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매주 교회에서 사랑을 이루라: 2. 사랑을 더하라
본문: 골로새서 3장 12-17절
설교자: 조정의
제자 훈련의 대가로 손꼽히는 故 옥한흠 목사님과 함께 부목사로 섬기며 제자 훈련을 배운 김대조 목사는 <넘어진 제자훈련 넘어서기>라는 책을 통하여 주님기쁨의교회를 개척한 후 처음 7년간 실행한 제자 훈련을 돌아보며 자기 잘못을 뉘우친다(국제제자훈련원, 2024). 2년 기간의 교리 교육 과정과 실미도에서 훈련받는 군사처럼 ‘작은 목사’가 되어 헌신적으로 일하도록 양성된 제자 중 선별하여 직분을 맡기자, 운영위원회를 만든 제자들이 찾아와 교회 운영에서 손을 떼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도 목사라고 하지 않았냐?’고 반박한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다. 김대조 목사는 자책하며 물었다: ‘지난 세월 나는 어떤 제자를 길러낸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한 자 그리고 사랑 받는 자로 택하신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그래서 매주 교회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참 제자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일한다. 머릿속이 성경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닮은 것은 아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맡겨진 일을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닮은 것은 아니다. 성경 지식과 사명감, 충성심 모두 유익하고 중요한 것이 될 수 있지만, 매주 교회에서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것은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은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용서, 평강, 감사 등 거룩한 특징을 갖는다. 교회 사역의 성공은 건물 크기, 사람 숫자, 관심도나 반응 등에 있지 않다. 교회 사역의 성공은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들이 그분의 거룩한 사랑을 얼마나 성실하게 실천하는가에 달려있다.
- 서로를 향하여 품어야 하는 마음: 긍휼, 자비
- 자신의 내면에 가꿔야 하는 마음: 겸손, 온유, 오래참음
- 우리의 관계를 견고케 하는 마음: 용납, 용서, 사랑, 평강
- 주님께 언제나 드려야 하는 마음: 감사
1. 서로를 향하여 품어야 하는 마음: 긍휼, 자비
먼저, 용이한 전달과 기억을 위해 구분했지만, 각각의 덕목은 분리할 수 없는 연합된 사랑의 거룩한 특성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불쌍히 여기는 자비와 겸손을 긴밀하게 연결하고(벧전 3:8), 용서와 평강을 이루기 위해 불쌍히 여기고 겸손할 것을 요구한다(엡 4:32, 빌 2:5). 또한 각각의 덕목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이신 것이고 우리가 바로 그 수혜자다(“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13절, “그리스도의 평강”, 15절). 그러므로 우리는 제자로서 주의 본을 받아 주가 주신 힘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이 거룩한 사랑의 옷을 입어야 한다: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17절).
먼저, 서로를 향하여 품어야 하는 마음을 살펴보자. 긍휼로 번역된 단어는 ‘창자’(행 1:18)로도 번역됐는데, 고대 사람들은 창자를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감정 담당 기관으로 여겼다. 오늘날엔 이를 ‘심장’이 대체했는데, 이 단어는 그래서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에서 사용됐다. 긍휼은 상대방의 처지와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원하는 끓는 마음이다. 자비도 비슷한 덕목인데, 히브리서 10장 28절에서는 같은 단어가 “불쌍히 여김”으로 번역됐다. 성도의 결핍과 필요를 알고 불쌍히 여겨 채우려는 마음이 자비다.
긍휼과 자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히 요구된다. 그분은 우리가 서로를 유익하게 하시려고 은사를 주셨고(고전 12:7), 우리는 긍휼과 자비를 가지고 서로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해 부지런히 애써야 한다. 일차적으로는 궁핍한 자에게 필요를 공급하고, 병든 자를 위로하는 일이 될 것이지만, 영적인 방황과 실족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에도 우리는 긍휼과 자비를 가지고 힘써야 한다.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
주님은 굶주린 무리(마 15:32), 병든 자들(마 20:34)을 불쌍히 여기셨고,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는 영혼의 궁핍함도 불쌍히 여기셨다(마 9:36).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크심을 나타내셨다”라고 말한다(엡 2:4-7). 주님은 우리가 죗값으로 목숨을 내놓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자기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가 이러한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사랑을 받았다면, 마땅히 서로를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옳다(요일 3:16). 당신은 긍휼과 자비를 옷 입고 섬겨야 한다.
2. 자신의 내면에 가꿔야 하는 마음: 겸손, 온유, 오래 참음
겸손과 온유 역시 대상을 두고 품어야 하는 마음이긴 하다. 하지만 내면에서 스스로 구축해야 하는 특성이 긍휼과 자비보다 더 강하다고 여겨 이렇게 구분했다. 겸손과 온유는 떨어질 수 없는 절친이다. 겸손 없이 온유할 수 없고, 온유하지 않은데 겸손할 수도 없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위치를 기억하고 기꺼이 그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온유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신 것들(권력, 재물, 지위, 힘, 지혜, 지식 등)을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할 줄 아는 힘을 말한다. 주님은 이것들의 완벽한 본이시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시면서 “내게 (그 마음을) 배우라”라고 하셨다(마 11:29). 그분은 자기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빵 한 덩어리도 만들지 않으셨지만,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겨 많은 음식을 만드셨다. 그분은 열두 군단이나 되는 천사를 호출하여 골고다를 초토화하실 수 있었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를 더욱 기뻐하셨기 때문에 그 권리를 내려놓으셨다. 겸손과 온유를 배울 때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 오래 참음이다. 우리는 높아지려는 교만을 억누르고 권리를 내세우고 싶을 때마다 참고 또 참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섬길 때, 얼마나 겸손과 온유가 필요한지 모른다. 최초의 교회, 예수님이 주와 선생으로 머리가 되신 12명으로 구성된 교회 안에서 그 소수의 성도가 얼마나 서로 높아지려고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싸웠는가?(인맥). 그러나 우리의 본이 되시는 주님은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셨다. 어떻게? 오래 참으며 그들에게 겸손과 온유가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매주 교회에서 당신이 하는 일에 이것들이 입은 옷처럼 보여야 한다.
3. 우리의 관계를 견고케 하는 마음: 용납, 용서, 사랑, 평강
다음으로는 우리의 관계를 건강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덕목들이다. 용납은 기본적으로 ‘참는 것’인데, 그냥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불만이 있더라도 그것을 견디고 있는 그대로 만족하여 받는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고린도 교회에는 서로 불만을 풀지 못해 법정 소송을 벌인 성도가 있었고, 믿음이 약한 자의 양심에 불만을 가져 자기 양심대로 자유롭게 우상의 제물을 먹으려는 자들이 있었다(고전 6:8, 8:11).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자매를 용납해야 했다. 죄와 허물투성이인 우리를 주께서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다면 우리도 서로 받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롬 15:7).
우리는 서로 용납하는 관계를 넘어 용서하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불만 거리가 있어도 참고 받아주는 것을 넘어, 죄를 지어도 그것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은 주님의 용서를 실천하라고 명령한다: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13절).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빚이고, 성도가 우리에게 지은 죄는 상대적으로 적은 빚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과 자비로 용서를 받았다면, 우리에게 죄지은 자에게 그런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우리는 성도를 용납하고 용서하지만, 때로 선별적으로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하기 쉬운 그리고 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평강이 우리 모두의 부르심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15절). 우리 마음은 특별히 나에게 상처 준 사람, 일하는 방식, 성격이 잘 안 맞는 사람을 향하여 평강의 마음이 아니라 판단과 정죄의 마음을 품기 쉽다. 가까이하고 친밀하게 대하기보다는 멀리하고 피하고 싶은 마음을 품는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 마음을 누가 주장하게 하라고 하는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15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을 이루기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으신 그리스도의 열심, 성도와 성도 사이를 하나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간절한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마음을 완전히 장악하도록 내어드리고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라.
마지막으로 사랑이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4절). 이전에 설명된 모든 것이 사랑의 거룩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외에 많은 것이 사랑에 포함된다(고전 13장). 그래서 본문은 다양한 사랑의 덕목으로 옷 입으라고 말하면서도 혹시나 여기에 빠진 것이 있을까 하여 “사랑”이라는 가장 큰 개념의 덕목을 모두 동원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고대 시대 사람이 입는 속옷과 겉옷에 띠를 매어 온전히 고정했던 것처럼, 앞서 말한 모든 것으로 옷을 입고 그것을 사랑으로 온전하게 매라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또 영원히 한계가 없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신다(요 17:23).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방식도 그래야 한다(요일 4:12). 언제나 미니멈이 아니라 맥시멈을 추구하라.
4. 주님께 언제나 드려야 하는 마음: 감사
주님께 언제나 드려야 하는 마음은 감사다: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15절). 앞서 우리가 살펴본 모든 온전한 사랑의 수혜자가 바로 우리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얻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용서하신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확증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결과로 우리는 평강을 누리게 되었다. 성경은 묻는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우리는 사랑 받는 자로서 서로를 사랑으로 섬긴다. 매주 교회에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한다. 우리의 사랑이 적다면, 우리는 받은 사랑을 그만큼 적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당신이 받은 사랑을 매주 교회에서 실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