 아닌 것이다. 정확히 반대다.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고 기록한 것이다.

구원을 지옥가지 않고 천국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어차피 지옥 갈 죄의 문제는 다 해결되었는데, 지금 죄를 짓는게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 있다. 영생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으로만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죄 짓는다고 생명이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고 영생이 그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임을 안다면, 이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일상의 죄는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를 만든다. 그 친밀함을 깬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가장 고통스러워하셨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작은 죄 하나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깬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셨다. ‘담당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순간에는 그 모든 죄를 예수님의 죄인 것처럼 보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버림 받는 고통을 맛보셨다. 그것이 예수님께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예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자도 동일하다.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죄를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 정상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깨는 죄와 계속해서 싸우려고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런 명령을 하셨다.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

14:23 …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

요한도 그래서 2:3에서 이렇게 말한다.

요일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계명을 지키다는 것은 곧 죄와 싸운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그를 아는 것(관계)에 대한 증거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구원의 목적으로도 표현한다.

고후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에 안주하고 굴복하는 것은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의 특징이지 빛 가운데 행하는 자의 특징이 아닌 것이다. 죄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자의 특징이다. 죄를 범하지 않으려 하고 선을 행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앞서 말한 것처럼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래서 요한은 “누가 죄를 범하여도 …”라며 그런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그럴 때는 9절에서 말했던 것처럼 죄를 자백하는 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자의 특징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사람의 연약함이 드러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할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로 인해 크게 자책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 사람에 대한 미안함을 너머서 그렇게 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한다. 분명 죄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죄가 반복된다. 자백을 하고 다짐을 해도 어느 순간 또 무너져 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자책도 함께 커져간다. 죄가 너무 큰 것 같아서, 죄가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죄가 너무 잦은 것 같아서 더 이상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내가 구원 받은 사람은 맞을까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순간을 사탄은 놓치지 않는다. “그러고도 네가 빛 가운데 행하는 자야? 어떻게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어? 하나님도 너한테는 이제 질리셨을거야. 너도 염치가 있으면 그냥 가만 있기라도 해”

사탄의 말이다. 죄에 굴복하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요일 2:1–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나도 나를 이해못하고 차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을 때, 그저 탄식만 나오고 있을 때도, 언제나 하나님 앞에 계시는 우리의 대언자가 계신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송사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완벽한 변호사가 되어주신다는 말이다.

여기 사용된 “대언자”는 성령님에 대해서 “보혜사”라고 할 때 사용된 단어와 같다. “옆에서 돕는 자”라는 의미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우리 옆에서 돕는 분이 계시다.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신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그 관계를 붙들고 계시는 것이다. 나는 지금 죄를 범했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의로우시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드리신 화목제물은 지금도 유효하다.

죄는 강력하다. 그 지배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조차도 그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절망하고 굴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든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강력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이끄신 예수님은 어설프게 일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감당하지 못하시는 죄는 없다.

죄책감을 때로는 겸손처럼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 놀라운 힘을 무시하는 것이다. 애초에 내가 뭐가 되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나의 바닥을 보았다고 해서 실망할 것 없다. 나는 그것을 지금보았지만, 예수님은 이미 그것을 보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을 힘입어 언제든지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자의 모습이다. 죄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예수님을 힘입어 싸우는 것이다.

도전

요한일서 1:5-2:3의 말씀을 통해서 믿는 자는 왜 빛 가운데 행해야 하는지 그리고 빛 가운데 행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봤다.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에 믿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그 마음의 변화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가 완전히 없는 삶은 아니지만, 죄에 민감한 삶이다. 나에게 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백하는 것, 그리고 죄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죄에 민감한 모습이고,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바로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복음이다. 내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확신의 기쁨을 누렸기를 바란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나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를 바란다.

혹 이런 삶의 특징이 나에게 없다면 이제는 빛 가운데 행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멈추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정직하게 구할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정말로 우리 삶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절대로 남을 속이지 말고 자신을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너를 모른다”는 말을 듣기 전에, 부끄럽고 수치스럽더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바란다. 하나님은 절대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끝으로 빛 가운데 행하기 위해 날마다 싸우는 분들에게 이 말씀을 드리기 원한다. 이 싸움이 쉽다고 말할 수 없다.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이 싸움은 나 혼자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싸움이다. 우리에게 선한 소원을 주신 하나님은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우리를 계속해서 깨끗하게 만들어 가신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우리의 대언자가 되어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은혜다. 이 약속과 은혜를 믿고 하루 하루 빛 가운데 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