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믿음
본문: 로마서 4장 5절 외
설교자: 최종혁
지금까지 복음에 대한 오해 혹은 왜곡을 중심으로 성경이 말하는 복음에 대해서 함께 살펴봤다. 복음의 끝에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다른 것을 두는 것, 복음의 시작에 우리의 죄가 아닌 죄의 증상을 두는 것, 복음의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두는 것 모두가 의도와 관계없이 왜곡된 복음이고 거짓 복음이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에 대한 이런 왜곡은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신 구원의 문을 넓히려는 인간의 교만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반에 있는 것은 인간을 끌어 올리고 하나님을 끌어 내리려는 우리의 죄성이다. 이 죄성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상관 없는 우리만의 복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 인도할 복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다. 복음의 진리를 바르고 분명하게 선포해야할 교회가 복음을 왜곡하고 흐리게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이런 일들은 일부의 신학자나 목사들만 하고 있지 않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그들에게 많은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도들은 피해자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들도 역시 그런 복음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그런 복음이 더 쉽기 때문이다. 단지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기 쉽다는 말이다. 그런 복음에 따라 사는 것이 쉽다는 말이다. 그런 복음은 대부분 나에게 큰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추구해왔던 것들에 적당히 하나님을 더하면 된다. 교회를 더하면 된다.
이런 듣기 좋은(?) 복음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진노를 향해 두려움 없이 가는 성도라 불리는 교인들만 양산해 낸다는 점이다. 성경이 명백하게 정죄하는 죄악된 삶에 대한 거짓 면죄부를 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면죄부가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낸 면죄부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인정받지 못할 면죄부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안타까운 비극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안타깝고 무서운 일을 멈춰야 한다. 혹시 내가 이런 왜곡된 복음을 믿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복음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 봐야 한다. 이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
믿음이 복음을 복음되게 한다
오늘은 복음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믿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사실 지금까지 복음에 대한 말씀을 잘 들었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럼 다 끝난건가? 의로우신 하나님께 죄인인 우리가 나아갈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여셨으니, 그럼 이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끝이 났고,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할 수 있다.
우리에게 정말로 안좋은 소식이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해결되어서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일까? 이제는 모든 사람이 죄가 들어 오기 전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가 되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의 기쁨을 누리며 만족하며 살게 된 것일까? 그래서 이것이 ‘복음’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맞다’인지 ‘틀리다’인지 조금 헤깔릴 수 있다. 답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이다.
‘맞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구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의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떤 차별도 없다. 인종, 성별, 재산, 힘, 지식, 나이, 사회적 위치 등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
골 3:10–11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어떤 사람도 차별받지 않고 새롭게 하심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틀리다’고 해야할 것은 모두가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는 면에 있어서 그렇다. 즉, 복음이 자동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서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구원 받게 되지는 않는다. 그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는가?
롬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는 차별이 없다. 하지만 그 의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믿는 자”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롬 10:10–14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진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정말 복음되게 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롬 4:4–8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복을 얻게 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다. 나의 어떠함이나 내가 한/하는/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함과 하나님께서 하신/하고 계시는/하실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는 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믿음이 아니면 복음은 일반적으로 좋은 소식일 수는 있지만 나에게 좋은 소식은 되지 못한다. 믿음이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믿음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의롭다 함을 얻는 것, 영생을 얻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등은 모두 구원의 여러 측면을 말하는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은 “믿음”으로 가능하게 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럼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하는 믿음,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믿음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믿음이 믿음이지 뭘 더 생각할게 있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어린 아이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는 건데, 뭘 그렇게 복잡하게 만드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믿음은 사실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또 다른 무언가를 요구하는 구원이 되었을 것이다. 믿음은 어려운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렇게 시간을 들여서 오랫동안 설명해야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단순한 사실을 이제는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하고 설득해야 하는 것처럼, 믿음도 그렇게 되었다. 구원하는 믿음에 대해서 말할 때 모두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동일하게 떠올리지 않는다. 믿었다라고 말할 때 그 의미가 서로 다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한다고 해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에 대해서 제대로 정의하지 않고 그냥 좋은게 좋은거라는 식으로 넘어가면, 그 역시 좁은 문을 임의로 넓혀서 실제로는 넓은 길에 있는 사람을 좁은 길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 된다. 안타깝고 무서운 일이다. 스스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해 주었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실수였다’ 혹은 ‘착각이었다’는 말로 후회는 할 수 있겠지만 돌이킬 수는 없다.
믿음처럼 보이지만 믿음이 아닌 것들에 주의하라
성경의 경고
이런 안타깝고 두려운 상황에 대해 성경은 분명하게 경고한다.
히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6절이 말하는 것처럼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는 심판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보라. 이들은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이다. 여기서 ‘맛봤다’는 것은 요새말로 ‘찍먹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실제로 그 모든 것을 경험했다는 말이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들었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했다. 같이 교제했다. 여러 교회의 사역에도 동참했다. 성령님께서 그 가운데 역사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모든 것을 다른 성도들과 함께 경험한 것이다.
누가 봐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일들에 함께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누구도 그들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결국은 믿지 않는 자로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있음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알고 지금 이렇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비슷한 경고를 하셨다.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한 사람들은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 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이다. 교회라고 하면 그 안에서도 가장 열심히 봉사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누구도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밝히 말씀하실 것이다. 누구도 이들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았겠지만 그 끝은 영원한 멸망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대표적이다. 유다는 실제로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고 귀신을 쫓아냈다. 그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유다가 거짓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후회 가운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자신이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했음을 증명했다.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마 13:3–8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여기서 “씨”는 천국 말씀, 즉 복음이다. 따라서 8절에서 말하는 결실은 복음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네 가지 땅을 네 부류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마지막 좋은 땅만이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세 땅은 복음의 씨앗이 떨어졌지만 결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5-7절에서 말씀하신 흙이 얕은 돌밭과 가시떨기다. 4절에서 말씀하신 길 가의 경우는 깔끔하다. 복음의 씨앗이 떨어졌지만 새들이 다 먹어버렸다. 복음을 거절한 불신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흙이 얕은 돌밭과 가시떨기는 어떤가?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에 반응했다. 싹이 난 것이다. 하지만 결실하지는 못했다. 이 모습을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마 13:20–22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실제로 이런 사람을 생각해 보라. 돌밭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즉시 기뻐하며 믿겠다고 하는 사람이다. 아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도 너무나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다. 그렇게 계속 교회도 잘 나오고 나올 때마다 예배시간에 울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그것을 우리는 구원의 열매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당연히 믿어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환난과 박해가 그 사람의 믿음을 드러낸다고 하신다. 환난과 박해가 있을 때 그는 넘어지는데, 애초에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그의 기쁨이나 슬픔은 믿음의 열매가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요 2:23–24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많은 사람이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참된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으로 인해서 그 마음이 동했을 뿐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찬가지로 그들을 피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만나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6:2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들에게 참된 믿음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떠났다.
요 6: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열광했다. 너무 열광한 나머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싶어 했다. 이들은 예수님께 더 말씀해 달라고, 더 많은 기적을 보여달라고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이들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의 증거는 되지 못했다. 이들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선에서 그렇게 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작은 장애물을 놓았을 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떠났다. 믿음 없음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어떤 경험, 특히 감정적인 경험이 있으면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둘이 전혀 관계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1:1의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리 찬양으로 감격하고 말씀에 아멘하고 통곡을 해도, 믿음은 없을 수 있다. 그 기쁨과 감격보다 큰 환난이나 박해가 그 거짓 믿음을 드러낼 것이다.
물론 이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얼마전 수요일에 살펴봤던 가나안 여자의 경우가 그렇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 앞에 장애물을 놓으셨지만(무시, 냉정, “개”), 그 여자는 그 장애물에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의 긍휼을 구했다. 돌밭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잠깐 견디다가 넘어지지 않은 것이다. 환난과 박해는 오히려 이 여자의 믿음이 참된 믿음임을 드러냈다.
다시 예수님의 비유로 돌아가서 가시떨기를 생각해 보자.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도 싹이 나고 자라기는 했다. 하지만 그보다 가시가 더 잘 자라서 기운을 막아 결실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이를 말씀은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이 사람들은 의지를 가지고 뭔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의 최우선에 예수님이 계시지는 않은 사람들이다. 누가복음 9장에 이런 사람들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을 때,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답한 사람이다(눅 9:59).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라고 조건을 달았던 사람이다(눅 9:61).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빼고 보면 이 사람들의 모습은 믿음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큰 결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버지를 장사하고, 다만 가족과 작별하는 것을 먼저하겠다고 말할 뿐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고 답하셨고(눅 9:60),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답하셨다(눅 9:62). 예수님을 최우선에 두지 않는 믿음은 그 의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참된 믿음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 달려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라고 물었던 젊은 부자 관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계명의 계명들을 나열하시자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물었다(마 19:20). 이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는 지금까지 영생을 얻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이다.
이런 사람이라면 우리는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절대 교회의 예배에 빠지지 않는다. 친구들은 시험기간이라고 학원에 가도 이 사람은 교회가 먼저다. 만찬 예배 시간에도 반드시 참여한다. 교회에서 진행되는 성경 공부도 빠지지 않는다. 봉사하는 일이 있으면 항상 가장 먼저 하겠다고 나선다. 헌금을 빼먹는 일도 없다. 매년 성경을 1번씩 통독하고 아침 QT도 잊지 않는다. 한번씩 시간을 내서 연탄 배달같은 자원 봉사도 한다. 아프리카의 어려운 아이를 위한 후원도 여러 명을 하고 있다. 이 정도면 믿음이 있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예수님을 찾아왔던 젊은 부자 관리가 이런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럼 그렇지. 지금까지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더니 결국 돈으로 구원 받는 거였네’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 말이지만,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은 정말로 이 사람이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려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이 사람은 이렇게 반응했다.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재물의 유혹에 막혀 결실하지 못한 경우인 것이다. 다른 것은 얼마든지 할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재물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에게 최우선순위는 재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극단적인 요구를 하지 않으셨다면, 이 청년은 자기 의지로 그런 것들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런 것들이 자신을 영생으로 이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극단적 요구를 통해 그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큰 잔치의 비유를 통해서도 같은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눅 14장).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했다. 잔치 때가 되어 종들을 보내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오라고 불렀다. 하지만 초청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양했다. 밭을 사서 못간다. 소를 사서 못간다. 장가 들어서 못간다. 소식을 들은 주인은 노하였고 거리와 길,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집을 채울 것을 명했다. 그리고 처음 청했던 사람들은 단 하나도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밭을 산 것이 잘못한 일이 아니다. 소를 산 것, 장가 든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우선 순위에 둔 것이 문제다. 마태복음 22장에도 비슷한 비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서 사람들은 이 초청에 무관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돌아 보지도 않고 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을 하러 갔다(마 22:5). 믿는다고 하면서 이런 저런 일을 (열심히)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최우선에 두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포기하고 있다면,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닌 것이다.
믿음처럼 보인다고 해서 다 진짜 믿음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지금 그렇게 해야한다. 지금까지 얘기했던 복음의 모든 요소들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완성하셨고 믿음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복음이 복음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복음에 우리는 믿음으로 화답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따라서, 이 믿음이 무엇인지 우리는 반드시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구원하는 믿음은 무엇일까? 어떤 모습일까?
구원하는 믿음은 전인격적인 신뢰다
믿음의 열매가 아니라 믿음
결국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보면 우리는 믿음과 믿음의 열매를 혼동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한편으로 참 어려운 부분이다. 예수님은 분명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믿음의 열매가 있다면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사실 맞다. 믿음의 열매가 있다면 믿음이 있는 것이 맞다. 문제는 우리가 믿음의 열매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믿음의 열매냐는데 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성경 통독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으로 암송할 수도 있다. 믿음이 없어도 지식은 얼마든 가질 수 있기에 지식이 있다고 믿음도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어느날 성경 구절 하나가 마음에 크게 와닿아서 밤새 눈물을 흘렸으면 혹은 뛸듯이 기뻤으면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소설책을 읽어도 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성경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열심과 의지도 마찬가지다. 교회에서 노래를 잘하고 악기를 잘 다룬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요리를 잘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건축을 잘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잘하고 말씀을 잘전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던 미국의 한 복음주의 목사는 몇 년 전 자신은 더 이상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책으로 인해서 고통받았던 사람들에게 사과했고, 특히 동성애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그들의 퍼레이드에 참가하여 지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고 결국 그것을 따라 간 것이다. 믿음 없음이 그렇게 드러난 것이다.
우리가 믿음의 열매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많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믿음을 쉽게 그 열매로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자꾸 열매를 가지고 ‘이러니까 난 믿음이 있는거야’라고 위안을 삼으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어떤 모습인지에 집중하고 신중하게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전인격적인 신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인격적인 신뢰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믿음은 객관적 지식에서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일반적인 ‘믿음’과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알 수 없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기는 것을 의미한다. 객관적 지식은 알고 모르고의 문제이지 믿음의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의 믿음도 그런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실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 그냥 어떤 희망을 굳게 가지고 있는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객관적 지식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지난 3시간 동안 복음에 대해서 살펴봤던 내용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죄인이며 하나님이 의로우신 재판관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 이것이 복음에 있어 핵심적인 내용이다. 믿음은 이 객관적인 사실에 기초한다.
롬 10:13–14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몰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시작이다. 따라서 믿고 싶다면 아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때로 어떤 사람은 “난 지식 같은 것 필요 없고 예수님만 있으면 돼”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식이 없다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예수님도 없다. 엉뚱한 예수님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믿음은 성경이 밝히고 있는 분명하고 객관적인 사실에서 시작된다.
다음으로 주관적인 동의가 필요하다. 객관적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주관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봤다. 객관적인 지식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기초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요 3:2)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단계 더 나아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니고데모가 구원 받지는 못했다. 그것이 구원하는 믿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그 사실에 동의한다. 그래서 떠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다음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전인격적 신뢰다. 예수님에 대한 어떤 사실을 그냥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결국 예수님께서 나를 하나님 앞에서 유죄 선고가 아닌 무죄 선고를 받게 하실 것이며 그렇게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가 되게 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지 않아도,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지 않은 나를 의롭다고 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을 의로 여기실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 모든 일을 나를 위하여, 나를 대신하여 이루신 예수님을 전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전인격적인 신뢰이기 때문에 중요한 4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로 구원하는 믿음은 겸손한 믿음이다. 나와 하나님의 위치와 관계를 알기 때문에 구원하는 믿음은 교만할 수 없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을 때(마 15:26), 너무하다며 화를 내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겸손하게 답했다(마 15:27).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경우도 누가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느지를 겸손의 여부로 구분할 수 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더 나은 사람임에 감사하다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지만 세리는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기도했다(눅 18:13). 겸손히 긍휼을 구하는 것. 이것이 구원하는 믿음의 특징이다.
둘째로 구원하는 믿음은 사랑하는 믿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느냐를 의미한다. 그래서 무엇을 선택하느냐를 의미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은 재물을 가장 귀하게 여겨서 재물을 선택했다. 참된 믿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겼다(빌 3:4-9).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나머지 것들은 배설물로 여겼다. 그리스도를 선택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린 것이다. 이것이 사람을 구원하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이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선택이고 기쁨의 선택인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가장 귀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벧전 1:8–9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고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 사랑하기 때문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사랑하는 믿음이다.
셋째로 구원하는 믿음은 지속되는 믿음이다. 구원에 시제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구원 받았고(칭의), 구원 받고 있고(성화), 구원 받을 것이다(영화). 칭의만 얻게 하는 믿음은 없다. 구원하는 믿음은 영화에 이를 때까지 지속되는 믿음이다.
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넷째로 구원하는 믿음은 열매맺는 믿음이다. 믿음은 단순히 지속되는 것 뿐 아니라 성장한다. 구원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형상을 계속해서 본받는다.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와 말씀에 대한 순종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믿음의 열매다.
히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지(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주를 보지 못할 사람이라는 의미다. 바꿔 말하면, 주를 볼 수 있는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열매를 맺는다.
물론 완벽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방향성을 의미한다. 다르게 말하면 어느 편에 서느냐를 의미한다.
윌리엄 아넛, “회심하지 않은 사람과 회심한 사람의 사람의 차이는 한 사람에게는 죄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은 자신이 아끼는 죄와 한편이 되어 두려우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화목하게 된 하나님과 한편이 되어 자신이 미워하는 죄를 대적하는 것이다.”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믿음, 사람을 구원하는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이다. 겉으로 보이는 열매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이렇게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점차적으로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결론
마지막으로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한가지 더 있다. 바로 그 믿음은 매우 ‘개인적’이라는 것이다.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것은 부모님의 믿음, 자녀의 믿음, 혹은 교회의 믿음이 아니라 나의 믿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전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하고 있는가.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믿음으로 살라. 이런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께 구하라. 나를 구원하는 믿음도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