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능력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본문 : 누가복음 4장 38~44절
설교자 : 최종혁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1-2장을 통해 예수님이 어떻게 이 땅에 오셨는지, 3-4장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사역을 시작하셨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들로서 선포되셨고 시험을 이기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그 후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예수님이 자라신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오십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아주 중요하고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21). 바로 그 전에 예수님께서 이사야 선지서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 ‘성취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이 말씀이 성취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듣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하셨던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야, 구원자,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너희 귀에 나를 통해 이뤄졌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번도 내가 메시야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여기서도 구원의 날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이 지금 나를 통해서 되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내가 구원자다’ ‘내가 재림예수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해낸 사람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말을 그 삶으로 가르침으로 행하신 일로 증명하셨습니다.
‘구원자’라는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것과, 그가 그 어려움에서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두 번째로 다른 누군가가 그의 어려움을 안다는 것, 알고서 그를 도와주고 싶어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조건을 충족할 때 그를 ‘구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라고 할 때, 세상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어려움에 빠져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그 상황을 알고 돕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정말 그런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 배우기를 원합니다.
누가는 세 가지 영역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시는지 가르쳐줍니다. 첫 번째로, 38-40절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두 번째로 41절 말씀에서는 예수님은 악한 세력으로부터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지막으로 42-44절 말씀에서는 예수님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38-40).
여기 모든 인류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바로 질병입니다. 우리는 의학이 발달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고 했던 병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함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완전히 정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병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 병에 이렇게 하면 낫는다는 병도 별로 없습니다. 원인을 모르거나 해결방법을 모르는 병이 많습니다. 대개 치료한다는 것은 드러나는 증상을 완화시켜서 어느 정도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환자 당사자의 육체적 고통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는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계시던 그 당시에는 어땠을까요? 지금이라면 충분히 관리 받을 수 있는 질병 때문에도 죽어가는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질병은, 그 원인을 몰랐기 때문에 ‘신이 노했다’, ‘악한 영이 들렸다’고 쉽게 판단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이시라면 그들을 질병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렇게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38절에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오셔서 시몬의 집에 가셨습니다. 회당의 모임은 12시를 전후해서 끝났습니다. 예수님도 가르치시는 일을 끝내고 회당에서 나와서 시몬 베드로의 집에 식사를 하고 쉬시러 가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곳에 들어가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마태와 마가도 기록했지만 누가는 특히 “중한 열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병이 아주 심각한 경우에는 죽기도 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열병에 붙잡혀 괴로워하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그 장모를 위해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구합니다. 예수님이 의사도 아닌데 왜 예수님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구했을까요?
사람들은 바로 전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나가는 것을 목격했고 그 소문이 근처에 금세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병도 고칠 수 있으리라 믿고 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심한 열병이라는 어려움이 처해 있었고 그것에서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 병을 고쳐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고쳐주고 싶어 하셨을까요? 그럴 능력이 있으셨을까요? 그렇습니다.
39절 말씀에 보시면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라고 했습니다. 마치 인격체를 꾸짖는 것처럼 병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신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예수님이 ‘가까이 서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 부분을 “그의 손을 만지셨다”라고 기록했고 마가는 “나아가사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자가 병석에 누워있었고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셔서 그 여자를 보시면서 손을 잡아서 일으키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고 40절에서는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기록들에는 말씀만으로 고치신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접촉을 통해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냥 말씀만 하셔도 되는데 왜 이렇게 번거롭게 하셨을까요?
하나는, 만일 예수님이 말씀으로만 고치셨다면 그곳에 있었던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은 알았겠지만 그 병이 어떻게 나았는지는 몰랐거나 오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병자를 만지고 잡으신 경우에는 예수라는 사람을 통해 그 병이 나았다는 인과관계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병자를 향한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표현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병을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5장에서는 나병환자가 나와서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할 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깨끗함을 받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원하시면 손을 대지 않아도 그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었지만 굳이 손을 내밀어서 나병환자,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도 힘들어했던 그에게 손을 대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향한 긍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13장에서는 18년 동안 귀신들려 몸을 펴지 못하는 여자를 안식일에 고치셨습니다. 그 때 회당장은 ‘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느냐 하루만 기다려서 내일 고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라고 물어보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하루라도 빨리 고쳐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긍휼들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엘리야처럼 이적과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 각각의 아픔이나 고통을 돌아보고 치유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치셨고 여자는 감사의 마음으로 시중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특징은 즉각적으로 치유되었고 완전히 회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누워있던 사람이 회복되었다고 해서 바로 걷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병을 고치셨을 때 즉시 병이 나았고 즉시 회복되었습니다. 여자는 병이 낫는 그 순간 바로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즐거움으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질병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40). 예수님은 안식일 아침에 회당에 가셨고 점심에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으며 이제 저녁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안식일이 지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무거운 물건을 들지도 않고 먼 거리를 가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해가 질 무렵에 간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빨리 병 고침을 받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온갖 병자들이 다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으시고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가진 어떤 질병이든지 고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차별하지 않고 동일한 능력과 긍휼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무한했습니다. 능력을 사용한다고 줄어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다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이적을 통해 헤어 나올 수 없는 질병이라는 고통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41). 여기 우리 인류가 가진 또 다른 문제가 나옵니다. 그 문제는 인류가 악한 세력, 귀신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갔다고 하는데, 다른 번역본들을 보시면 ‘귀신들도’ 나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병을 고치는 것과 귀신이 나가는 것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병든 것과 귀신들린 것이 같이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누가는 여기서 구분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질병과 영적인 질병을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귀신’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관점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귀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가 전부이고 영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귀신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관점에선 귀신, 영적인 세계에 대해 인정하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시각에서 바라봅니다. 사람이 한을 품고 죽으면 세상을 떠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인 세계와는 다릅니다.
성경은 귀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귀신은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해서 타락했을 때 많은 수의 천사들이 하나님께 대적했습니다. 그들이 귀신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 귀신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많이 활동했던 시기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와 사도들이 활동했을 때입니다. 귀신들은 사람들을 사로잡아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다른 시대에 타락한 천사들은 무슨 일을 주로 합니까?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보면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이 악한 세력들이 이 세상에서 주로 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것처럼 사람들도 그들의 길을 따라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그 일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에 대해서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했고 바울도 사탄을 “공중의 권세잡은 자”,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진 않지만 이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세상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자라면 이 타락한 천사들에게서 우리를 건져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귀신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성경은 귀신들이 나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질병을 고칠 수 있을 뿐 아니라 악한 세력, 귀신도 쫓아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41절 후반부를 보시면 예수님은 그들의 말함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는 악한 세력들 위에 있었습니다.
귀신들은 그냥 나가지 않았습니다.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34절에서도 “나는 당신이 누군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이 귀신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도덕적으로 뛰어났던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놀라운 일을 성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귀신들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41절에서 보시면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고 말씀하십니다. 귀신들이 틀린 것을 말한 것도 아닌데 왜 예수님은 그들을 잠잠하게 하셨을까요?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혼란을 원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왔고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상황입니다. 그 곳에서 귀신들이 나가면서 소리를 지르는 혼란을 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증언을 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에 대해서 거짓말쟁이이고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신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들이 증언할 때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야기되는 혼란을 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을 통해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 즉 예수님이 그들이 원하는 일들을 해주실 분이라고 오해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원하셨던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행하시는 일, 성품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그 분 앞에 나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내가 그리스도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권위 있는 말씀을 하셨고, 능력을 보여주셨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주시고 가르치셨지만 단 한 번도 내가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알고 그 앞에 나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와 능력이 타락한 천사들과 관계가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후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에 대해 나쁘게 말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귀신들의 입을 통해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허락하셨다면 사람들에게 오해의 여지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상황들을 배제하신 것입니다. 귀신들과 예수님이 관계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육체의 질병을 이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악한 세력보다 강한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의 구원자이십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나타나서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동을 받습니다. 그가 기적을 행합니다. 병자를 고칩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냅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을 본다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 사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구원자로 오신 분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42). 예수님은 늦은 시간까지 일하셨지만 날이 밝자마자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기 위해 가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고 있다가 한적한 곳에 계신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합니다. 앞서 예수님이 나사렛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과 다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지만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어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놀라운 이적을 행하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예수님의 능력을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했던 속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던 이유는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육체의 필요를 예수님께서 채워 주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왕을 원했던 것입니다.
여기 가버나움 사람들도 예수님을 찾아간 이유가 이와 같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 이적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정말 하시고자 하셨던 말씀,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5절에서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육신의 필요를 위해서 예수님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예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문제의 현상이 해결되는 것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까? 왜 악한 세력이 우리의 삶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까? 그 근본적이 원인은 우리 안에 있는 ‘죄’입니다. 병에 걸리면 여러 증세가 나타납니다. 감기에 걸리면 기침, 열이 나고 콧물이 흐릅니다. 치료는 그 증상들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병에 걸린 원인 그 자체를 해결해서 증상들은 자연스레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치시고 악한 세력을 쫓아내는 이적을 통해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궁극적인 사명을 ‘복음 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냄을 받았노라 하시고”(43). 예수님은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적인 이유는 단지 병 고침과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고 그것을 위해 보냄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잘살고 병들지 않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가진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44)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 위에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 우리 육체의 구원자이실 뿐만 아니라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자이시며, 우리 죄로부터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소위 말하는 치유의 일을 하는 분들과 다른 점입니다.
단지 이 땅에서 잘 살고 병 낫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예수님이 가진 목적이셨다면 믿는 자들은 건강하게 잘 살라고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메시지의 핵심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너희가 이 땅에서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너희 영혼의 문제, 죄의 문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갈 길을 정해서 그 길을 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나라들 중 한 곳에 속해 있습니다. 사탄의 통치 영역에 살든지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흑암의 권세 아래 살면 그들을 따라 멸망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분의 주권 아래 살면 하나님의 나라로 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를 이 사탄의 권세에서 건져내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죄의 문제의 유일한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 사회, 정치를 생각해보십시오.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제대로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 사회가 아닌 사람들이, 우리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죄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해결한다고 해서 그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좋은 정치, 사회를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신 예수님께 영원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면 그분을 영혼의 구원자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셨다면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전하며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