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본문: 로마서 1장 16~17절

설교자: 이병권

 

여러분은 복음이면 충분하십니까? 우리가 복음이면 충분하다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고 말은 하지만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복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사는 겁니다. 다른 것을 좇을 때도 있고 복음 플러스 뭔가가 더 있어야 부족함이 없을 것 같고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복음이면 충분하다는 말은 실제 우리 삶과 어울리지 않는 말일까요? 마치 이론과 실제가 다른 것처럼 꿈같은 이야기, 현실성이 없는 고백일까요?

 

그게 아니면 정말 특별한 몇몇 사람, 신앙의 클라스가 다른 사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일까요?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고백일까요? 무엇이 다를까요?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걸까요? 왜 우리가 진심으로 복음이면 충분하다고 고백하기가 쉽지 않을까요? 뭔가 부족한 것처럼 왜 복음만으로 만족하며 살기가 어려울까요?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알고 확신했던 복음,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으로 헌신했던 복음, 그 복음을 우리가 잘 모릅니다. 우리가 그만큼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더 알아야 하는데 오히려 아는 것도 쉽게 깜박하고 잊어버리고 삽니다.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지 얼마나 강력한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고 삽니다. 그러면서 익숙해집니다. 그게 전부인 것처럼 원래 그런 것처럼 사는 겁니다.

 

우리가 진공청소기를 쓰면 시간이 지날수록 청소기 안에 먼지가 쌓이고 그래서 점점 그 성능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계속 쓰다보면 잘 모릅니다. 그 상태에 익숙해져서 청소기의 힘이 원래 그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청소기 통에 가득 차있는 먼지를 비우고 나면 놀라게 됩니다.

 

우리에게 복음이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신앙생활에 적응하고 살다보면 점점 익숙해집니다. 복음에 대한 감격은 점점 사라지고 뜨거웠던 열정은 점점 식어집니다. 내가 경험했던 복음의 능력도 점점 잊혀져갑니다. 무기력하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잘 모르기에 그럴 수 있고 잊어버리고 살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믿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로마를 방문해서 복음을 믿는 성도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라는 책에서 “복음 부흥”이라는 말을 소개합니다. 그는 복음 부흥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복음 부흥은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재발견을 말한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복음의 재발견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 삶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복음 부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복음은 단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복음을 통해 우리 삶이 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고 복음의 은혜로 풍족하게 채워져서 이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세상에서 다른 만족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환경이나 상황과 상관없이 어떤 것으로도 흔들 수 없는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복음이면 됩니다. 만족합니다.

 

이와 같은 고백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울의 고백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어떻게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이 고백은 이유를 말하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복음은 어떠했을까요? 복음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고전1:23)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복음은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게 복음은 어떠했습니까? 율법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의 승리와 영광을 가져와야 하는데 예수는 십자가에 수치를 당하며 힘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예수는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전하는 복음은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이방인에게 복음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는 그의 원수들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사로잡혀 죽임당합니다. 그들이 볼 때 복음은 힘없는 부족한 신에 대한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신들이 있는데 원수에게 패배한 신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복음은 그들에게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을 믿는 것은 세상에서 부끄러울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부끄럽지 않다는 말은 그것이 나에게 자랑이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무언가를 자랑한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그것의 가치를 확신하고 삶의 근거와 원리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를 자랑했고(갈6:14),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합니다(빌3:3). 지금 우리 표현으로 하면 바울은 복음이면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충분하기에 복음이 자랑이 됩니다. 복음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으로 만족을 찾지 않습니다. 복음의 가치를 알기에 사람들의 평가나 사람들의 시선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복음은 어떠합니까? 요즘처럼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따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여겨집니다. 사람들이 비웃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이 많고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만들어 낸 것으로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교회가 조롱당하고 욕을 얻어먹을 때 우리가 복음에 대한 담대함을 잃어버릴 수 있고 부끄러워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복음이면 충분하다고 복음을 자랑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어떻게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난과 박해와 조롱 속에서도 계속되는 반대와 유혹 속에서도 어떻게 계속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복음으로 설명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복음이 이러하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알면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복음에 대한 바울의 요약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16절과 17절을 로마서의 주제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로마서의 핵심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복음을 가장 체계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는 로마서, 그 로마서를 요약하는 중요한 말씀이 오늘 본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을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두 가지를 먼저 살펴보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를 이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복음이면 충분한 이유, 첫째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이냐 복음이 아니냐?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까? 능력입니다. 참 복음, 진짜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겉으로 대단하게 보이고 엄청난 사실을 말한다 하더라도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따르고 행했던 율법,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방인들이 따르고 믿었던 신들, 지혜와 철학들,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복음이 복음인 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고 그 능력으로 죽었던 우리 영혼을 살리시고 생명으로 살게 하십니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능력입니다.

 

오스트리아의 병리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는 사람의 혈액형을 발견하고 수혈 방법을 확립함으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1901년 그가 혈액형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혈액형을 몰랐습니다. 혈액형과 관계없이 임의로 수혈을 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일도 많았습니다. 어쩌다가 혈액형이 맞으면 생명을 건졌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혈액이 응고되어 생명을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카를 란트슈타이너가 혈액형을 발견함으로써 수혈을 통해 수많은 생명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확립한 수혈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능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수혈은 그 사람의 영혼은 구하지 못합니다. 다만, 이 땅에서의 생명을 연장할 뿐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어떠합니까?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미 경험한 하나님의 능력을 자주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놀라운 능력을 행하셨는데 그와 상관없이 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내가 얼마나 추악한 자인지 얼마나 형편없는 자인지 다시 생각하고 또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묵상은 나에 대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믿기 전과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 능력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람은 안 변한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정말 안 변합니다. 변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갑니다. 지 버릇 개 못 줍니다. 그래서 고생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 좀 바꿔보겠다고 애를 쓰고 잔소리하고 싸우고 집안이 시끄럽습니다. 바꾸려는 사람도 고생이고 바뀌지 않는 사람도 고생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어떻습니까? 복음이 사람을 바꿉니다.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복음을 믿고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부족하지만 변해갑니다. 복음이 사람을 바꿉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다음으로 복음이면 충분한 이유, 둘째는 복음이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여기 나타나다는 말은 계시되었다,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때가 되었을 때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가 알 수 있도록 분명히 계시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 날에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 선하신 뜻 가운데 그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그럼 “하나님의 의”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한 주석가는 먼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교회사 전체에 걸쳐 계속해서 논란이 되어 왔으며 그 결과 이에 대해 엄청난, 심지어 다루기 힘들 만큼 많은 문헌이 씌어졌다. 그 논쟁을 체계화하는 것은 물론, 요약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학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나름의 견해들을 설명하는데 제 생각에 그런 논쟁들은 학자들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

 

몇 가지 견해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로움’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가 이어지는 로마서의 내용과도 잘 맞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움은 복음을 통해 증거 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의로운 일을 행하심으로 의로움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말합니다. 우리 입장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칭의’는 재판장이 무죄를 선고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의롭다고 죄 없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복음이 이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의로움,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죄라는 장벽이 제거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의로운 옷을 입었습니다. 새로운 신분이 된 것입니다.

 

복음은 의로움을 선포합니다. 사람에게 의로움을 명령하지 않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고 그런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세상 종교들과 다른 점입니다. 종교는 의로운 자가 되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의로운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종교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종교는 부족하지만 복음은 충분합니다.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복음은 의로움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다 하셨기에 이제 의롭게 된 자로서 의로움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이 우리에게 진짜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을 위한 이 놀라운 복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되는 이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복음의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의가 실제로 적용이 되려면 복음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그 준비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필요합니까? 본문에서 계속 언급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하나님의 능력인 구원을 주십니까? “믿는 자”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또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어떻게 됩니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여기 말씀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라는 말은 믿음을 강조하는 말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보이시며 또한 우리에게 의를 주신다. 그분은 불의한 자를 위해 죽으신 의로운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일을 하셨다. 그분은 믿음으로,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그리고 우리가 그분에게 자비를 달라고 부르짖을 때, 그 일을 하신다.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그리고 믿음으로 자비와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복음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박국 말씀을 인용하여 다시 한 번 믿음을 강조하며 확증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사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 그 복음의 은혜가 나의 것이 되는 조건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부하든 가난하든, 나이나 출신이나, 그 어떤 것도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며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나 같은 방법으로 오직 믿음으로 복음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정리하면, 먼저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다음으로 복음이 나에게 적용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를 더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복음으로 우리가 새롭게 되기 위해서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재발견을 경험하기 위해서 복음을 믿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를 더, 마음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라고 고백하며 복음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복음이 믿음으로 역사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복음은 우리 마음에 초점을 맞춥니다.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마음은 단순히 감정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지성과 감정과 의지 모든 영역에 대해서 마음이 주관합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 그 모든 것을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팀 켈러는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인품의 핵심이며, 근본적인 헌신의 장소, 전인의 통제 센터이다. 마음에 있는 것이 우리의 생각, 행동, 감정을 지배한다. 지, 정, 의가 모두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머리로 아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나의 마음을 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의지적으로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렇게 중요한 장소 나의 마음에 예수님을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나의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지 않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이미 믿고 있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복음으로 삶이 변화되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초청할 때 사용되는 말씀이지만 사실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 문을 열고 주님께 마음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함으로 예수님을 내 마음에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진심으로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내 마음에 계시는데 같을 수 있을까요? 주님이 내 마음에 계시면 내 생각, 내 행동, 내 삶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에 계셔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데 어디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이 내 마음에 계셔서 지켜보고 계시는데 어떻게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을까요?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내 마음에 계시는 주님으로 인해 조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복음, 믿음, 그리고 마음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제가 말씀을 준비하는 동안 계속 제 마음을 무겁게 하는 대상에 대해서 경고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보통은 믿는 분들과 아직 믿지 않는 분들을 대상으로 말씀드리지만 오늘은 특별히 그 사이에 있는 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교회에는 스스로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믿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형제, 자매라고 부르며 교회에 참석하며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구원과는 거리가 먼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정확한 것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사람의 열매를 통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진단은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무관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관심도 없고 말씀을 무시하며 내 욕심대로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믿는다고 말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있을까요? 사실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 멈추시기 바랍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오십시오. 그만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말고 나에게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께 믿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코로나로 인해 교회로부터 멀어진 이 시기는 어떻게 보면 나의 믿음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내 믿음, 내 신앙이 어떠한지 알 수 있는 시험대가 되는 것입니다. 거의 1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의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믿음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복음을 믿는 자로서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것이 나의 진짜 모습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사실 난 더 괜찮은 사람이고, 더 믿음이 좋은 사람인데, 충분히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얼마든지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데, 지금은 단지 안하고 있을 뿐이야!’ 착각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지금 그 모습이 당신의 진짜 모습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복음을 들었는데,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그 많은 기회들을 날려버리고 결국 인생의 종착지가 영원한 멸망이라니! 이 무슨 일입니까! 정말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내 착각 속에서 살지 말고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제대로 보시고 자신의 죄를 철저히 깨닫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상한 마음으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낮아진 마음으로 주님을 구하십시오.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애원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날에 버림받은 자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가짜로 살지 마십시오. 자신의 믿음으로 점검하시고 정말 불쌍한 자가 되지 않도록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그런 분이 생기지 않도록 정말 간절히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