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마땅히 두려워할 자”
본문 : 누가복음 12장 1~12절
설교자 : 조정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아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의 집에 점심초대를 받으셔서 바리새인에게 말씀보다 전통을, 본질보다 비본질을, 하나님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그 후 한 율법교사(서기관)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그들의 가르침이 본질에서 멀어진 규율로 짐 지우고 참된 진리를 배척하게 만들며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를 방해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이에 그들은 예수님께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었습니다(11:53-54). 그동안 수만 명의 군중들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습니다. 그 무리 속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군중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분류의 무리 중에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12:1).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마땅히 두려워할 자”라는 제목으로 여러분에게 전달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한 가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절)”라는 명령을 주셨고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셨고(2-3절)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방법을 말씀해주십니다(4-12절).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절)” 여기서 외식(hypocrisy)은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배우가 어떤 배역을 연기할 때 정말 그 사람인 것처럼 꾸며서 관객이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연기만으로는 그 사람이 본래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헌금 바구니를 돌릴 때 저는 주위 사람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제 속에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 좋은 평판을 얻고 싶은 마음,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진짜 내가 누구인가보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가지고 있었던 외식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에 대해서 “누룩”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누룩은 효모균, 이스트. 빵을 만들 때 쓰는 것으로 빵을 부풀립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실제의 모습보다는 남들의 평가에 의해 부풀려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평가된 모습이 거품일 뿐이라고도 합니다. 밀가루에 적은 누룩을 넣어도 그 누룩이 빵의 반죽 전체에 퍼져 빵을 부풀립니다. 누룩은 작은 양이지만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도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전 5:6; 갈 5:9)”고 말했습니다.

외식은 우리 신앙에, 내 삶에 침투해서 우리의 삶 전체에 퍼져 우리를 실제 모습과 다른 사람으로 만듭니다. 예수님은 너희 삶에 외식이 있는지 주의하여 지켜보고 경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러분 속에는 외식의 모습이 없습니까? 다른 성도들을 의식해서 행동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교회에서 받는 대접, 남들에게 보여지는 모습, 성도들의 시선에 더 신경을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러한 외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외식을 주의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모든 것이 결국 드러날 것(2-3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2절)” “감추인 것”은 “덮어 둔 것(흠정역)”, “숨긴 것”은 “숨겨 둔 것(흠정역)”으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외식적으로 하는 행위들은 나의 본모습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숨겨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들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3절)” 예수님은 “어두운 데서” 말한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모든 것이 들리고 전파될 것이라고 대조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결국은 너의 참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1-12)”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진짜 누구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외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우리가 감춰 두고 숨겨 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고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짜 우리가 누구인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낱낱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계시록에서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미래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살았던 모습대로 하나님 앞에 직고하고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외식은 임시방편적인 행동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성도들 앞에서 위대한 성도, 사회에서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를 받을지라도 나의 본모습이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나의 진실되지 못한 말과 행동, 숨기고 더 나은 평판을 얻으려는 시도,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으려는 노력은 무의미하게 되고 실체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드러나게 될 그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식을 주의하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4-12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외식을 피할 수 있는지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령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왜 인간이 외식에 빠지는지 관심을 가지고 외식의 본질을 다루고 계십니다. 왜 우리는 외식을 할까요? 왜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를 신경쓰고 그들의 기준과 기대에 부응하려고 할까요? 외식의 뿌리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fear of man)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외식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할지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얻으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불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나를 평가하는 기준, 나의 행동을 규정하는 기준, 내 앞에 서 있는 것은 “다른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내 삶을 규정짓고 내 삶의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사람 앞에 “하나님”을 두고 살아가게 만드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두려워하는것)입니다(전 12:13). 그것이 모든 지혜의 근본(잠 1:7)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앞에 두고 그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사람”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외식이라는 문제의 본질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죄는 하나님의 자리에 피조물을 두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말합니다(롬 1:23).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을 두고 살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고 외식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바뀐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하십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5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두려워할 자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4-12절에서 우리가 외식을 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아버지:4-7/아들:8-9/성령:10-12)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심판자와 주관자이시고 아들 하나님은 대언자, 중보자, 구원자 역할을 하시며, 성령 하나님은 능력을 베푸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권세가 모든 사람의 권세를 초월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4절)” 4-5절을 ‘사람들은 너의 생명을 빼앗을 뿐이지만 하나님은 너를 지옥에 보낼 수 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내용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이 무척 강압적이고 협박조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작부터 예수님은 “내 친구 너희에게”라고 부르십니다. 부드럽고 친밀하고 따뜻한 표현으로 뒤에 이어지는 내용의 의미를 전달해줍니다. 이 세상에는 몸을 죽이는 자가 있습니다. 우리 생명을 해치고 우리를 위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두려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음 이후의 삶을 어찌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진 동일한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보다 더 권세 있는 자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몸을 죽인 후에 그 영혼을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자이십니다. 이생뿐 아니라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두려하지 말고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을 두 번이나 강조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은 사람의 권세를 초월하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은 몸만 죽이고 영혼은 어찌할 수 없는 사람과 다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지옥에 보내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신 32:39)” 제자들의 목숨을 빼앗을 자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자들의 목숨을 뺏는 자들을 영원히 지옥에 보내는 권세가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러니 그분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더 권세있으신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해야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심판자와 권세자이실 뿐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6-7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6절)” 그 당시 시장에서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렸습니다. 두 앗사리온은 1/16 데나리온으로 하루 일당의 1/16입니다. 200 원~3000원 사이의 가격으로 시장에서 가장 값싸게 팔리는 물건, 시장에서 파는 번데기나 오뎅처럼 가장 저렴하게 팔리는 하찮은 품목(한 마리를 따로 팔지 않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한 마리도 하찮게 여겨지지 않으시고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7절)” 하나님은 너희의 머리털까지 다 세고 계시고 너희를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사람들보다 단지 능력만 크신 것이 아니라 인자와 긍휼이 넘치시는 하나님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7:2, 118:1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2)”,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18:1)”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권세는 지극히 미약하고 제한적이나 하나님은 사람의 권세를 초월하는 능력으로 영원무궁한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직 그 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아들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8-9절)” 하나님의 사자들(천사들: angelon)은 천사들입니다. 마태복음의 똑같은 장면에서 예수님은 다른 표현이지만 동일한 장소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마태복음에서는 보다 분명하게 ‘내 아버지 앞에서’라고 표현하십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예수께서 시인하실 때 증인들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시인하면 내 아버지 앞에서, 수많은 천사들 앞에서 너희를 시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많은 무리 속에서 예수님을 인정하고 살 때 예수님도 천사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제자들을 인정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주를 시인하는 삶과 부인하는 삶은 무엇일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을 연구한 주석가 그랜트 오스본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우리의 온전한 헌신이 요구된다.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다른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기를 바라거나, 진리의 대변자가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침묵한 체 사회 속에 흡수되거나, 그들의 비기독교적 문화의 가치 체계를 수용하는 것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세상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밝히지 않고 제자로서의 헌신된 삶을 살지 않고 이 세상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도덕적이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을 살고 다른 이들과 복음을 나눌 기회를 찾으며 어려운 이들을 돕고 정의의 편에 서며 이웃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며 그들 자신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삶과 자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높은 요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더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부정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도 수많은 천사들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부인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반대로 만일 너희가 사람이 아닌 오직 나를 두려워한다면 나도 너희를 시인하고 대언자가 되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수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돌을 들고 달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계신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바로 그 분을 온전히 두려워함으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을 두려워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부정한다면 아버지 앞에서, 수많은 천사들이 보는 가운데 너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시지만, 나를 시인하면 나도 너희를 시인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10-12절에서는 성령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10절)” 초대교회 시대에는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자밥이 되거나 순교를 당하고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극심한 고문 가운데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받아들여야할 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10절에서는 분명히 말로 인자를 거역한 자는 용서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막 3:28-29)”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무엇일까요?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증언하시고(요 16:14),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요 16:8).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말씀과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에게 비추셨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셨으나 그것을 거절하는 자의 결국은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 모독의 죄는 특별한 죄의 항목이 아니라 끊임없이 들려지는 진리와 하나님의 역사를 거절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성령의 권능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셨을 때 그 능력을 부정하고 귀신의 힘을 빌려서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렇게 진리를 거절하는 자들의 결국은 용서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11-12절)” 예수님은 성령에 순종해 살던 그리스도인이 회당, 위정자, 궨세 있는 자 앞으로 끌려갔을 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너희가 두려워하는 인간의 심판대 앞에서도 너희와 함께 계셔서 너희를 인도하고 도우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우리는 권세있는 자들 앞에 섰을 때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 안에서 영원히 함께 하시는, 그 순간에도 너희에게 말할 바를 알려주시는 성령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참 불쌍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만물보다 뛰어나 보이지만 인간처럼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는 존재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우리 마음이 옥죄이고 억압받습니다. 교회 안에서, 세상 속에서, 사람들 앞에 살아가는 삶이 쉽지 않고 두렵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고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으며 내 말과 행동이 사람들 때문에 좌지우지되기도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입맛에 맞춰서 종교적인 삶을 살아갔고 외식쟁이로 변질되었습니다. 외식이 누룩처럼 그들의 신앙과 삶에 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외식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시면서 하나님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능력의 심판자이시며 인자와 선으로 너희를 대하시니 오직 그 하나님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신경쓰지 말고 내가 하늘 보좌에서 너희를 대언하고 있으니 나를 경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영원토록 매순간 너희와 함께 하시니 그 성령님을 두려워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설교에 대한 성도님들의 평가가 제 삶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두려운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삶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대로 좌지우지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판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나의 참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앞에 사람을 두지 마시고 하나님을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