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무엇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깝게 만들까?
본문 : 요한일서 2장 1절~6절
설교자 : 조 정 의
요한일서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다양한 관점에서 아름다운 조각 품을 감상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빚어진 권위 있고 은혜로운 요한일서 작품의 기초를 감상했다(1:1-4). 영생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 게 나타내신 바 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를 믿는 순간부터 그분과 더불어 아버지와 함께 영원한 사귐을 충만하 게 누리게 된다는 놀라운 진리였다.
계단을 한 층 올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하는 주범, 죄를 발견했다. 하나님은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시기 때문에 죄 는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을 망친다. 하지만 신자 중에는 죄를 짓 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 이 많다. 그래서 하나님과 멀어진 채 산다. 죄로 멀어진 관계는 자백으로 가까워지며 참된 자백에는 언제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와 회복이 주어진다.
오늘 우리는 계단을 한 층 더 올라가 어떻게 하면 영생의 주님과 더 가까이 사귐을 갖고 더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는지 요 한을 통해 성령이 만드신 작품, 요한일서 2장 1-6절 말씀을 통 해 살펴보기 원한다. 그래서 단지 하나님과 당신 사이가 멀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가까워 지기를 바란다. 영생이 있음을 알 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영생을 풍성히 누리게 하는 것이 바로 요한 일서 전체 목적이고 오늘 설교의 목표다.
1. 죄를 멀리함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다(1-2절)
“나의 자녀들아” 요한은 실제로 나이도 많고, 사도로서 신앙의 연 차가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 수신자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돌본 목사였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실제로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기 때문에 친밀하고 사랑이 가득 담 긴 표현인 “나의 자녀들아”라고 그들을 불렀다(1절).
바로 이전에(1장 5-10절) 요한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만 드는 주범이 죄라고 밝혔는데, 다시 한번 이 편지를 쓰는 개인적 이고도 명백한 목적을 밝히면서(“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1절), 죄를 범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와 영원한 사귐을 갖는 이에게 죄는 정상이 아니다. 넘어지고 죄를 범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죄를 범하는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절대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널리 알려진 라비 재커라이어스가 (1946~2020) 생전에 다수의 여성에게 오랜 세월 성폭력을 저 질렀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평생 무신론자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입증하고 선포하며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수많은 영혼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한 그는 지금 천국에 있을까? 지 옥에 있을까?
섣불리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마스터스 대학의 애브너 차우 교수는 만일 라비가 아직 살아있고 자신을 찾아왔다면 그의 삶이 정상이 아니고 영생 없는 이의 삶이니 반드시 회개하라고 분명하게 견책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한도 틀림없이 그렇게 말할 것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 “그(그리스 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6).
우리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으로 인 해 더불어 사귐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결코 죄가 큰 문제가 아니라서가 아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게 하는 지체가 눈이라면 빼어 버리고 오른손이라면 찍어버리라고 경고하셨다. 그 죄가 온몸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지게 할 만큼 심각하기 때문 이다(마 5:27-32; 막 9:43-5). 죄는 언제나 심각한 문제다.
우리 죄가 이토록 심각함에도 우리가 영생의 주 더불어 하나님 과 친밀한 사귐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신 대언자 예수님 때문이다. 요한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라고 말했다(1절).
대언자의 또 다른 말은 보혜사인데(Helper), 때를 따라 돕는 분 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여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그분만이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 도 없으시며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 곧 의로우신 이로 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대언자 역할을 할 수 있다(시 7:11; 딤후 4:8; 고후 5:21; 벧전 2:22). 이는 대체 불가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이 죄를 간과하고 방종 하는 이유는 죄 가 너무 쉽게 해결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십자가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하니, 죄를 지을 때마 다 자백하면 바로 해결된다고 하니 죄가 그만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구약처럼 가축을 잡으면 귀찮고 불편해 서라도 더 심각하게 여겼을지 모르겠다. 벌금을 내면 어떨까?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 간 에 반드시 심판하신다(전 12:14). 소멸하는 불로 모든 더러운 죄 를 태워 심판하신다(히 12:29).
여기에 분명한 진리가 있다. 당신이 범죄하고 자백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대언 하시고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단지 대언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죄의 대가를 자기 생명으로 치르셨기 때문이다. 우리 뿐만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앞으로 이 땅에 태어날 모든 죄인의 죄까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자마다 용서하시고 그들과 화목한 관계를 맺으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막는 죄의 값을 자기 목숨으로 대신 치르신 화목 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2절).
최근 신학교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죄와 아무런 상관없으며 단지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원수를 위해 기도하며 희생적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을 보여줄 뿐이라고 말하는 가르침이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아버지가 아들을 십 자가처럼 끔찍한 사형 틀에 죽게 하면서 ‘봤지 이만큼 내가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름다운가?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가?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하는 독자를 아낌없이 내어 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동시에(롬 5:8) 우리 죄의 크기와 심각성을 분명하게 알게 한다. 아들이 십 자가에서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죽임을 당하신 만큼 우리 죄는 심 각하다. 그러므로 자백할 때마다 쉽게 죄 사함을 받고 용서받아 관계가 회복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예수님이 그 죄에 상응하는 값을 조금도 부족함 없이 치르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영생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 일수록 자기 죄에 더욱 민감하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그 죄가 얼 마나 가증하고 더러운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서 그 죄를 위해 얼마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맛보셨는 지 십자가에서 흐른 그 피가 얼마나 고귀하고 보배로운지 알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멀리 함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다. 비정상적인 죄를 범할 때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힘입어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용 서와 깨끗하게 하심을 입는다. 그래서 하나님과 다시 가까워진 다. 회개는 영생의 주와 동행하는 자가 매일 힘써야 할 영적 훈련 이다. 그렇게 날마다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간다.
2. 말씀을 가까이함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다(3-6절)
요한은 두 번째로 말씀 순종을 강조한다. 3절에 “그의 계명을 지키면”, 5절에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6절에는 “그가 행하시 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모두 그리스도의 말씀, 그분이 명령 하시고 본을 보이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말씀 순종은 하나님을 아는 것 곧 영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요 17:3). 3절에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말하고 4절에서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고 말한다. 말씀 순종이 하나님과 그 사람 의 관계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순종 곧 행함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말씀의 지식과 정보를 아는 것 이상을 요구하신다. 계명을 아는 사람이 주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주님을 아는 사람이 다. 반대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그가 주님을 안다 고 말해도 그 말은 거짓말이다. 예수님은 열매 곧 삶으로 알리라고 말씀하셨다(마 7:16-20). 진리대로 살지 않는 이의 영혼에 진 리가 심겼을 리 없다는 것이다(‘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함’).
5절과 6절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에 있 는 것, 하나님의 안에 사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더욱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것을 말한다. 예수 님은 제자들에게 “나의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다(요 15:9).
여기에서도 말씀 순종이 강조된다. 5절에서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 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절에서는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말씀에 순종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분 안에 살게 된다. 그 분 안에 거하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백히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 15:10)
특별히 5절에 있는 이 표현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 온전하게 되었나니”를 주목하라. 무슨 뜻일까? 말씀을 순종하면 하 나님의 부족했던 사랑이 온전하게 우리 안에 채워진다는 것인가? 그 반대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더 온전하게 채워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4:15).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주님을 향한 우리 사랑이 표현된다.
놀라운 부분은 이것이다. 우리가 계명을 지켜 주를 사랑할 때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관계가 친밀해지고 가까워지는 것을 보는가? 말씀 순종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낼 때, 아버지와 함께 주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가까이하 신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더욱 크게 표현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25년 만에 얻은 사랑하는 독자를 바 치라고 하셨을까? 예비하신 숫양을 수풀에 미리 준비하시고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를 향한 경외 또 다른 말로 사랑이 순 종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준행한 그 와 천하 만민에게 사랑의 복을 내려주시기 기뻐하셨다. 사랑은 표현될 때 더욱 커진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하나님께 표현되어 더욱 온전해졌고,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을 더 크게 나타내셨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을 무거운 짐처럼 여긴다. 읽어 야 하는 숙제, ‘그렇게 살면 좋을 텐데…’라고 말하는 조언 정도로 여긴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걸 순종하는 건 불가 능해’ ‘적당히 순종하고 적당히 불순종도 하는 거지 뭐’ 이렇게 생 각한 적이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오늘 어쩌면 잊고 살았을지 모르는 진리와 마주하라. 당 신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주님 을 더 알기 위해서, 그분 안에 거하기 위해서, 더 가까이 그분 안 에 살기 위해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입으로만 말씀을 줄줄 꿰고 법과 규칙처럼 철저하게 지켜온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탄식하셨다(마 15:8). 당신의 마음 은 지금 영생의 주에게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 말씀 순종이 그 거리를 좁힐 수 있다. 당신의 사랑을 순종으로 표현하라.
앞서 회개가 영생의 주와 동행하는 자가 매일 힘써야 할 영적 훈 련이라고 말했다. 헬라어 동사가 현재형으로 쓰였을 때 일반적으 로 그 동사는 일회적인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행동 이라고 말한다. 3절에서 6절까지 말씀을 “지키다”, “행하다”가 모두 무슨 형태일까? 현재형이다(4번). 말씀 순종은 주와 동행하 는 자가 매일 힘써야 할 영적 훈련이다. 회개와 순종이 하나님과 당신 사이를 날마다 더 가깝게 만든다.
3. 적용
나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며 살았던 걸까? 나는 예수님 을 얼마나 무시하며 살았던 걸까? 입술로만 사랑한다고 말하고 마음은 오래전에 이미 멀어진 채로 살고 있지 않나?
영생의 주와 사귐을 풍성히 누리려면 그분께 시간을 드려야 한 다. 물론 모든 삶이 그분께 드리는 예배이지만, 특별히 그분 앞 에 일대일로 마주 앉아 종일 어떻게 그분께 사랑을 순종으로 표 현했는지 돌아보는 시간, 매일 주님과 나 사이에 끼어든 크고 작 은 죄를 깨끗하게 자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런 시간의 필 요성을 알지만, 그동안 계속 미뤄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직하 고 솔직하게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자기 아들을 우리 죄 때문 에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자꾸 이 순위로 밀려나는 것인가?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요 10:10). 회개와 순종으로 영생의 주와 더 풍성한 사귐을 누리자. 매일 주와 동행하면서 그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 서 자라가자(벧후 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