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당신은 새사람을 입었습니까?
본문 : 골로새서 3장 12-17절
설교자 : 조정의
골로새서 강해가 이제 다섯 번 남았습니다. 다섯 번을 다 하고 나면 12월 25일 성탄절을 앞둔 12월 22일 주일이 되는데요, 총 다섯 번의 남은 설교 중 오늘부터 앞으로 네 차례 하게 될 설교는 모두 “새사람을 입는 것”과 관련된 설교입니다. 제목은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주제는 모두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당신은 새사람을 입었습니까?” 교회 편이고, 다음 주는 가정, 그다음 주는 직장, 마지막 네 번째는 사회 편을 다룰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한동안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새사람을 입는 것에 관해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새사람을 입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육체의 죽음의 분명한 목적입니다. 골로새서 1장 22절을 보시면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새사람을 입는 것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자기 육체에 괴로움과 고난을 채우면서까지 간절히 이루고자 했던 일입니다. 골로새서 1장 28절에 바울은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감옥에서 골로새 교회에게 이 편지를 쓴 목적도 이와 같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새사람을 입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고(2:3),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기 때문에(2:9),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집니다(2:10). 누구든지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으면 절대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나는 것입니다(2:19).
지난주에 우리는 옛사람을 벗는 것에 관해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당연히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전에 속했던 이 땅 곧 세상의 초등학문,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사상, 자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는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습니다(3:5, 9).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입던 옷을 벗는 이유가 새 옷을 입기 위함인 것처럼, 옛사람의 행위 곧 죄를 벗어버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사람을 입기 위함입니다. 알콜 중독자를 치료할 때 더이상 술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절제와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처럼, 암이 완치되었다는 판정을 내릴 때, 단지 암 조직을 제거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시간 검진 결과 온전히 건강한 몸이 되었다는 판단에 근거를 두는 것처럼, 옛사람을 벗어 버리는 것과 새사람을 입는 것은 둘 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성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입어야 하는 새사람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2-17절까지 우리는 네 가지 입어야 할 새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그리스도의 사랑, 평강, 말씀, 이름). 모두 “그리스도”가 붙습니다. 본문을 읽고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의 사랑(12-14)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절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2절의 시작이 “그러므로”인 것은 옛사람을 벗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앞으로 설명할 새사람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는(2:10) ‘그러므로’ 이와 같은 새사람을 입는 것이 마땅합니다. 옛사람을 벗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12-14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새사람은 한 마디로 사랑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시면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하는데, 이 사랑이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 매주 월요일 저는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데, 크고 작은 종이 쓰레기를 묶지 않고 들고 나가면 금방 바닥으로 하나둘 쏟아져 결국 다시 정리해야 합니다. 그때 끈으로 묶으면 다양한 크기의 종이 쓰레기가 균형 있게 한 묶음으로 딱 잡혀서 쏟아지지 않고 쉽게 버릴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사랑이 바울이 12절에 말한 모든 덕목을 균형 있게 잡아주어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 바울은 앞서 옛사람의 행위를 다섯 가지로 요약한 것처럼 12절에서 다섯 가지 덕목(긍휼, 자비, 겸손,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을 이야기합니다. 이 다섯 가지 덕목이 사랑으로 온전히 매여 있기 때문에 저는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새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균형 있게 묶여있는 덕목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긍휼입니다. 긍휼이라고 표현된 이 단어는 ‘창자’라는 의미도 갖고 있는데(행 1:18), 그만큼 사람의 가장 내밀한 부분, 깊숙한 부분에서 우러나오는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의미합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하나이며(눅 1:78),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신 긍휼의 풍성하심에 따라 다른 사람, 특히 다른 성도를 깊이 동정하고 공감해야 합니다.
다음은 자비입니다. 자비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며, 톰 라이트의 말에 따르면 ‘타인을 향한 그리스도적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적 태도 곧 그분의 자비하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주는 가장 자비하신 분이십니다(약 5:11). 예수님께 받은 친절과 사랑을 기억하면서, 다른 성도에게 똑같이 베푸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꼭 입어야 할 덕목, 자비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톰 라이트는 겸손을 ‘자기 자신을 향한 그리스도적 태도’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자신을 본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리스도 앞에서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모두가 함께 품어야 할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인데, 하늘부터 이 땅까지,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겸손의 마음입니다(빌 2).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대하든지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각각 나보다 남을 낫게(more important) 여겨야 합니다(빌 2:3).
온유는 연약함과 부드러움을 의미하지만,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힘과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면서 갖는 부드러운 태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9). 그리스도인은 다른 성도를 대할 때 항상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오래 참음은 분함과 노여움을 보이는 자들에 대하여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영생 얻는 자들에게 오래 참음의 본이 되십니다(딤전 1:16). 세상이 점점 악해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 많아지는데도 하나님은 주의 날이 오기 전까지 오래 참으며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오래 참고 계신 것입니다(벧후 3:9). 그리스도인이 바로 이와 같은 오래 참음을 서로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아야 합니다(살전 5:14).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이 덕목은 바울이 골로새서뿐만 아니라 자기가 쓴 거의 모든 서신서에 즐겨 사용한 덕목이면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묘사할 때 나오는 덕목이기도 합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언급한 성령의 열매에도 이 덕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진지하게 자신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베푸신 것과 같은 깊은 동정심을 성도에게 베풀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베푸신 친절과 같은 자비를 성도에게 베풀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겸손과 온유를 입고 성도를 대하고 있는가? 나의 권리를 기꺼이 내려놓고, 인정받고 대우받고 싶은 권리를 포기하고 성도를 나보다 낫게 여기며, 나를 낮추고 다가가는가?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오래 참아주시는 것처럼 성도를 오래 참아주는가?
모든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성도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새사람,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12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바울이 골로새 성도를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옷 입고”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별을 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으라고 명하시는 새사람 즉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이미 충만하게 경험하고 맛보고 얻은 것으로, 우리는 단지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른 성도에게 그대로 전해주는 것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받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든 다른 성도에게 주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다른 성도를 향한 사랑이 부족하다면, 성령 하나님께 구하여 그리스도의 풍성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일깨워주시고 맛보게 하시며 충만하게 채워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베푸신 사랑, 그 충만한 사랑으로 옷 입고 성도를 대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 사랑을 성도에게 베풀 수 있을까요? 13절에 그 구체적인 적용이 나옵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여러분, 교회는 불만이 없을 수 없습니다. 불만 제로인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구원받은 죄인들이 모인 곳에 어떻게 불만이 하나도 없을 수 있겠습니까? 성도가 한 말에 상처받습니다. 성도의 행동이 눈에 거슬립니다. 때로는 성도의 독특한 성격, 태도, 습관, 심지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새사람을 입은 사람의 모습일까요?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피차”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용서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히 10:17). “너 그때도 그랬잖아”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용서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잊는 것입니다. 기억날 때마다 떠오를 때마다 적극적으로 신실하게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도를 그렇게 용서해야 합니다. ‘너 그때도 그랬지’가 아니라 ‘그때 이미 용서했지’라고 말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완전히 제거하셨습니다(골 2:14).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만천하에 공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미 용서한 성도의 죄를 다른 성도에게 알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용서한 죄가 그 성도의 평판을 깎아 먹고 다른 성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를 가져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9). 그리고 빛 가운데 다시 친밀한 사귐을 갖게 하십니다(요일 1:7).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도를 용서했다면 예전과 달라진 서먹한 관계, 용서는 했지만 피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나서 우리를 피하거나 예전과 다르게 대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의 용서도 성도와 관계 사이에 어떤 장애물도 남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새사람,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옷입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 그리스도의 평강(15)
15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두 번째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새사람은 그리스도의 평강입니다. 15절의 핵심 단어는 ‘주장하다’인데, 이는 운동경기를 통제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다스리는 심판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심판이 없는 축구 경기를 생각해보십시오. 양 팀에서 반칙을 할 때마다 서로 주장하고 싸우고 완전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성도의 관계 속에도 심판이 필요합니다. 그 심판의 이름은 “평강”입니다. 성도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고 의견 차이가 분명히 있더라도 ‘평강’은 모든 성도를 중재하고 사이좋게 지내게 하여 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입니다(갈 3:28).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평강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성도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다스리도록 하십시오. 마음에 평강이 부족하다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빌 4:7).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십시오(롬 12:18).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요 20:21). 그리스도의 평강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의 말씀(16)
16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입어야 할 새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16절에서 명령어는 ‘거하다’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옷 입으라’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기를 간절히 기도했고 그렇게 하려고 매우 힘썼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채워지는 것은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아뢴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 바울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등 직접 방문하지 않은 교회의 성도들이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고 얼마나 힘쓰는지 그들이 알아주길 바랐습니다(골 2:1-2). 그리고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옷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성도가 함께하는 두 가지 일에 말씀이 역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첫째, 성도가 서로 교제할 때 모든 지혜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에 말씀이 역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의 바른 복음, 바른 교리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권면은 잘못된 것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는 가르침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말씀 충만한 교제가 되어야 합니다.
지혜의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가득한데,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세상적, 미신적 사상과 지혜로 채워지도록 놔둘 수 있겠습니까? 부모와 자녀 사이에, 어른과 젊은이 사이에, 특별히 디도서 말씀에 따르면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 사이에 주고받는 교제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한 가르침과 권면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성도가 함께 예배하는 일에 말씀이 역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억지로 구분하기 어렵지만, 시는 성경(구약-시편, 신약)에 바탕을 둔 노래들, 찬송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노래, ‘노래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발적인 작품들(자작곡)로 구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다양한 방식과 모양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고 노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중 찬양의 매우 중요한 목적 하나를 발견합니다. 성도가 함께 찬양하는 것으로 서로에게 풍성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바르고 풍성한 가사가 담긴 회중 찬양을 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찬양을 부를 때 가사가 담고 있는 풍성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다른 성도에게 그리스도를 향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감사와 찬양을 힘 있게 격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성도의 교제 가운데 말씀의 가르침과 권면이 있으려면, 성도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때 말씀의 선포가 확실히 교회 가운데 울려 퍼지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바이블 타임, 성경 일독, 설교 시간, 개인 QT, 오디오 성경, 성경 읽기 모임, 오후 성경 공부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풍성히 채우시기 바랍니다. 매일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매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4. 그리스도의 이름(17)
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마지막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새사람의 옷은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바울은 처음 세 가지 구체적인 새사람의 옷을 설명한 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명령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17절 말씀이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7절 말씀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처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무엇을 하든지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명령입니다.
결국 로마서 13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명령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옷 입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 평강, 말씀으로 옷 입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는 말속에는 그리스도를 대표한다는 의미와 그리스도의 권한을 받아 행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십니까? 그러면 당신이 하는 모든 말과 하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를 대표해서, 그리스도의 권한을 받아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주 예수를 대표하고 있다면 정말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내가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라는 권한을 주셨는가?”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여러분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성품에 합당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옷 입는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자녀가 되바라진 말을 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면 부모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옷 입고 그 옷을 더럽히지 않고 오히려 빛나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옷 입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옷 입고 그리스도를 보배롭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영광 돌립니다. 바울은 “감사”를 계속해서 강조했는데, 15절에서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고, 16절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독려하며, 마지막 17절에서도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그리스도인은 감사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하나님을 알되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영화롭게도 아니했던 자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에나 일에나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감사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그런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입니다.
죄 많고 슬픔 많은 세상에서 수시로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감사가 도저히 흘러나올 수 없는 사망의 골짜기를 만날 때도 종종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습니다(벧전 2:25).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1, 6)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평강,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충만하심을 맛보며 부족함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