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말세를 살아가는 당신에게

본문: 디모데후서 3장 1~9절

설교자: 이병권

 

여러분은 ‘말세다 말세야!’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주변에서 ‘말세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요즘은 잘 쓰지 않는 표현인 것 같은데 제가 어렸을 때에는 어른들이 한숨을 쉬며 ‘말세다’라고 하시는 것을 종종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말세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뉴스에서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범죄소식을 접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말세다 말세야’ 하며 혀를 차는 것입니다. 상식을 벗어나는 사건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을 한 것을 보면 세상이 정말 이상해지고 있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세”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사전적인 의미가 이러합니다. ‘세상이 혼탁해져 정치와 도덕과 풍속이 쇠퇴하며 악법이 성행하고 정의가 사라지는 시기‘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말세는 어떠할까요? 말세는 문자적으로 ‘마지막 날들’이라는 뜻입니다. 특정한 한 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때를 시작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체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세가 어느 정도의 기간이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 2천년이라는 말세의 기간이 지나고 있는데 언제 끝날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세를 생각할 때 주목할 것은 미래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세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미래가 아닙니다. 현재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미래가 아닌 현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것은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떤 시기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재 디모데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디모데는 이미 바울이 경고하는 말세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세를 살고 있는 디모데에게 바울이 이것을 명령합니다.

딤후 3:1 너는 이것을 알라

디모데를 향한 당부의 말입니다. 계속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늘 염두에 두고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잠깐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 단지 디모데만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자들 모두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바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 말세를 살아가는 당신이 알고 있어야 하는 것, 무엇입니까?

딤후 3: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말세를 살아가는 당신이 알아야 하는 것은 말세가 고통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여기 “고통하는”으로 번역된 단어는 ‘견디기 어려운, 다루기 어려운, 몹시 위험한’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사나운 야생동물이나 거칠게 요동하는 바다를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한 번 더 나오는데 가다라의 귀신들린 사람(거라사 광인)에 대해서 말할 때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야생동물처럼 사납고 난폭해서 사슬로도 제어할 수 없었고 아무도 그 길을 다닐 수 없었습니다. 마태는 그들을 묘사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마8:28).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고 알아야 하는 것은 말세가 고통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고통스럽고 위험한 시기, 견디기 어렵고 대처하기 힘든 시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그러합니다. 잠깐 고통스러운 때가 있다가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때가 계속 지속됩니다. 그리고 더 나빠질 것입니다.

내리는 비로 비유를 하면, 우리가 지금 맞고 있는 비는 잠깐 쏟아지다가 그치는 소나기가 아닙니다. 언제 그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염없이 계속 내리고 있는 장마와 같습니다. 잠깐 비를 피할 곳을 찾아서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내리는 비로 인해 무너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역사를 보면 훨씬 더 박해가 심했고 고통스러운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괜찮은 때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고통하는 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괜찮은 시기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고통하는 때를 육체적인 핍박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세가 우리에게 있어서 고통이 되는 것은 핍박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말세가 고통하는 때일까요? 시간이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은 왜 그럴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어지는 단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2절에서 5절까지, 왜 말세가 고통하는 때인지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2절을 보면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1절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2절에서 5절까지의 단락에서 말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알아야 하는 고통의 이유, 우리가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대비해야 하는 위험 요소가 무엇입니까?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딤후 3:2 사람들이

이 단락은 사람으로 시작해서 연이어 19개의 수식어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말세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사람 때문입니다. 진리를 떠난 사람들 때문입니다. 타락한 사람들, 악한 사람들, 죄의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 불경건한 사람들,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서 적대적인 사람들, 교회 안에 거짓을 퍼뜨리고 진리를 왜곡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바울은 19개의 수식어를 가지고 이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원인이 되는 죄의 목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정리하고 그 목록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 우리는 지금 말세를 살고 있습니다. 둘. 우리가 살고 있는 말세는 고통하는 때입니다. 셋. 말세에 고통하는 원인은 진리를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떠난 사람들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반대는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진리를 지키며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말세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특징을 알고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세에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딤후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딤후 3: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이 목록에 대해서 어떤 기준을 두고 분류하기가 어렵습니다. 주석가들 중에는 원어의 형태를 따라 나누기도 하고 특징이나 관계를 통해 나누기도 하지만 일부에 해당되는 것이고 목록 전체를 매끄럽게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임의로 분류하는 것보다 그냥 차례로 살펴보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목록이 아니니까 하나씩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 목록을 보면서 말세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러한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의 안락과 이익을 우선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수고하지 않습니다.

  1. 돈을 사랑합니다.

돈을 최고로 생각합니다. 돈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찾으려하고 돈으로 인생의 만족과 행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1. 자랑합니다.

여기 자랑한다는 말은 사기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랑하는 것은 허풍을 떠는 사기꾼이 되는 것입니다.

  1. 교만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교만은 멸망하는 사람의 특징이고 마귀를 닮은 모습입니다.

  1. 비방합니다.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깎아내리는 말을 합니다.

  1. 부모를 거역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가정을 무너뜨립니다.

  1. 감사하지 않습니다.

은혜로 받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권리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1. 거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선한 것들을 싫어하여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1. 무정합니다.

정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고 사랑을 베풀지 않습니다.

  1. 원통함을 풀지 않습니다.

양보하지 않습니다. 분노에 차서 계속 원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갚으려고 합니다. 속 좁고 옹졸한 모습입니다.

  1. 모함합니다.

다른 사람을 험담하며 소문을 만들면서 즐깁니다. 사람들을 이간질시켜서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1. 절제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 감정을 조절하지 못합니다. 인격적으로 바르게 설 수 없습니다.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 사납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늘 화가 나있고 건드리면 쉽게 폭발합니다. 언제 터질지 몰라 위험합니다.

  1.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악을 더 좋아하고 악을 따릅니다. 선을 따르는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세상과 어울리는 것이 더 편하고 좋아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1. 배신합니다.

유다를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넘겨줍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합니다.

  1. 조급합니다.

경솔하고 무모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 없이 함부로 행동하고 말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게 됩니다.

  1. 자만합니다.

연막을 친다, 연기를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만든 연기에 둘러싸여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1. 쾌락을 사랑합니다.

잠깐의 쾌락을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랑하고 삶의 우선순위에 둡니다. 그래서 쾌락을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보다 쾌락을 선택합니다.

이렇게 18개의 목록을 살펴봤는데, 그 시작과 끝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사랑”입니다. 잘못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간단하게 정리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합니다. 그것이 죄이고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말세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증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세에 나타나는 특징이 그러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면 안 되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 결과는 잘못된 사랑이 가져오는 고통입니다. 자신만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까지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더 남아있습니다.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말세에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마지막 특징은 외적인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내적인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 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예배에 참석합니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응답합니다. 겉으로 볼 때 괜찮아 보입니다. 경건해보이고 경건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실상은 아닙니다. 교회에서의 모습과 실제의 모습이 다른 것입니다. 속이 비어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서 이러한 열매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실속 없는 과대포장처럼 겉과 속이 다른 가짜가 많은 것입니다.

진짜는, 참된 신앙은 모양과 능력을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모양을 무시하지도 않고 능력을 부인하지도 않습니다. 진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겉으로 표현되며 삶으로 증거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신령한 척한다고 해도 가짜입니다. 속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사람을 미워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돌아서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피해야 합니다. 이같은 자들의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본받지 말고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거짓 교사와 같은 외식하는 종교인에 대해서는 피하지 않았을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생깁니다. 바울은 실제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딤후 3:6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딤후 3: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거짓 교사들은 교묘하게 사람들을 유인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몰래 이 일합니다. 그들의 주된 목표는 “어리석은 여자”입니다. 이 여자들은 부유했지만,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식 때문에 거짓 교사들이 전하는 가짜 복음에 쉽게 넘어갔습니다. 진리를 알지 못했기에 속아서 경솔하게 거짓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배우지만, 아무리 배워도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말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명령대로 이것을 알고 이같은 자에게서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악을 행하는 거짓 교사는 어떻게 될까요?

딤후 3: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딤후 3:9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속이며 거짓을 전하는 자들이 일시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많은 이단과 사이비 종교가 세력을 키우며 그들의 성공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 어리석음은 모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대적한 것과 그 부패한 마음과 믿음에 관하여 자격 미달이라는 것까지, 모든 사실이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모세를 대적했던 두 마술사 얀네와 얌브레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때때로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교회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세상의 타락한 문화와 방법으로 교회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는 자로서 세상을 살아갈 때 마음이 어렵고 괴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짓이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흔들릴 필요는 없습니다. 가짜는 잠깐 인기를 끌 수 있지만, 오래가지 않습니다. 잠깐 잘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영원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그 실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자만 말세가 끝나는 날에도 당당히 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저의 걱정은 세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오늘 본문의 나오는 말세의 특징을 볼 수 있지만, 때로는 교회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걱정이 됩니다. 하나님이 좋은 씨를 뿌린 밭에 마귀도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진짜도 있지만 가짜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믿음을 고백했지만, 여전히 세상의 가치를 따르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삶에서 열매를 찾을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부패한 마음과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볼 수 있지만, 그 능력은 볼 수 없는 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로 인해 걱정이 됩니다.

저의 걱정을 좀 덜어주시겠습니까? 그러면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어디에 속한 자인지, 나에게서 어떤 특징이 나타나는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진리를 떠난 사람들의 특징이 발견된다는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가 그러해야 했던 것처럼 이것을 알고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넘치는 악에게 휩쓸리지 않도록 고통이 따르더라도 맞서고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나의 노력이나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복음이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합니다. 복음이 사람을 새롭게 합니다. 잘못된 대상을 사랑하던 자를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합니다. 거짓된 우상에게 사로잡혀 있던 어리석은 인생을 구원합니다. 주님에게서 인생의 참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주님을 위해 살도록 합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이런 일을 합니다.

이것이 말세를 살아가는 당신에게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을 아십시오. 말세는 고통하는 때입니다. 하지만 고통을 피하지 마십시오. 고통을 피하면 고통 대신 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고통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죄를 피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가신 길은 죄를 피하고 고통을 만나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좀비가 나오는 영화를 한 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좀비가 나오는 영화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좀비가 되지 않으려고 도망가고 살기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이런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저렇게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그냥 좀비가 되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고통당할 필요 없이, 걱정할 필요 없이, 고생할 필요 없이 좀비들처럼 사는 것이 더 좋은 것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으로 적용하면 우리가 말세에 진리를 떠난 사람들처럼 고통을 피하고 편하게 살면 안 될까요? 사람이길 포기하고 생명이 없는 좀비처럼 사는 게 더 좋은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을 가진 자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생명이 없는 자처럼, 멸망으로 달려가는 자처럼 더러운 것을 좇아서 세상에 썩어질 것을 사랑하며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어떤 자인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당신에게 전하는 오늘 이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