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모든 것에서 사랑을 빼면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1-3절
설교자: 최종혁
고린도전서 13장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인지 몰라도 ‘사랑은 …’으로 시작하는 말씀은 아마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한두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집에 말씀 액자를 만들어서 걸어두는 경우도 많고, 특히 결혼식에서 자주 언급되는 말씀이다. 사랑장이라고도 불리고, 사랑의 송가, 사랑의 찬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마도 시편 23편과 더불어서 가장 많이 암송하는 말씀 중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이 말씀이 그렇게 유명한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사랑’이라는 인류의 공통 관심사를 다루고 있고, 그 사랑의 가치에 대해서 또한 특징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게 때문일 것이다. 또한 서신서 중간에 등장하지만 매우 시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사로 한 찬양도 많이 만들어져 불려져오고 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저 사랑에 대한 찬가는 아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요?”라고 물어서 그에 대한 답을 하는게 아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랑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가르치거나 노래하려는 의도로 기록되지 않았다.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노래는 더욱 아니다. 물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그런 것들을 볼 수 있고 실제로 적용할 수 있다. 결혼식장에서 사용할 수 없는 말씀은 아니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는 이 말씀을 기록된 맥락 안에서 봐야 한다.
사실 고린도전서 13장은 은사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다루는 12장과 좀 더 구체적인 사안(방언과 예언)을 다루는 14장 사이에 조금은 뜬금없이 위치해 있는 느낌이 있다. 13장을 제외하고 읽어도 별 어려움 없이 문맥이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14장 1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은사의 활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교회의 사역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보다, 그것을 왜 하는지, 어떻게 하는지, 무엇을 위해서 하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는 이런 면에서 많은 문제를 겪었다. ‘무엇’을 하느냐, ‘무엇’을 얼마나 잘할 수 있느냐를 가지고 교회 안에서 분쟁과 다툼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교회 안의 분위기는 고린도 교회가 숫자적으로 부흥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적으로 어린 성도들이 교회 안에 많았고 아직은 가치관 등이 세속적인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특히 고린도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그런 도시가 아니었다. 고린도는 오래된 도시였지만 로마에 저항하다가 BC146년 경 파괴되어 거의 100년 간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BC44년 경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서 재건된 후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급속히 성장한 상업 도시가 되었다. 돈과 성공을 위해서 각처에서 다양한 민족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바울 시대에는 이미 50만명 이상이 거주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안정된 삶보다는 돈과 성공, 지금의 만족과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도시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고, 그래서 그런 삶을 ‘고린도화 되다’ 혹은 ‘고린도인처럼 살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고린도의 성도들은 그런 문화 속에서 구원을 받아 교회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런 문화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던 교회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고린도 전후서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죄의 문제들은 그런 세상의 죄가 교회에 그대로 들어왔거나 혹은 영향을 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을 죄의 핑계로 삼을 수 없고, 죄를 정당화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죄를 직면하는 편지들을 썼던 것이다.
여튼, 이들이 가지고 있던 성공에 대한 가치관과 경쟁심은 교회 안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의 시작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언변과 지식에 풍족했다. 놀란만한 일은 아니다. 고린도에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런 사람들이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교회의 장점이 되었겠지만, 세속적인 가치관은 그것을 교회의 단점, 더 나아가서 치명적인 약점이 되게 했다.
그것이 우리가 고린도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분쟁과 당파의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은사를 통해 섬기는 영역에 있어서도 고린도의 세속적인 가치관은 여실히 그 문제를 드러냈다. 그래서 12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중요한 원리를 가르쳤다. 은사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결국 모두가 서로를 유익하게 해야 한다. 그 은사는 자기가 원하는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또한 은사는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는 각자의 일을 하지만 하나의 몸으로서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인다.
그래서 29-3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묻는다.
고전 12:29–30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수사적인 질문으로서 당연히 답은 “아니다”이다. 그런데, 이 질문에 내포된 의미는 고린도 교회는 다 이런 은사를 가지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은사를 원했다. 바로 앞선 말씀에서 바울이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라는 말을 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12:22). 이들이 특정 은사를 더 중요한 은사, 더 뛰어난 은사, 더 나은 은사로서 선호했기 때문이다. 14장을 보면 특히 말하는 은사(방언과 예언)가 교회 안에서 무질서하게 사용되었던 것도 볼 수 있다. 다 그런 은사를 원했던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더 세워주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고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기보다 더 잘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질투와 시기심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 사람을 끌어내리고 싶은 마음도 생겼을 것이다. 어떤 성도를 누가 칭찬하면 속으로 나는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칭찬 받기 위해서 더 열심히 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세상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 투쟁과 경쟁을 통해서 서로 발전한다고 생각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다. 교회는 그렇게 세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열심은 교회를 무너뜨린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은 지금까지의 맥락에서 볼 때, 절대로 작은 은사와 큰 은사가 있고, 그 중에서 큰 은사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의미는 될 수 없다. 바울은 지금까지 그 사실을 부인해왔기 때문이다. 그럼, 무슨 의미로 바울은 이렇게 말했을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이 명령을 명령형이 아니라 서술형으로 보는 것이다. 이 경우 바울은 30절까지의 말씀을 정리하면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는구나, 하지만 내가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한 것이 된다. 충분히 가능한 견해다.
하지만, 그대로 명령형으로 읽어도 바울의 의도를 이해할 수는 있다. 자신들의 기준에서 더 큰 은사를 사모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참된 의미에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할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큰 은사”는 또 다른 어떤 은사가 아니라 그 은사가 정말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을 바울은 이제부터 보여주겠다고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둘 다 가능한 해석이고, 의미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현재 고린도 성도들의 은사(봉사)에 대한 개념이 크게 잘못되어 있었고 그것을 바로 잡아야 했다는 점이다. 그러지 않으면 은사를 활용할수록 교회는 더 무너져갈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손이 계속해서 말을 하려고 하고, 눈이 계속해서 냄새를 맡으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 부족했던 것은 은사가 아니었다. 부족한 것은 그 은사를 진짜 은사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랑이었다. 그들은 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섬기는지 알아야했다.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했다. 그래야 그들이 하는 모든 것들이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고린도전서 13장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특히 교회에서 열심히 은사에 따라서 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다. 가끔씩 설교자들은 설교를 하면 정말 들어야할 사람은 안듣고, 안들어도 괜찮은 사람은 열심히 받아적으면서 듣는다는 말을 하는데, 지금 이 말씀은 그렇지 않다. 이 말씀은 가장 일차적으로 열심을 가지고 교회에서 섬기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다. 어떤 면에서는 교훈을 얻어야 하고, 어떤 면에서는 책망을 받아야하기도 한다. 가장 안좋은 결론은 ‘그래, 난 이런 사랑이 없으니까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겠다’일 것이다. 그것은 이 말씀이 기록된 의도가 아니다. 이 말씀은 자신을 돌아보고 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은사를 따라 섬기고 있지 않다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랑이 부족하다면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통해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고 이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 사랑하며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럼, 이제 오늘 본문 1-3절을 보자. 오늘 이 말씀의 제목은 “모든 것에서 사랑을 빼면”이다.
정말 간단한 산수 문제를 내보겠다. 숫자 A에서 숫자 B를 뺐는데, 답이 0보다 크다면 둘 중에 큰 것은 무엇일까? A다. A에 비해 B는 그 답만큼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답이 0보다 작다면? A는 B보다 작고, 따라서 A에 일정 숫자를 더해야 B와 같을 수 있다. 만약, 답이 0이라면? A와 B는 같다.
오늘 설교 제목은 이 간단한 산수 문제다. 모든 것에서 사랑을 빼면 어떻게 될까? 이 문제의 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자. 답은 ‘0’이다. 모든 것에서 사랑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있다. 사랑이 모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언급하여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가장 좋은 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 있어서 나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떤 사람의 은사가 모든 단점을 희석시킬 정도로 크고 강력하면 사랑이 없는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가 추구해야할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하기에 앞서, 그에 반하는 모든 다른 생각을 먼저 차단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사랑을 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이 모든 것이다.
모든 언어에서 사랑을 빼면(1절)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먼저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그렇게 가지고 싶어하던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언어다. 특히 은사로서의 방언은 배우지 않은 언어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은사는 처음 성령님께서 믿는 자에게 임하셨던 오순절 사건 때 나타났었다.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들이 배우지 않았던 언어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크신 일에 대해서 말할 수 있었다(행 2장).
고린도전서 14:18을 보면 바울도 이런 방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전 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방인의 사도로서 방언은 바울에게 꼭 필요한 은사였기에 성령님은 그에게 이 은사를 주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방언의 은사를 고린도의 성도들은 모두가 갖고 싶어 했고 교회에서 사용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14장을 보면 바울은 특히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방언을 하는 것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고린도 교회가 이 특별한 은사에 과도하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도 말했다.
고전 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정도로 방언의 은사에 대한 고린도인의 관심은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27절 이하)을 보면 바울은 방언을 하려면 두 명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서 하고 반드시 통역을 할 것을 말한다. 바울 자신이 방언을 하지 못해서 질투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읽은 18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누구보다 방언을 더 말했다. 어쩌면 그런 바울을 보고 고린도 성도들도 방언을 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방언은 그들에게 있어 그야말로 제일가는 은사였다.
1절은 그런 방언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라고 덧붙인다. 실제로 천사의 말이 있는지 없는지, 사람이 그 말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방언이 천사의 말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다. 바울은 어쨌든 지금 가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모든 언어가 아니라 심지어 천사의 언어를 할 수 있다고 해도’라는 의미인 것이다. 한 우리나라 주석가는 우리가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의 할아버지가 와도 안된다”라고 말할 때와 비슷한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방언이 아니라 방언의 할아버지를 말할 수 있어도’인 것이다.
어쩌면 고린도 성도들은 이 가정만 듣고는 기뻤을지 모른다. 가정 만으로도, 상상 만으로도 좋았을 것이다. 정말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바울은 한가지 조건을 더한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에서 사랑을 뺀 것이다.
아마 고린도 성도들 입장에서는 김이 빠졌을 것이다. 바울이 뭔가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어느 정도의 기대를 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천사의 말까지 할 정도면 사랑이 없어도 좀 괜찮지 않을까?
아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바울의 의도는 분명하다. 사랑이 없으면 제 아무리 천사의 말이라고 해도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말이다. 고린도 성도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방언도 사랑이 없으면 시끄럽고 성가신 소음 공해일 뿐이다.
많은 학자들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당시의 우상 숭배에 사용되었던 악기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그렇다면, 바울은 결국 사랑 없이 행해지는 은사 활용을 우상 숭배와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 된다. 생각해 보면, 바울이 그것을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사실이다. 사랑 없이 행해지는 은사 활용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 되기 때문이고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4절부터 말하는 사랑의 모습을 모두 부정해 보라. 그것이 사랑 없는 모습이다. 오래 참지 않고 온유하지 않은 것이다. 시기하고 자랑하고 교만한 것이다. 무례하게 행하고 자기 유익을 구한다. 성내고 악한 것을 생각한다. 결국 모든 것이 나 중심이다. 자랑하기 위해 방언을 한다.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방언을 한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상황이든 아니든, 참지 않는다. 분노한다. 그러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14장에서 사랑 없는 방언의 모습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다.
고전 14: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아무리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은사를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이 사용된다면, 그것은 전혀 교회를 세우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가면을 쓴 우상 숭배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기뻐 들으시는 천사의 찬양이 아니라, 당장 멈춰야할 소음이다. 모든 언어에서 사랑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모든 능력에서 사랑을 빼면(2절)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이제 바울은 어떤 면에서는 방언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는 은사들을 언급한다. 고린도 성도들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이다.
먼저는 “예언하는 능력”이다. 14장을 보면 바울은 예언을 방언과는 다르게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왜냐하면 예언이야 말로 은사로서 교회에서 매우 합당하기 때문이다.
고전 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여기서 말하는 예언은 아무도 모르는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일에 대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말씀 사역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방언은 어떨지 몰라도 여기서 말하는 예언은 어떤 식으로든 시끄러운 소음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다.
더구나 바울은 여기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아는 것”를 덧붙인다. 여기서 바울은 1절에서 했던 것처럼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대를 뛰어넘어 상상의 영역을 언급한다.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아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그럴 수 없다. 세기의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학자도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 수는 없다.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으로서, (여기 표현을 그대로 따르면) 예언의 은사를 활용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지식의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 말씀을 준비하고 전할 때 그렇다.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으면 나 같은 사람은 설교를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 못해서 잘못 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항상 있다. 공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 뿐 아니라 성도의 삶에 정말로 딱 맞는 말씀을 해주고 싶은데, 내가 그렇게 말씀을 많이 알지도 잘 알지도 못해서 좌절할 때도 많다. 가질 수만 있다면, 정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싶다. 아마 설교자 뿐 아니라 말씀의 사역자인 모든 성도들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바울은 그런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끝도 아니다. 그냥 말만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믿음의 사람이어서 예수님의 말처럼 산을 옮길 수도 있다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이다. 말로만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뭔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로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삶이 변화되지 않을까!
정말 엄청난 능력이다. 이런 사람의 말과 지식, 그리고 믿음은 정말로 교회를 엄청나게 변화시킬 것이다. 은사자에 대해 이보다 더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이 정도면 사랑이 있든 없든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바울은 이어서 말한다. 그러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누구나 우러러볼 만한 사람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비밀, 모든 지식, 모든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모든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는 모든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떠들 수 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을 떠받들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 하냐고, 어떻게 그런 것들을 다 알고 있느냐고, 어떻게 그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고. 어떻게 그렇게 찬양을 잘 하냐고. 어떻게 그렇게 연주를 잘 하냐고. 어떻게 그렇게 아이들을 잘 대하냐고. 어떻게 그렇게 충성스럽냐고.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의 결과도 볼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의 결과로 사람들이 유익을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지만 너에게 사랑이 없으니,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모든 능력에서 사랑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아마 이쯤되면 편지를 읽던 고린도 성도들은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그럼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거냐.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되냐.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거냐. 나도 나름 사랑하면서 하려고 하는거다. 전 재산이라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줘야 사랑이냐. 아니면 누굴 대신해서 죽기라도 해야하는 거냐. 그런 반응을 예상한(?) 바울은 이제 3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헌신에서 사랑을 빼면(3절)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편지의 패턴을 알았기 때문에 3절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고린도 성도들은 설마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설마 이것도 사랑이 아니라고?
여기서 말하는 “구제”의 의미는 그냥 내 재산의 얼마를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내놓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표현은 조금씩 나눠준다는 의미를 가진다. “모든 것”으로 구제한다고 했으니 전 재산을 그렇게 나눠준다는 말이다. 전 재산을 구제 단체에 기부하는 것도 엄청난 자기 희생으로서 숭고한 일이다. 하지만 전 재산을 자신이 직접 조금씩 나눠주는 것은 차원이 다른 자기 희생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자기 재산의 전부를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다니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달한 것이다. 해외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직접 찾아가서 그렇게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만 해도 상상을 뛰어넘는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을 것이다. 후대에 이름 앞에 ‘성’이라는 글자가 붙을 수 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더 극단으로 간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주는 헌신이다. 여기서 바울이 의미한 것은 예수님을 위한 순교보다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그런 헌신일 것이다. 물론 그것도 예수님 때문에 하는 것이니 순교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를 대신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의인이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남을 위해 포기할 수 있다면, 그 희생은 사랑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예수님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요 15:13)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으면”을 덧붙인다. 이게 가능한가. ‘헌신’ 자체가 사랑이 아닐까? 극도의 자기 희생이 사랑 없이 가능할까? 가능하다. 누군가는 신념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 누군가는 명예를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 누군가는 복수심에, 증오심에 그렇게 할수도 있다. 의무감에 그렇게 할 수 있다. 이슬람을 생각해 보면, 자신이 원하는 천국을 위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친구를 위한 사랑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경우를 말씀하신 것이지, 단지 목숨을 버린 것이 그 사랑을 가장 위대한 사랑으로 만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사랑 없는 헌신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사랑 없는 모든 헌신은 나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나는 그냥 내 모든 재산을 의미 없이 소비한 것이고, 내 목숨을 의미 없이 버린 것일 뿐이다. 하나님 앞에서 “저는 저의 모든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습니다. 저는 제 목숨을 다른 사람을 위해 버렸습니다”라고 말해도 그것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그것으로 상급을 얻을 수 없다. 모든 헌신에서 사랑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도전
오늘 본문의 의미는 분명하다. 우리가 그 어떤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어떤 대단한 일을 하더라도, 정말 우리의 ‘모든 것’으로 최선의 일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 여러분이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 모든 일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모든 것에서 사랑을 빼면 0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렇게도 말했다.
고전 16: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사랑이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가 그들이 속한 고린도 도시와 다름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뛰어난 말주변도 아니었다. 엄청난 지식도 아니었다. 심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어떤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아니었다. 상상할 수 없는 헌신도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이 말씀을 기억해 보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무엇을 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사랑 때문에 하는지가 중요하다. 사랑으로 하는지가 중요하다. 사랑을 위해 하는지가 중요하다. 그것이 교회의 차이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얼마나 잘 하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더해져 있는지가 중요하다. 사랑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지만, 사랑을 더하면 모든 것이 된다. 사랑이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인 사랑이 대체 무엇인지, 어떤 모습인지는 다음 시간부터 살펴보자.
오늘 본문은 경고의 말씀이다. 아마 이 모든 사실이 암시하는 가장 무섭고 두려운 사실은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사랑 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 없이 하는 일에는 어떤 열매도 없을까? 그렇지도 않다. 사랑 없이 일해도 열매는 있을 수 있다. 정말 기가 막히게 노래를 잘하는 불신자 가수가 찬양을 부르면 아무도 감동 받지 않고 소음처럼 듣게 될까? 그렇지 않다. 사랑 없는 설교자가 복음을 전해도 구원 받는 사람은 있다. 변화되는 성도들이 있다. 심지어 그 설교 자체가 뛰어나지 않아도 구원의 열매는 있을 수 있다. 사랑 없이 구제하고 내 몸을 내어주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끝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사람들은 선지자로서 역할을 했다. 심지어 귀신을 쫓아 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했다고 착각했던 것이 아니다. 정말로 그런 일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을 한다고, 심지어 그 일을 잘한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 받은 증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열어서도 말씀할 수 있으신 분이시다. 악한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할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는 사랑 없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 자체로 안심하거나 그것으로 자랑하지 말라. 그것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나를 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도 안된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나를 만들지 않는다. 내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랑으로 하고 있느냐다. 따라서 내가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돌아보고 점검해야 한다. 사랑으로 한다면 그 모든 일들은 모든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랑없이 한다면 그 모든 일들은 아무 의미 없는 일들이 될 것이다. 이 경고의 말씀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더 좋은 길로 인도하여 우리 교회를 함께 세워갈 수 있게 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