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본문: 고린도전서 14장 26-40절

설교자: 조정의

신령한 은사에 관한 마지막 교훈이자 결론에 이르렀다. 교회가 모일 때에 하는 모든 일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일이다. 성령께서 각 성도에게 주신 은사로 우리는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덕을 세운다.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고 믿음 안에 굳게 세운다. 성경은 교회가 모일 때 어떤 형식으로 예배할 것을 구체적으로 명령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형식을 취하든지 상관없이 모든 시대 모든 교회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원칙을 요구한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40절). 사도 바울은 26-35절까지 품위와 질서가 고린도 교회가 모일 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가르친다.

고린도 교회는 삐딱한 태도로 바울의 권면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고, 성령의 은사를 받았으며, 성령으로 일하고 있는 신령한 자들인데, 바울 개인의 권면을 따라야 할 이유가 뭔가?’ 바울은 미리 간파한 듯, 매우 강력하게 경고했다: 36하나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36-8절). 하나님 말씀은 그들에게 난 것이 아니라 전해진 것이고, 그들에게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교회에 임한 것이었다. 그들이 만일 스스로를 대단히 신령한 선지자로 여겨 바울의 편지를 무시한다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무시하는 것이고, 바울의 권면 을 무지하여 거절한다면,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알지 못한 자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만큼 절대적인 원칙이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원칙에서 품위 있게 하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유스케모노스)는 ‘단정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롬 13:13, 살전 4:12), 모든 것을 제자리에 가지런히 두는 것, 배열하고 정돈하는 것을 의미한다. 각각의 은사를 주어진 목적 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합당한 방식대로 알맞게 정돈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질서 있게 하라’는 권면 역시 혼란과 무질서를 피하고 우선순위와 차례를 따라 은사를 사용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눅 1:8, 골 2:5, 히 5:6). 그러므로 모든 시대 모든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형식으로 모이든지 품위질서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할때, 그들의 모임은 투쟁과 경쟁의 장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장이 되고(33절), 은사를 통하여 개인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덕을 세울 수 있다.

1. 방언을 품위와 질서 있게 하는 법(26-28절)

14장에서 바울이 주목한 은사가 방언과 예언이라고 해서 교회가 모일 때 그것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절). 찬송시는 구약 시편을 낭독하거나 노래하는 것이고(엡 5:19), 가르치는 말씀은 설교처럼 성경을 연구하여 그 의미를 가르치고 삶에 적용하도록 권면하는 것이다(스 7:10, 딤후 2:15). 계시는 직접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인데(고후 12:7, 갈 1:12), 예언의 은사는 가르치는 말씀계시를 모두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방언은 외국어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은사고(행 2:6), 통역은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꿔주는 은사다. 그 외에도 모든 종류의 돕는 은사와 다스리는 은사가 있지만(고전 12:28), 교회가 함께 모일 때 그러니까 공적이고 정기적인 모임에서 사용되는 은사들만 언급했다. 중요한 건, 모든 것을 반드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언의 경우 어떻게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을까?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27-8절). 두세 사람으로 방언을 제한하는 것은 방언을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으로 여겨서가 아니다(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39절). 다만 품위 있게 하여 교회 전체의 유익을 끼치려고 제한한 것이다. 예언도 마찬가지 이유로 둘이나 셋이 하라고 권했다(29절). 은사 활용을 제한하는 것이 어떻게 교회의 유익을 증진하는 일이 되는가? 품위(합당함, 적당함)의 원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말씀의 은사는 우리 영혼에 많은 유익을 주지만, 그래서 매주 교회가 모일 때, 아무런 제한 없이 설교를 수십 편 듣는다면 유익을 넘어 부담이 될 것이다. 품위 있게 해야만 교회의 덕을 세운다.

방언은 또한 차례를 따라 해야 하고 반드시 통역이 따라야 했다. 질서와 통역 없이 주어진 방언은 그 주요 수혜자인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미쳤다’는 평가만 받고 아무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한다(23절). 교회에 덕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움을 끼친다.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은 교회에서 사용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유익하다. 자기와 하나님께 말하라는 권면은 통역이 없을 때 방언을 다른 성도가 듣도록 입 밖으로 내지 말라는 완곡한 표현이다. 

바울은 분명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명령했다(39절). 하지만, 성경의 방언은 분명 외국어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표적의 은사고, 품위와 질서 없이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추구하는 방언은 성경이 말하는 방언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 외국어도 아니고 통역 없이 사용되며 품위 있게 제한하거나 질서 있게 사용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경이 말하는 방언의 은사를 주시거나 그 은사로 교회의 덕을 세우실 수 있지만, 사도 시대 이후로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고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정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2. 예언을 품위와 질서 있게 하는 법(29-35절)

예언을 교회의 덕이 되게 하는 법도 품위와 질서의 원칙을 요구한다. 먼저, 방언과 마찬가지로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는 것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예언하는 것으로 적당히 제한되었다(29, 31절).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그 외에도 몇 가지 품위와 질서를 위한 통제가 필요했는데,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예언의 내용을 분별할 것(29절), 2) 계시의 우선순위를 정할 것(30절), 3) 남자만 말할 것(34-35절). 

1) 내용 분별: 예언은 방언과 달리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전달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하는 유익을 주었다(31절).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들의 숨은 죄를 드러나게 하고 죄에 대한 판단과 책망을 듣고 회개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돕는 유익을 줄 수 있었다(25절). 그런데 교회 안에는 거짓 사도, 형제들, 선생들도 있었다(고후 11:13, 26, 갈 2:4, 벧후 2:1). 그래서 교회는 가르치는 자들의 내용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반드시 판단해야 했다(요일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영들 분별함은 당시 교회에 주어진 은사 중 하나였고(고전 12:10),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들을 통하여 전해진 바른 교훈 등을 가지고 각각의 예언을 분별했을 것이다(행 17:11, 베뢰아). 진실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만이 교회를 바른 믿음으로 인도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게 하는 유익을 주기 때문에, 예언은 반드시 분별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2) 예언은 가르치는 말씀계시를 모두 포함한다. 계시는 하나님께 직접 받은 말씀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독특한 명령이 주어졌다: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30절). 어떤 성도가 예언의 은사로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중에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성도에게 하나님이 계시를 주신 상황이다. 아무런 질서를 세우지 않는다면 누가 먼저 할 것인지 다툼이 발생해 평화가 깨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신선한(새로운) 계시를 먼저 나누고, 그다음 순서로 이어갈 것을 권했다(31절, “한 사람씩 차례로”, 우리말성경). 여기서 우리는 은사를 품위와 질서 있게 사용해야 모임에 평화가 깨지지 않고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중요한 원칙을 발견한다. 그리고 동시에 계시의 성격을 지닌 예언이 지금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명령했다(39절). 그땐 계시의 성격을 가진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언이 하나님께 직접 받아 말하는 계시를 포함한다면, 우리는 지금도 이 편지에 기록된 주의 명령에 따라 설교 중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가 있으면 설교를 멈추고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직접 우리에게 계시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고 계시지 않다는 사실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3)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명령은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지키고 있는 원칙이었다(33b-34절, 11:16). 많은 사람이 33b-35절을 나중에 추가된 영감받지 않은 내용 혹은 필사자의 실수, 바울의 가부장적 사상의 반영 등으로 “주의 명령”의 권위 밖으로 밀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성경은 일관성 있게 여자 성도의 품위와 단정함을 이렇게 묘사한다. 특별히 교회가 함께 모인 상황을 가정할 때, 여자 성도는 남자 성도를 가르치거나 그들을 다스리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딤전 2:9-15). 이렇게 하는 근거로 창조 질서를 말하는 데, 구원받아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인 교회 안에서 그 질서가 회복되어야 했다: 34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34-5절). 

성경은 여성 성도의 가치나 그들이 은사로 교회에 주는 유익을 평가절하하지 않는다. 여성 성도는 또 다른 여성 성도와 자녀들을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딛 2:4). 다만, 남성과 여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가르치는 은사를 사용할 때는,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남성 성도만 사용하도록 제한한 것이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남성 성도들도 품위와 질서를 따라야 했던 것처럼, 여성 성도들도 품위와 질서를 따라 자신들에게 허용된 자리에서 가르치는 은사를 사용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 교회가 화평을 이루고 은사로 교회 전체의 유익을 가져올 수 있었다.

3. 적용

시작부터 기독교는 신령한 것을 추구하면서 형식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했다. 유대교는 마음의 할례가 아니라 몸의 할례를 형식적으로 강조하는 인간의 종교로 변질됐고, 중세시대 기독교 역시 거듭난 신자가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령한 모임이 아니라 아무나 교회로 모여 짜여진 형식에 따라 예배하면 그만인 종교 시스템으로 변질됐다. 형식에 대한 우려와 경계심은 나아가 혐오로 발전하기 쉬운데, 말씀은 무형식, 무질서, 무제한이 신령한 것의 유익을 증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식, 질서, 제한이 신령한 것의 유익을 증진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령한 것을 주시는데, 사람이 어떻게 감히 그것을 제한하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의 명령으로 기록된 본문은 이렇게 답한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제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32-3절). 은사는 제제 없이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제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무질서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모든 신령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은 그 신령한 것으로 화평과 질서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렇게 하셔서 교회에 유익을 주신다.

교회가 함께 모일 때, 많은 제제와 질서가 요구된다. 만찬 예배를 인도하는 자리에 누가(남성 성도만 참여) 얼마나 참여하는지, 몇 분 정도가 적당한지, 어떤 주제의 찬송을 부를 것이며, 어떤 악기를 사용할 것인지, 누가 사회를 볼 것이며 어떤 순서를 따를 것인지, 찬양은 몇 곡이 적당하며 어떤 주제의 찬양을 선곡하고 어떤 방식으로 반주를 준비할 것인지, 어떤 곡의 특송을 제한하고 허용할 것인지, 누가 말씀을 전하고 설교자를 초청하거나 변경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그냥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놔두면 다 잘될 것이라는 이상은 현실에서 성숙하고 유익한 모임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고, 고린도 교회와 같이 질서와 평화가 깨어져 유익이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는 모임을 만들어 낼 뿐이다. 

품위와 질서가 없는 교회는 사실상 없다. 신령한 것에 아무런 제약이 없어야 한다는 헛된 바람 또한 그 원칙으로 품위와 질서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가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가지 합당한 방식과 질서를 통하여 어떻게 우리가 받은 성령의 은사를 사용할 것인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모든 성도가 각각 자기 은사를 활용하여 성도를 섬기는 봉사의 일을 하도록 돕는 데 가장 좋은 형식과 질서와 방식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방식을 주의 명령처럼 여기고 다른 방식으로 모이는 교회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우리만 하나님 말씀을 받은 것처럼 교만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회가 처음부터 경계해온 본질은 없고 형식만 남은 사람의 종교로 변질되는 지름길이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40절). 모든 시대 모든 하나님의 교회가 반드시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이 원칙이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하는 모든 신령한 일에 분명히 적용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