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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답을 아는 자들의 당연한 삶
본 문: 로마서 11장 36절 – 12장 2절
설교자: 최 종 혁
“이 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 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 안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는 다른 말로 하면 ‘삶의 목적’, ‘삶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주변의 사물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습니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 하늘은 왜 파란지, 하늘에 반짝이는 것은 무엇인지 묻곤 합니다. 그러다가 청소년기가 되면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갖고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됩니다. 자아정체성이 확립되는 시기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그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 놓았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답 찾기를 포기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모든 인류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해 왔던 질문, ‘나는 누구인가’, ‘왜 살아가는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의 목적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인류 공통의 과제에 대한 답
사 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전까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것을 성취하시는 과정,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장에 와서, 이 사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11 장 33-36절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 이 말씀은 이사야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그것이 얼마나 깊고 풍요로운지 우리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결정과 계획 뿐만 아니라 그 계획을 이루시는 방법(길) 또한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많은 진리를 발견하지만 그것의 목적이나 이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이런 일을 왜 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누 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34)” 이 말씀 역시 이사야서에 등장합니다.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뇨(사 40:13-14)” 누가 하나님의 상담자가 될 수 있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가르침이나 지도를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35)” 이 말씀은 욥기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11)” 누군가에게 무엇을 빌리는 것은 나에게 부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해서 무엇을 빌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 나님의 지식과 지혜, 계획을 이루시는 것을 알 수 없고 누구도 하나님을 가르치거나 상담자가 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 무엇을 빌려드릴 수가 없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36)” 여기서 말하는 ‘만물’에는 해와 나무가 포함되고 우리가 숨쉬는 공기가 포함되며 우리 자신이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주에게서 나오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은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주로 말미암고” 있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햇볕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비와 태풍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수많은 자연 현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한 만물이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의 끝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사 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조론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기 쉬운데,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시라는 것을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그분을 통해 살아가고 있으며 결국 그분께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36)” 우리의 존재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되었으므로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모 든 인류가 오랜 세월 가져왔던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성경은 이미 그 답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떠나서는 삶의 목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요 즘 같은 세상에 이 사실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강조하는 가치가 나의 행복, 자아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삶의 기준이 나의 행복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은 어디에 있나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갈 때 우리에게 참 행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위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창조 받은 목적에 따라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답을 아는 자의 당연한 삶
어 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일까요? “그러므로 형제들아(12:1)” 여기서 말하는 ‘형제들’은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즉 존재의 목적을 인정하는 사람들이고, ‘답을 아는 자들’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1)” 우리는 외모가 뛰어나거나 무엇을 잘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하는 마음이 있게 마련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1)”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사업이 잘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LA에서는 사업을 하려면 일단 교회를 다녀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업장마다 두꺼운 성경책을 장식처럼 꽂아놓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에 나가야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하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하늘나라에 가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필요와 만족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만질 수 있는 피부와 살이 아니라, 시간과 재능 등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가리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을 죽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세의 율법 아래서 죽은 동물의 제사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표시였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언약 아래 있습니다. 제사장은 우리 모두이고 제물은 우리 자신입니다. 죽은 동물이 아닌 우리들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순종의 마음에서 나오는 제사입니다.
아 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들에게 나무를 지게 하고 자신은 불과 나무를 들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으로 갑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제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고민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 리는 ‘거룩’이라고 하면 머릿속에 하얀 천사가 떠오르고 성스러운 분위기가 연상됩니다. 성경을 열심히 보는 것이나 암송을 많이 하는 것,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분리’와 ‘구별’입니다. 거룩의 반대말은 ‘불결’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 ‘평범한 것’입니다. 즉,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평범한 그릇 중에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면 그것이 거룩한 그릇이고, 수많은 빵 중에 하나님께 드리면 그것이 거룩한 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인 것은 피조물과 완전히 구별된 분이기시 때문입니다. 위대하신 속성이 피조물들 가운데 나타날 때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우 리의 거룩함은 이 세상에서 당연하고 평범하며 일반적인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답을 아는 자들이 살아야 할 당연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당연한 삶의 방법
“너 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2)” 이 구절을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면 “본받게 되지 말고”입니다. 돈이나 명예를 중시하는 이 세상의 가치관은 우리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살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박히게 됩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인 양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이 세상의 신인 사단이 세상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참된 것, 즉, 하나님의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보지 못하고 있으면서 마치 보는 것처럼 하나의 문화와 가치관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자신의 몸을 사단에게 드려왔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롬 6:13)” 이제 그것을 본받는 삶을 당장 그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사단에게서 오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고행을 하거나 자살폭탄테러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2)”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화하셨을 때 예수님의 겉모습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가려졌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변화를 받아’라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구원받을 때 우리는 의로운 신분이 되지만 우리의 실제 삶은 그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분에 맞는 상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 의로운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정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기준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 리의 사고 기준은 세상이 주는 가치관이었고 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으면서 우리는 존재의 목적을 알게 되었고 모든 사고의 기준이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 뜻을 분별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여 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말했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뱀은 어떤 사실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1:2-3)” 하와의 대답은 비슷하지만 사실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보지 못하고 조금 다르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의심을 갖기 시작한 여자에게 결정적으로 말한 것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간단한 의문을 가진 뒤 부인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결국 말씀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예전에는 동성애가 세상에서도 거절 받았지만 지금은 성적 소수자라며 인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나 자신’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너희 자신을 부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데 많은 것들이 사단으로부터 오는 잘못된 것들입니다. 우 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선택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답을 찾은 우리, 존재의 목적을 안 우리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인 간은 존재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 답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다른 사고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그것에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이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분이 있다면 이제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여러분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계신 분들에게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답을 아는 사람으로서 마땅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여러분의 삶을 드리고 계십니까?
구 원받기 전과 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고 구원받은 후에는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혹시 세상 속에서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해 거룩한 삶을 포기하고 계십니까? 학교나 직장에서 식사하기 전에 짧게 기도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계십니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함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자녀양육의 목적이 그저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직장에 좋은 배우자를 만나 남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입니까? 세상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르치게 하기 위해 여러분에게 자녀를 맡겨주신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거룩한 삶으로 여러분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땅한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