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두 사건에 하나의 비유를 더하면
본문: 누가복음 13장 1~9절
설교자: 이병권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사건과 사고를 접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일들을 내가 직접 경험할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다른 사람이 겪은 일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요즘은 정보매체가 발달해서 정말 쉽게 다른 사람의 소식을 접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건이나 사고를 뉴스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정말 많은 뉴스들이 매일같이 쉬지 않고 쏟아집니다.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안타까운 사고들,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사건들, 그리고 우리를 염려하게 만드는 일들, 그렇게 우리는 다양한 뉴스를 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런 뉴스들, 갖가지 사건과 사고들, 어려운 일들, 세상의 불의들, 끔찍한 범죄들, 타락한 모습들, 세상의 이런 어두운 모습들을 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인데 누가복음에만 있는 내용입니다. 간략하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단락은 두 사건을 통한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이고, 둘째 단락은 그 말씀을 강조하기 위한 예수님의 짧은 비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두 사건과 하나의 비유’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럼 오늘의 질문입니다. 두 사건에 하나의 비유를 더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두 사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1)
오늘 본문은 “그 때 마침” 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엄청난 사건을 보고합니다. 12장에서 예수님이 여러 말씀을 하시고 난 후 바로 그 때에, 그 기가 막힌 타이밍에 사람들이 와서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지금은 스마트폰을 누르면 언제든지 쉽게 다양한 소식을 접할 수 있지만, 이 당시에는 그런 때가 아닙니다. 큰 사건이나 사고가 있으면 사람들이 직접 소식을 전했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사람도 사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전한 소식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왜 죽임을 당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로마에 대항했던 반란군하고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이 그렇게 큰 이슈가 될 수 있을까요? 특별히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전할 만큼 중요한 뉴스였을까요?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반역자를 죽이는 일은 흔히 있었던 일입니다. 빌라도가 험악하고 평판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뉴스가 될 만한 일일까요? 문제가 뭘까요? 여기에 보면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장면이 생각되십니까? 제가 처음에 생각했던 빌라도의 모습은 사람의 피와 제물의 피를 함께 항아리에 담아서 큰 주걱으로 휘젓고 있는, 그러면서 주문을 외우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해리포터나 만화에 나오는 장면 같았습니다. 여기 빌라도가 그런 모습일까요?
여기 말씀에서 “섞은 일”이라고 번역된 ‘섞다’라는 말은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것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갈릴리 사람들의 제물이 죽임을 당할 때, 그 때 갈릴리 사람들도 죽임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갈릴리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저 멀리 이스라엘 북쪽에서부터 오랜 시간 걸어서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그리고 성전에서 자신의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때 빌라도의 군사들이 와서 이 갈릴리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래서 제물의 피와 이 사람들의 피가 함께 바닥에 쏟아져 섞입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중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끔찍하고 비극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히 모독적인 일입니다. 우리 상황으로 생각하면,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있을 때 일본 군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독립군하고 관련이 있다며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무참히 죽이는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뉴스가 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벌어진 이 참혹한 일은 많은 사람들을 통해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분노가 치밀지 않겠습니까? ‘감히 우리를 그런 식으로 대하다니! 성전을 더럽히고 제사를 모독하다니!’ 예수님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뜨거운 뭔가가 울컥하지 않았을까요?
지금 예수님께 이 사건을 전한 사람은 무엇을 기대하며 왔을까요? 예수님도 죽임을 당한 사람들과 같은 갈릴리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로 기대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무리가 이분을 따르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분,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실 분, 옛적에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평화와 안녕을 가져다 줄 분, 그 메시아가 그들 앞에 계십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빌라도가 이런 끔찍한 일을 하다니,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이 분이 메시아라면, 이 일을 두고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거야!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어내자!’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2-3)
이 무슨 반응이 이렇습니까? 예수님의 반응은 이래야 되지 않을까요? ‘감히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다니, 내가 혼을 내주겠다. 나를 따르라’ 아니면, 좀 양보해서 ‘때가 되면 빌라도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기다려라’ 아니면, 좀 더 양보해서 ‘희생당한 이들의 가족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자’ 적어도 이런 대답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언제나처럼 이것을 통해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그 때 마침’ 등장한 사람들이 전한 이 사건을 통해서, 지금까지 하신 여러 말씀들에 대한 적용을 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모든 듣는 자에게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경고가 어떤 것보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먼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일깨워 주시는데,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심판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아주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불행한 사고, 갑작스러운 재난이나 비참한 죽음은 심각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들과 같이 끔찍하게 죽임을 당한 일은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했고, 이 심판을 이끌어낸 그들의 죄는 심각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한계를 넘어선 그들의 죄를 하나님이 심판하신 거야!’
오늘날 교회도 비슷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재난이나 사고를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기보다 오히려 정죄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죄의 결과로 받는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예수님은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사고를 당하거나,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각자 자기 죄로 인해 사고나 재난을 당한다면, 우리는 몇몇 사람이 사고로 죽는 일로 놀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계속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더 놀라야 할 것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욥의 경우를 생각해봤을 때도 욥은 영문도 모른 채 엄청난 고난을 당하며 괴로워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모든 것이 그가 범한 죄의 결과라고 욥을 정죄합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욥의 친구가 틀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일깨워주시며 추가로 하나의 사건을 더 언급하십니다. 그러면서 똑같은 말씀을 한 번 더 반복하며 강조하십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4-5)
실로암은 예루살렘 성벽의 남쪽과 동쪽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못이었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주민은 물론,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의 쉼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있던 높은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여러 사람들을 통해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대부분의 사람이 이 사건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건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뉴스거리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뉴스가 될 만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근래의 몇 달 동안 이처럼 관심을 가지고 뉴스를 주목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탄핵이라는 큰 이슈가 정리되면 나아질까 했는데 뉴스는 여전히 계속됩니다. 세월호 인양 소식, 대선 후보들의 이야기, 대통령의 구속, 끔찍한 살인 사건, 전 세계에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뉴스를 주목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의하지 않으면 그런 소식들이 주는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함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뉴스를 통해 나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밖을 주목하면 할수록 안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좇다보면 나 자신을 놓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 그 사건을 바라보고 평가하느라 나 자신을 살피고,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따지며 다른 사람의 잘못에 분노하는 동안, 나의 잘못을 점검하며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은 바깥을 지나치게 주목하느라 내 안을 들여다보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그들이 한 일에 대해서, 그들이 당한 사고와 재난을 생각하면서도, 정작 나의 인생에 대해서, 나의 죽음에 대해서, 나의 종말에 대해서는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분노하며 정의를 외치지만 막상 나의 죄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안을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뉴스가 주는 함정에 빠져 바깥으로 시선을 빼앗겨 나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키는 일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자신을 점검한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구나!’ 어느 책의 제목처럼 이렇게 탄식합니다.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 너 안에 하나님이 없다’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내 안을 들어다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자인지, 내가 얼마나 자격 없는 자인지,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무너진 내 마음에, 절망하고 있는 나에게, 정말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심판 받아야 하는 악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자신의 상태를 살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회개하라’ 예수님은 두 사건을 통해 같은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사람마다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회개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다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곳은 멸망입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으면, 돌이키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그 멸망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조금 빨리 도착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오래도록 살다가 조금 늦게 도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 차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멸망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시간과 비교했을 때, 이 땅에서의 몇 십 년 차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은, 회개 하지 않으면, 돌이키지 않으면, 그 영원한 멸망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부터 외쳤던 메시지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단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회개하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의 여러 소식을 들을 때, 먼저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여 너희에게 임할 심판을 피하라‘
그럴 때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을 회개해야 하지?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합니까? 그것은 ‘열매 없음’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가르쳐주십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6-9)
예수님의 비유는 이러합니다. 한 포도원의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3년 동안 기다리며 열매를 구했는데 열매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열매 없는 이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열매 없는 나무 때문에 땅을 낭비하는 것보다 그 땅에 다른 나무를 심어서 열매를 거두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주인을 설득합니다. 자기가 거름을 주며 나무를 잘 관리할 터이니, 올 한 해만 더 시간을 달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기대되는 것은 열매입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믿는 자의 열매는 성경 전체에서 다양하게 언급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요약하면 열매는 ‘변화’입니다. 삶의 변화, 인격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생각의 변화, 전과는 다른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기대되는 것은 그에 따르는 변화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목표를 가지고,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다르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여전히 모든 것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면 어떨까요? 사는 것도 똑같고, 생각하는 것도 똑같고, 좋아하는 것도 똑같고, 모든 것이 똑같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열매 없는 나무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 구원이 어떤 것입니까? 이 땅에서 성공하는 것이 구원입니까? 나를 위해서,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살다가 죽어서는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입니까?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하니까 좋습니다. 그 천국은 받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부담되는 것들은 거절합니다. 이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니까 안심하며 내 마음대로 삽니다. 이게 구원인가요? 성경 어디에서 그렇게 말합니까? 아닙니다.
2015년 통계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20%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종교 란에 ‘개신교’라고 체크하는 사람이 10명 중에 2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가 왜 이렇습니까? 온통 잘못한 사람만 있습니다. 서로의 잘못을 비난하며 지적하기에 바쁘지만, 정말 회개함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어떤 나무입니까?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 시간이 지나면서 달리지고 있습니까? 나의 삶이, 내가 돈을 쓰는 목적이, 나의 가치관이, 내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 내 생각이, 나의 말과 행동이 점점 바뀌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흐름에 따라 적당히 어울려 살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바깥에서 찾으며, 다른 것으로 핑계를 대며 변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 이야기를 주목하느라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지금 어느 때보다 나라 안팎으로 시끄러운 이때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마땅히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하며, 내가 더 주님을 닮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내 삶에 열매 없는 것을 회개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인생의 끝을 맞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열매 없는 나무를 찍어버리라 하실 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포도원지기는 일 년의 유예기간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신속히 지나갈 것입니다. 그런 후에도 여전히 열매가 없다면, 결국 찍어버려질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있습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열매를 맺을 시간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회개 없이는 죄 사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겸손히 회개함으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보혈이 여러분을 깨끗하게 씻겨줄 것입니다.
이미 이전에 회개한 분이라 할지라도 회개는 필요합니다. 회개는 구원받은 사람이 가지는 삶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는 회개할 일이 계속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자주 넘어집니다. 그것이 우리의 탄식이 되지만, 하지만 깊은 탄식이 있는 그곳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회개함으로 주 앞에 나아갑니다. 또 다시 힘을 내어서 죄를 미워하고, 더욱 주님을 사랑하기를 다짐합니다. 그렇게 날마다 회개하며 돌이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믿음의 선진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천국 문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회개하리라”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드렸던 질문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두 사건에 하나의 비유를 더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이 두 사건에 하나의 비유를 더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신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회개함으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비유로 끝이 나는데, 비유에 대한 결말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열린 결말로 끝이 납니다. 열매 없는 나무가 후에 열매를 맺었는지 아니면 찍혀버려졌는지 모릅니다.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드는 이런 열린 결말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결말입니다. 여러분의 결말은 어떻습니까? 아직은 그 결말이 열려있습니다. 아직 열려있는 결말, 그 결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써내려가고 계십니까?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필립 헨리의 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에 관한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만일 내가 강단에서 죽어야 한다면 회개를 전파하다가 죽을 것이며 강단 밖에서 죽어야 한다면 나는 회개를 실천하다가 죽고 싶다.”
우리의 짧은 인생, 그 인생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전과 다른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뿐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날마다 내 욕심을 버리고 내안에 성령님이 역사하시도록 살겠습니다. 주님을 만날 날을 기대하며 회개를 실천하며 그렇게 살겠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 용서받은 내가 계속 용서를 구하며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나를 살피며, 계속해서 회개함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살기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