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누가 하나님을 비웃는가?
본문: 누가복음 16장 14~18절
설교자: 조정의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비웃음 당해본 적 있습니까? 비웃음을 당하면 기분이 상합니다. 비웃음에는 나에 대한 경멸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비웃음에는 어떤 사람 또는 그의 행동을 터무니없거나 어처구니 없다고 여겨 얕잡거나 업신여기는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은 높이 여기고 남은 낮추는 태도입니다. 그러니 비웃음을 당하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살아갑니다. 오늘날은 비웃지 않는 대상이 거의 없을 정도로 누군가를 비웃으며 살아갑니다. 대통령을 비웃고 높은 권력에 있는 사람들을 비웃습니다. 우리가 당할 때는 기분이 상하지만 남은 쉽게 비웃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흠이 없으신 분이시고 온전히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비웃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고 오신 분이었고 만물이 예수님을 통해 창조되었으며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과 행동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하나님이신 이분을 비웃은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왜?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이었습니다(14절). 그들은 예수님의 생애 내내 그분을 비웃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주실 때마다, 그분이 선을 행하셨을 때에도, 특별히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들은 비웃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며 “남을 구원하였지만 너는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의 눈 앞에 있는 예수님은 이제 막 서른이 넘은 어린 청년이었고 출신지도 보잘 것 없는, 그곳에서 과연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했던 나사렛 출신이었습니다. 그분은 부유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난한 목수 출신이었고 유명한 랍비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비웃은 이유는 출신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14절).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듣고” 즉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비웃은 것입니다. 어떤 가르침이었나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상으로 가르침을 주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재물에 대한 것이었고 그것을 지혜롭게 사용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가르침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로 이웃을 사귀어 영원한 처소에서 영접케 하라고 가르치셨고, 이 땅에서 하고 있는 작은 것에 충성된 것이 나중에 영원한 곳에서 보상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재물과 하나님 중에 하나만 택해서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엿들은 바리새인들이 그 가르침이 하찮다고 생각하고 비웃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그랬을까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웃은 것은, 그들에게 탐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비웃거늘”(14절) 그렇습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은 하나님의 축복이었고 돈이 없는 것은 저주라 여겼습니다. 그런 그들의 기본적인 생각을 뒤집은 비유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거지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그들은 돈이 많은 것은 유익하다, 실질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젊은 랍비가 뭘 모르는구나. 삶을 안 살아봐서 모르는군. 너무 이상적이야.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직 어려서 몰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겠지만 그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여겼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만 계셔야 할 자리에 돈도 있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나치게 현실감각이 없는 이상적인 가르침,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웃은 것은 그들의 교만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15절). 바리새인들은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고 가르침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젊은 랍비가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는구만…우리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경건한 자들이라고…’ ‘참 수준 낮은 가르침이로구만. 우리는 이미 구약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자들이라고, 제자들에게 준 재물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해당사항이 없어. 너무나 기본적인 명령이야’

자신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모델로 삼을 자들이라는 교만이 그들 속에 있었기에 예수님을 비웃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반응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까? 강단에서 설교를 들을 때 사람들과 교제를 나눌 때 아침에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까? ‘저건 그냥 이상적인 가르침이지 현실을 몰라서 하는 말이야’라고 말입니다.

저는 과거에 강단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설교를 마치고 내려왔을 때 어떤 성도님이 말씀하시기를, 막상 자녀가 있으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녀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스러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자녀가 있다면 너무나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부모는 마땅히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 인생을 망친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마음에서 자녀가 사랑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의도적으로 그 마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밑에 두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현실적이지 않아, 뭘 모르고 하는 소리야’라고 생각한다면 바리새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는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 ‘오늘 말씀은 누가 들었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에게 준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문제입니다. 스스로 교만하게 여겨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이 책은 시시해, 다 아는 이야기만 하고 있어. 수준 낮아서 못 읽겠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책을 분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 안다, 시시하다’ 여기는 그 생각에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더 지킬 것이 없는 완벽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누군가의 가르침에 대해, 그 전달되는 방식에 비판적 사고를 가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나이나 배경을 불문하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전달한다면 그것을 겸손히 들을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도전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빛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아주 큰 장애물이다. 그렇다, 그것을 치우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빛을 영원히 가로막을 장애물이다.’ 존 오웬도 교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자기를 낮추지 않는 교만한 영혼에게 성경의 바른 지식을 가르치신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신 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계시는데 그것을 비웃고 있다면, 그들의 교만과 탐심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언 3:34)

예수님의 시각에서 생각해봅시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비웃고 있는 그들을 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당장 불이 내려와 불 타죽게 하실 수 있는 권리가 그분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비유나 이해하지 못할 말만 하시고 영원히 지옥에 가도록 두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시고 진리를 다시 한 번 보여주십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5절)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는 표현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알아주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사람 중에서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마치 사울 왕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다 치라고 명령하셨는데 사울은 가축들을 남깁니다. 사무엘이 책망하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원해서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삼상 15:30). 사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사울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과 장도들 앞에서 높여달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추구했던 것과 같습니다.

미움은 ‘가증스러운 것’을 의미합니다.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전혀 쓸모 없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 신약성경의 가장 강력한 표현 중 하나입니다. 스스로 높임을 받고자 하는 그 모습, 그것도 마음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서 높임을 받고자 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가증스럽고 추악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감정이 자리하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얘들아 나는 너희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데, 가증하고 추악한 모습이 자리한 것이 속속들이 보이는데, 너희는 하나님인 나의 가르침을 판단하고 나를 경멸하며 비웃고 있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지 책망하십니다.

책망1: 너희가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복음이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16절) 기본적으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백성이었습니다. 방법이 많이 왜곡되고 잘못되었으나 그들이 구약성경에 목을 매고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백성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모세오경, 선지자는 그 외 다른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나중에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라”고 하십니다. 이도 구약 성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읽어야 할 책, 따라야 할 책이 구약성경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은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의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로부터 모든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약속이 “세례 요한의 때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역할은 바로 그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약속이 곧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외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성취할 다음 인물을 가리키며 그 인물의 앞길을 예비하는 자(사 40:3, 눅 3:4)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세례 요한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해 가십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눅 4:43)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의 많은 약속들이 지금 예수님을 통해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 복음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 나라에 초청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절하고 회개하지 않고 대항하는데, 사실은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바라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고 그 나라 왕이 친히 요청하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을 주님은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약성경의 메시지는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러니 회개하십시오”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 도래했습니다. 회개하고 그분을 믿으십시오”가 되는 것이다. 언약이 폐기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항상 언약의 강조점이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 나라 지향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 언어가 주를 이루게 된다. 왕이 오셨다’ 구약에 있는 모든 예언을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기에 이제는 그분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그 하나님 나라 복음을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나라에 지금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왜 너희는 계속해서 그것을 거절하는가? 너희가 비웃는 그 가르침이 어떤 가르침인지 모르겠냐? 그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키는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복음이 너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한다! 왜 그것을 알지 못하는가?’라고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책망2: 너희는 심지어 율법도 불순종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17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이 율법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하나님 나라는 율법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복음을 통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더 이상 쓸모 없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에 겸손히 순종한 자는 율법의 정신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그 율법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폐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오히려 그 일 점 일 획이 사라지는 것이 우주가 사라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 히브리어의 알파벳에는 신과 쉰이 있습니다. 점 하나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왼쪽 끝, 하나는 오른쪽 끝에 찍혀있습니다. 그 획 하나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예로, 그들이 율법을 오해하고 지키지 않고 있음을 책망합니다. “이혼과 재혼”에 대한 율법의 적용에 대해 바로 잡으십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에게 18절은 좀 당혹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일 점 일 획도 사라지지 않는 율법을 너희들이 오용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 유대 랍비들은 결혼에 대한 모세의 율법을 다양하게 해석하여 적용하였습니다.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신 24:1)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고 그를 기뻐하지 않으면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보수적인 학파인 샴마이 학파는, 남편은 아내가 간음한 경우에 이혼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요셉의 경우 마리아의 임신을 알고 조용히 끊으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진보적인 학파인 힐렐 학파는, 여기서 수치스러운 일은 음식 접시를 깨뜨리거나 길에서 오래 이야기 하거나 외간 남자와 말을 하는 경우, 옆집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큰소리로 외치는 수다스러운 사람인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 이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랍비 아키바는 “아내를 기뻐하지 아니하면”을 “아내보다 더 예쁜 여자를 보면 이혼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당시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은 진보적인 학파를 따랐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유익이 되는대로 적용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렇게 다양한 자기의 해석방식을 가지고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율법을 이용, 자기의 만족을 채웠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18절)

마태복음 19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이혼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은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이혼할 수 있는가’라고 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4-6절)고 하십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고 명하였단 말이오!”(7절)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9절)고 답하십니다. 모세 당시 남자들은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른 여자를 아내로 삼고 본래 아내도 다른 곳으로 시집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완악함을 막고 버림받은 그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라”(신 24:2) 본래 법은 “간음한 경우가 아닌 이상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으로 이혼할 수 없으며, 만일 이혼했다면 다른 사람과 재혼 할 수 없다. 간음이 아닌 이유로 이혼한 사람과 재혼하는 그 사람도 죄를 범한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는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구약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느냐? 율법이 명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알고 지키고 있는 것이냐?”

예수님은 은혜롭게 다시 한 번 두 가지 책망으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그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분을 영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 가지 책망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계속 거절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 우습게 여기고 경멸히 여기고 있을지 모릅니다. 당신이 무엇을 거절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어쩌면 좋은 교훈을 얻어가기 위해 교회 왔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이 좋아서, 평안과 위로를 얻기 위해 이 자리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선악을 구분하며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자신들에게 법이 있다고 여겼고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거절하는 것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나를 거절하는 것을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주일 이 강단에서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선포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당신은 그분을 영접할 수도,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거절하는 분이 누구인지는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분은 당신을 포함하여 온 천지 만물을 일점 일획도 변함 없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지으신 창조자이시며 주인이십니다. 당신의 이성을 만드는 분도, 죄를 깨닫게 하는 양심을 창조하신 분도,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공급하시는 분도, 당신이 얻고자 하는 위로, 안식, 참된 평안과 만족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분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권위 있는 말씀으로 당신에게 그 나라 백성이 되라고 권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모든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고 겸손히 그분 앞에 나오십시오. 그분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으신 분들에게도 예수님의 책망은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율법을 그대로 따르라는 교훈입니다. 바리새인처럼 말씀을 나의 입맛대로 자기 삶에 유리한대로 이리 저리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충분히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 자인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교만함이 하늘까지 솟아올라 하나님 말씀의 권위보다 자기 생각이 더 절대적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바리새인처럼 동일하게 책망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악용하고 있다, 불순종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교만한 모습입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하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가말리엘 수하의 유능한 랍비,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 바울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 이것이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모든 생각들, 지식들, 세상의 지식, 사상, 철학들을 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 밑에 꿇어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낮아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겨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8)

존 파이퍼는 어릴 때 주방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그것이 참 중요한 인생의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 번뿐인 인생, 곧 지나가리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만 영원하리라’

우리 모두가 한 번뿐인 인생, 곧 지나가버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중요한 진리가 여기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과 대항하는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 발 앞에 굴복시키고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리새인처럼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높아진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귀한 인생을 오직 그리스도를 얻는 일, 영원한 그 일에 투자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