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믿는 자의 관용
본문: 빌립보서 4장 5절
설교: 최 종혁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

 

요즘 저는 교회 사무실로 출근을 합니다. 저희 집에서 교회까지는 차로 5분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아침마다 항상 10-15분이 걸려서 교회에 나옵니다. 그 이유는 아침에 차가 매우 많기 때문입니다. 큰 도로에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는데,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를 지나가려고 하면 오랜 시간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답답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법적으로 그들의 잘못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가는 길이 큰 길이고 직진 차로이기에 우선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입장에서는 답답한 마음이 들어 ‘인간적으로 좀 멈춰서 지나가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 일의 근본적인 문제는 서로가 자신의 상황만 생각하고 자신의 권리만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이 바빠서 저마다 자신의 일만 생각하므로 내가 먼저 가야하고 남들이 조금만 양보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기본적인 가치관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 자신이 중요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어디 가서 손해 보지 말라고, 무시당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저 역시 지금껏 살아오면서 세상을 통해 배운 것이 그것입니다. 남에게 무시당해서는 안 되고 내게 주어진 권리를 쟁취해야 하며, 혹시 다른 사람이 그것을 침해한다면 그에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고, 세상이 가르치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나 중심의 생각’,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 중심의 가치관이 교회에 들어오면 교회 안에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교회가 굳게 서지 못하고 흔들리게 되고, 그런 성도는 항상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감과 억울함, 분노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다투고 싸워야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 굳게 서라”고 명령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6가지 명령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 안에서 같은 마음, 즉 겸손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성도들 각자가 다툼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보고 거기서 기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만족을 찾을 때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오늘 함께 살펴볼 세 번째 명령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관용’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오면,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아량, 포용”라고 되어있습니다. 사실 이 “관용”에 해당하는 원어를 찾아보면 그 의미가 너무 커서 많은 학자들은 이 단어를 한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원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면, 먼저 ‘도리에 맞음’, ‘적당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권리를 더 많이 주장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가 잘못을 했을 때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 ‘너그러움’, ‘온화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선의’, ‘관대함’, ‘관용’과 ‘아량’, ‘자비’, ‘포용’의 의미가 있고 어떤 부조리함이나 치욕, 오해를 당할 때 미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내’라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다시 말하면 ‘관용’은 ‘자신의 권리를 내세워 부당하거나 까다롭게 굴지 않는 것, 또한 그렇게 하는 사람에 대해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너그럽게 이해하며 인내하고 용서하는 것’을 말합니다.

겸손이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 나의 권리를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라면, 관용은 그런 겸손의 태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 특히 어려운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정확하게 같은 단어가 5번 사용되었습니다. 딤3:3와 딛3:2에서 교회의 리더들의 자세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지도자들에게 주신 권위를 자신을 위해 사용하거나 남용하지 말고 관대하게 사용하라는데 등장합니다. 또한 이 단어는 ‘다툼’과 함께 등장합니다.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딤전 3:3),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딛 3:2). 다툼 대신 관용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에서는 “시기, 다툼”을 “관용, 화평”과 대조하고 있습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약 3:16, 17).

또한 벧전2:18에서는 애매하게 고난을 받는 상황에서 인내하고 관용할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 2:18). 이와 같이 ‘관용’과 ‘다툼’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사실 관용이 없는 곳에는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싸우기 시작하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싸움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추구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용은 그런 다툼을 막는 것입니다.

관용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모든 사람입니다. 윌리엄 맥도날드 형제님은 이 관용의 대상 때문에 이 명령에 순종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관용은 착한 사람이나 나한테 잘 하는 사람에게는 나타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관용을 그런 자들에게 나타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모든 사람’에는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들,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 심술궂은 사람들, 오히려 나의 관용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나도 잘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잘해주고 관용을 나타내도 그것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게 관용을 나타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 자신의 권리를 남용하는 사람에게 나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그를 용서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확실히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5). 여기서 “말”은 곡식을 담아 부피를 재는 일종의 그릇입니다. 즉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두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등불은 그 빛을 두루두루 비치하게 하는 것이므로, 보다 높은 곳에 둬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치게 해야 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관용의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만 알고 있고 숨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밝히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착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묵묵히 참는 사람들, 힘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믿는 자들의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19,20). 믿는 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관용을 드러낸다는 데 차이가 있습니다. ‘관용’의 의미가, 나의 권리를 내세우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인내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때, 한 가지를 더 추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나의 권리를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더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더 이상 내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신경 쓸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내가 커지고 하나님이 작아집니다. 믿는 사람들은 늘 이것을 되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부당하다고 생각할 때 더욱 자신에게 생각을 집중합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있나’ ‘그는 나를 뭘로 보고 그런 것일까’라는 생각이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의 권리를 위해 싸우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매일 부딪치는 상황입니다. 어떤 것은 정말 나의 권리 일수도 있지만, 어떤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권리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저녁에 잘 싸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남편은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을 하고 왔고 아내 역시 하루 종일 집에서 일한 뒤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집에 돌아와서 쉬기를 기대합니다. 자신에게 쉴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쓰레기를 좀 버려달라고 하면 잠깐 자신의 권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누르고 아내를 위해 쓰레기를 버리러 나갑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돌아온 남편은 그와 같은 말을 아내가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내는 고맙다는 말도 없고 다시 저녁을 먹고 난 설거지를 해달라고 합니다. 남편이 억지로 설거지를 마치고 났을 때 아내가 설거지가 깨끗하지 않다고 지적을 하면 이제 남편은 폭발하는 것입니다. 나는 피곤함을 무릅쓰고 도와주는데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 망정 그렇게 말하냐고 화를 냅니다. 남편은 나에게 쉬어야 할 권리가 있다고, 칭찬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아내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 이런 ‘나 중심의 사고’는 잘못된 관용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고 있고 관용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나 마음속에 억울함과 분노를 담고 있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관용이 아닙니다. 여전히 미워하는 마음과 쓴 뿌리가 있는데 겉으로만 아닌 척 하는 것은 문제를 숨겨놓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만일 남편이 그 상황에서 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생각했다면 어떨까요? 남편은 쓰레기를 버리면서 기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잘못된 관용의 근본에는 나중심의 사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관용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과는 달리, 이 말씀에서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항상 알게 하라”고 한 것이 아닌 점입니다. 즉, 이런 관용이 항상 드러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날 때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드러난다고 해서 공의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관용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행16:16-40을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지역에서 전도할 때 귀신이 들린 여종이 있어서 그 귀신을 쫓아냅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19-21). 점을 치던 귀신이었는데 귀신을 쫓아내니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게 되자, 여종의 주인은 돈을 벌 수 없게 되어 사도 바울과 실라를 고소합니다.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22,23). 그 일로 사도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들이 밤중에 기도할 때 옥문이 열리고 그 일로 간수들과 가족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35,37). 그런데 감옥에서 풀려나는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뒤늦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면 왜 진작에 그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매를 맞고 모욕을 당하는 것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그 결과 간수들과 그 가족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옥에서 나오면서 이렇게 말한 이유는,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38-40). 또다시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로부터 공식적인 보호를 받아서 결국 교회를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생각해 보면, 주님도 무조건 참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전이 잘못 사용되는 것을 보시며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셨고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사람들을 상대하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실 때는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관용을 나타내야 할 때가 있고 나타내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관용을 나타내야 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나타내지 말아야 할 때 나타냅니다. 진리가 아닌 것 앞에 관용을 나타내 그것과 타협하고, 죄를 용납합니다. 우리가 관용을 나타내야 할 때와 그러지 말아야 할 때의 기준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가 가진 관용의 태도입니다.

벧전 2:21-23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관용을 나타내셨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들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22,23).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실 때 주님께는 어떤 권리들이 있었을까요? 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은 정당하게 판결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규범에 따르면 중대한 판결은 낮에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결은 밤에 있었습니다. 또한 중대 판결은 당일에 결정할 수 없고 최소한 하루가 지나고 판결을 내려야 했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밤 사이에 모든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게다가 중대 판결은 안식일이나 명절의 전 저녁에는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명절 전날 저녁에 잡히셨습니다. 판결은 정해진 장소에서 하게 되어있었으나 예수님의 판결이 있었던 대제사장의 집은 그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증인의 증언에 따라 재판관은 심문을 하게 되어있었으나, 예수님의 경우는 재판관이 먼저 체포를 하고 그 후에 증언을 들어서 고소하게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최종 죄목을 "신성 모독"이라고 결정하였는데 신성 모독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한 경우에만 해당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성 모독에 대한 형은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었지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 진행되었던 모든 재판과정은 부당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리를 충분히 주장하실 수 있었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사 보편적인 규범에 따르면, 제사장들과 재판관들은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책잡아 죽이려 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거짓증인들만 세워 예수님을 고소했고 누구도 변호할 수 없게 했습니다. 마지막 사형선고를 했던 빌라도의 최종판결은 ‘무죄’였습니다. 판결은 무죄였는데 예수님을 죽게 내버려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장하실 권리는 너무나 많았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진 권리가 그와 같았다면,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은 어떤 권리를 가지셨습니까? 열두 영이나 되는 천사들을 보내 그들을 멸하실 권리가 있었으나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마 26:53). 또한 예수님의 목숨에 대한 권리는 예수님 자신이 가지고 계셨습니다(요10:18).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그럴 권리가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만 주장하셨다면 굳이 이 땅에 내려오실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공의대로 거룩하지 못한 죄인들을 멸망시키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당함을 모두 인내하신 것은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른 사람은 스데반입니다. 사람들은 거짓증인을 세워 스데반을 고소했고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스데반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마음이 찔려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죽었나요? 그 상황에서 자신의 권리를 생각했다면 분노하고 저주하며 죽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9). 스데반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성도님들께 전해도 될까 고민을 했습니다. 하루하루 힘들게 전쟁 같은 삶을 사시는 분들에게 이런 손해 보는 삶, 억울한 삶을 살라고 얘기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지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손해 보느냐 이익을 보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