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당신 입에서 나오는 열매 Part.5 “온유하게 말한다”
본문: 잠언
설교자: 조정의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모든 열매에 맛이 있듯, 말에도 맛이 있다(어감≒말맛). 어떤 사람의 말은 정확하고 분명한 맛이 난다. 어떤 사람의 말은 조심스럽고 신중한 맛이 난다. 거칠고 쓴맛이 나는 말이 있고, 부드럽고 달콤한 맛의 말이 있다. 당신의 말은 주로 어떤 맛을 내는가? 여러 가지 맛이 있겠지만, 온유한 말/과격한 말,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보자.
잠언은 “유순한” 말(15:1)을 높이 평가한다. 말맛으로 평가하면, 부드럽고(25:15) 달콤한 맛이다(16:24). 유사한 표현으로 “온순한 혀”(15:4)가 있는데, 이는 잠언에서 자주 “양약”으로 해석됐다(12:18; 13:17; 16:24). 온유한 말은 단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실제로 듣는 이를 치료하고 회복하는 효능이 있다.
한편 “과격한 말”은(15:1) ‘상처 주는 말’, ‘다치게/아프게 하는 말’이다(15:4). 잠언은 이를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하는 말이라고 했다(12:18). 온순한 말에 치료 효능이 있다면, 과격한 말은 “독”처럼 듣는 이를 병들게 한다(10:11). “맹렬한 불” 같이 화를 끼친다(16:27). 말할 때 종종 윽박지르거나 날이 서 있거나 거칠게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등 과격한 말맛을 내는 자를 아는가? 상처받기 싫어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1. 과격한 말의 뿌리
왜 우리 입에서 과격한 말이 나오는 걸까? 모든 말은 마음이 맺는 열매다. 입이 거친 이유는 마음에 다음과 같은 악이 가득하기 때문이다(마 12:34-35). 네 가지 정도만 살펴보겠다.
① 교만: ‘내가 너보다 권위가 있어’
과격한 말을 습관처럼 하는 사람도 대부분 때와 장소, 대상에 따라 말을 온순하게 할 줄 안다. 보통 자신보다 지위나 권력이 있는 사람에겐 유순하게 말한다. 자신의 신변과 이익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에겐 온유한 표현을 사용할 줄 안다. 무슨 뜻인가? 만만하기 때문에 과격한 말을 쏟아낸다는 것이다. 남을 낮게 여기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는 것이다. 나이 차가 많이 날수록, 사회적 지위 차이가 크게 날수록 과격한 말이 쉽게 나온다(약 2장,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여 말하는 문제).
② 반항심: ‘나는 너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
또 어떤 사람은 유독 자기 위에 세워진 권세에게 함부로 말한다. 같은 위치나 자기 아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살뜰히 챙기고 아끼면서, 이상하게 권위를 가진 자에게 반항심을 가지고 억세게 말한다. 반항심은 교만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를 인정하지 않거나 마땅히 하나님 말씀대로 권세에 순종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요구하셨다(롬 13:7). 특별히 위에 있는 권세를 향해 과격한 말을 하는 것은 모든 권세를 정하신 하나님께 반항하는 심각한 교만의 죄다.
③ 이기심: ‘너의 유익보다 나의 유익이 먼저야’
과격한 말은 지극히 이기적인 말이다. 상대방이 내 입에서 나오는 독이 담긴 말에 어떤 상처를 입게 될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과 감정을 시원하게 쏟아내거나 내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얻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명령하면서 그 대신 이타적인 말을 낼 것을 요구한다. “오직 덕(유익)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과격한 말은 성경의 요구를 정확히 반대로 성취한다. 듣는 자의 이익은 뒷전이고 자기 유익을 위해 더러운 말을 먼저 쏟아낸다.
④ 분노: ‘네가 나의 분노를 자초한 거야’
대부분 화가 나서 과격한 말을 쏟는다. 마음에 가득한 분노를 말로 표출하는 것이다. 열이면 열 모두 상대방이 원인 제공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는데, 화가 나지 안 나?’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폭언을 정당화한다. 온유한 말로 맞서면 나를 유약하고 만만하게 여길 것이 분명하니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강한 사람만이 온유한 말을 낼 수 있다. 분노는 자기 권리를 내세운다. 절제되지 못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말과 행동으로 다 쏟아낸다. 하지만 온유는 하나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자기감정을 절제한다. 정당한 권리가 있어도 이기적인 목적으로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셨다(벧전 2:23).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악이 과격한 말을 맺는 뿌리가 된다. 뿌리부터 열매까지 분명히 죄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과격한 말 하는 것을 가볍게 여긴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지’, ‘그렇게 뱉고 나야 속병이 안 생겨.’
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은 단 하나로 요약된다.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롬 13:9). 당신의 말맛도 반드시 사랑의 말맛이 나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 안에서 말할 것’을 명령한다(엡 4:15).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라. 사랑은 교만하지 않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 사랑은 온유하다(고전 13:4-7). 그러므로 당신의 말은 반드시 온유해야 한다.
2. 온유한 말의 모범
온유한 말을 누구에게 배울 수 있을까? 주변에 제법 온유한 말맛을 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한계가 있다. 마음이라는 컵 밑바닥에 옛 성품이란 오물이 남아있는 한, 휘저으면 시간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더러운 게 올라온다. 어떤 상황이나 대상을 만나면 과격한 말이 더 쉽게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내게 온유를 배우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겸손(교만):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공생애 가운데 그분이 하신 말씀을 통해 충분히 입증됐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받으셨음에도 피조물인 사람과의 대화에서 자기의 권리를 이기적인 이유로 내세우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한낱 피조물 주제에 감히 하나님인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죽고 싶으냐?’
순종(반항심):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열두 살에 주님은 자기를 찾으러 온 부모와 함께 고향에 내려가 그들을 “순종하여 받드”셨다(눅 2:51). 예수님은 부패한 유대 종교를 크게 꾸짖고 책망하셨지만 그들의 요구에 따라 성전세를 내셨다(마 17:24-27). 로마 공권력에 굴복되실 분이 아니었지만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권세를 주셨음을 인정하셨다(요 19:11). 예수님은 세상을 완전히 뒤집는 혁명을 일으키셨지만 반항심에서 비롯된 과격한 말과 행동을 통해 하지 않으셨다.
이타심(이기심): 예수님은 자기 유익을 위해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온유한 사랑을 끝까지 보여주셨다. 그분 입에서 나온 가장 온유한 말 중 하나는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였다(눅 23:34). 대부분 신과 자기 앞에 있는 사람들을 저주하며 과격한 말을 퍼붓다 죽는 죄수들과 차원이 달랐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 부른다. 철저히 자기희생적이면서 이타적인 사랑이 아가페 사랑의 특징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아가페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셨다.
긍휼(분노): 예수님은 정의와 공의에 따라 소멸하는 불처럼 분노하시는 분이지만, 분노가 자기를 통제하도록 놔두지 않으셨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가장 분노에 찬 말씀을 하시는 대상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는데, 단지 화가 나서 그러신 게 아니라, 그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유대인 종교 시스템의 중심부인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예수님은 화를 내신 것이 아니라 우셨다. 그들을 날개 아래로 다시 품으려고 회개를 외치신 것이 몇 번이냐고 물으시면서 끝까지 그것을 원하지 않았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우셨다(눅 13:34).
이처럼 주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께 온유와 겸손을 배울 수 있다. 그럴 때 우리 입에서 과격한 말이 그치고 온유한 말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분의 온유와 겸손을 배울 수 있을까?
3. 과격한 말을 그치고 온유한 말을 하는 법
과격한 말을 자주 사용하는 이들을 보면 악당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남에게 상처 주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저렇게 거친 말, 강한 주장, 억누르는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속 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은 대로 다 쏟아내는 사람들이 마음에 오히려 쉼이 없다. 어떻게 하면 내 권리를 찾을 수 있을까? 남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을까? 인정받을 수 있을까? 나의 유익을 얻어낼까? 계속해서 육신이 원하는 것에 억눌려 무거운 짐 진 것처럼 수고하고 또 수고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육신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고 더욱 얽맨다. 폭정을 휘두른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게 배우라”라고 하시기 전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약속하신 것이다(마 11:28). 어떻게 하면 쉼을 얻을 수 있을까? 주님이 말씀하셨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멍에를 메고 배우는 삶은 제자의 삶이다. 예수님은 지금 육신의 노예로 살고 있는 죄인들을 초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라고. 그리스도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다. 그분을 주인/선생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은 쉼을 얻는 삶, 자유로운 삶이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의 인정을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사람 앞에서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없다. 주님은 낮은 자를 큰 자로 보신다. 남의 유익을 나의 유익보다 앞세울 때, 손해 보는 게 아니다. 주님이 더 크게 보상하신다.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오래 참는 것은 억울한 게 아니다. 주님이 다 아시고 칭찬하신다.
그러므로 보다 깊은 차원에서 과격한 말을 그치고 온유한 말을 하려면 단순히 나쁜 말 금지, 예수님처럼 선한 말만 하기 연습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흉내 내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분의 제자로서 그분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을 계속해서 맛보는 것이 핵심이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사셨는지 알면 알수록 그분의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나의 보배가 되신다면 우리는 사람에게서 내 욕구를 채우기 위해 과격한 말을 내뱉지 않을 것이다. 우리 영혼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을 계속 맛볼수록 우리는 그분을 진심으로 닮아가기를 원할 것이다.
당신 마음에 다음과 같은 옛 성품의 욕구가 치솟을 때, 이렇게 답하라.
*교만(내가 너보다 권위가 있어) → 겸손(주님은 나에 대한 모든 권위가 있으셔)
*반항심(나는 너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 → 순종(나는 항상 주님의 권위를 인정해)
*이기심(너의 유익보다 나의 유익이 먼저야) → 이타심(주님의 유익이 곧 나의 유익이야)
*분노(네가 나의 분노를 자초한 거야) → 긍휼(난 주님을 위해 너의 악을 선으로 갚을 거야)
미국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대통령 당선 후 각료를 선출하면서 얼굴을 봤다고 한다. 태어날 때 얼굴은 타고나지만 자라면서 얼굴은 그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항상 맞는 건 아니지만 선한 사람은 선한 얼굴, 악한 사람은 악한 얼굴로 변해가는 일반적인 원칙이 있는 게 사실이다.
얼굴은 좀 억울한 면이 있지만, 말은 핑계할 수 없다. 당신의 말맛은 당신의 인성과 성품과 신앙을 보여준다. 화가 나면 언제나 과격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자일 수가 없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과 친밀한 사귐을 오래 가질수록 당신의 말도 온유와 겸손의 맛을 내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