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본문: 고린도전서 6장 12-20절
설교자: 조정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복음과 삶을 연결하지 못하고 부조화를 일으키며 살아간다. 복음은 영혼 구원에 관한 것일 뿐, 몸으로 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신자는 구원을 온전히 이룬 것이 아니라 이루어간다. 거듭남은 끝이 아니라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의 시작이다. 성화는 몸을 입고 살아갈 때 복음의 지혜와 능력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는 평생 과정이다. 그래서 성도가 개인적으로 혹은 교회로서 겪는 모든 삶의 문제는 이런 측면에서 결국 복음과 직결된 문제다. 바울은 성도 간 일어난 송사 문제를 복음의 문제로 보고, 오직 복음의 지혜와 능력으로 문제를 다룰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그리고 이제 교회 안에 만연한 성적 문제를 복음의 관점에서 다룬다.
고린도 교회 일어난 성 문제와 그에 관한 복음적 처방을 다룬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있는 유사한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이 왜 복음의 지혜를 거역하는 일인지 판단하자. 그리고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 몸을 더욱 복음의 은혜에 합당한 삶으로 사용하는 일에 하나가 되자.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함께 지어가자.
1. 문제: 자기 영광을 위하여 몸을 사용한다
“고린도화 되다’라는 말이 ‘성적으로 방탕하게 되다’라는 의미로 사용될 정도로 헬라 도시 고린도는 문란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수시로 이방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후 대기하고 있던 수천 명의 신전 창녀들과 몸을 섞었다. 종교적 영향을 배제하더라도 헬라 문화 자체가 특별히 남성의 성적 방종에 관대함을 넘어 자랑함까지 조장했는데, 2세기 그리스 작가 아테나이오스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애인을 두고 매일 성관계를 하기 위해 첩을 둔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아이를 생산하고 우리 가족의 재산을 신뢰하며 맡길 수 있는 아내를 둔다”라고 말했다(틴데일, 39p). 웅변가 키케로는 “젊은이가 창녀와 행각을 금하는 자는 금욕주의자다”라고 비판했고, 철학자 플루타르크는 “아내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방탕함을 즐기며, 놀아나고, 바람을 피우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라고 말했다(베이커, 312-3pp). 이런 도덕적 실패는 그들이 성욕을 하나의 생물학적인 요구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한 결과로, 배고프면 밥을 먹듯, 성적 욕구가 생겨서 채우는 것인데 뭐가 문제냐고 생각했다.
이러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죄인이 어느 날 하나님 은혜로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도가 되었다. 그러면 이제 성적인 영역에서도 복음의 지혜와 능력에 따라 달라진 삶을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여전히 그들은 옛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 중 몇몇은 창녀와 합하는 죄를 여전히 즐기고 있었다: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15-16절). 어떻게 성도가 그럴 수 있을까?
이 당시 초대 교회를 괴롭히던 이단적 사상, 영지주의의 영향 때문이다. 영지주의는 영을 거룩한 것, 몸을 더러운 것으로 억지로 나눈다. 결국 양극단의 선택을 하게 하는데, 첫째, 영으로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려 한다(율법주의). 둘째, 반대로 몸으로 하는 것은 영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믿고 방종에 빠진다(율법 폐기론). 실제로 초대 교회 교부 중에서는 유혹에 취약한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거세한 이들도 있고, 반대로 고린도 교회 몇몇 성도들처럼 ‘나의 영혼은 확실히 구원받았으니 내 몸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고 행동하는 성도들도 많이 생겼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문란했던 고린도가 건전하게 보일 정도로, 성적으로 타락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매매가 불법 또는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음란물은 널리 퍼진 아편처럼 모든 사람을 중독시킨다. 교회는 다른가? 한 대규모 기독교 단체 리더는 소속된 남성의 100%, 여성의 50%가 음란물의 유혹과 싸우고 있다고 말했고, 전 세계 50여 개국 3,700만 명이 가입한 불륜 조장 사이트 회원 중 약 25%가 복음주의자라고 답했다. 어떻게 성도가 그럴 수 있을까? 음행, 간음, 탐색, 남색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불의한 자의 행위가 아닌가?(6:9). 오래된 이단적 사상인 영지주의가 여전히 교회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단번에 영원히 죄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이 몸으로 못할 일이 없다는 거짓에 너무 쉽게 속는다.
2. 처방: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몸을 사용하라
바울은 성도가 몸으로 하는 것을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복음의 지혜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래서 우리 몸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복음적 처방을 내린다.
① 복음이 가져다준 몸의 자유(12-14절)
“모든 것이…가하나”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되어 인용됐다. 복음이 신자를 죄에서 자유롭게 했기 때문에 ‘뭐든 해도 괜찮다’는 고린도 성도들의 생각을 바울이 이용하여(‘내게도 그렇다’)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한다. 첫째,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12a). 성적인 죄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회개하면 언제든 완벽하게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죄는 유익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해를 입힌다. 다윗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그가 회개했을 때, 간음죄를 용서하셨다. 그러나 칼이 그의 집을 떠나지 않았고 집에 재앙이 일어났으며 자식이 죽게 됐다(삼하 12:10-15). 성적인 죄는 다른 죄에 비해 그 결과가 훨씬 더 심각하다. 복음이 말하는 몸의 자유는 어리석은 죄의 결과를 맛보기 위한 자유가 아니라 비참한 죄의 결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자유다.
둘째, 모든 것이 가하나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한다(12b절). 성적인 죄는 우리를 얽매이게 한다(중독).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해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하게 한다. 약한 자극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점점 더 강력한 자극을 추구하게 만든다. 성경은 음란을 죽이라고 명령하지만(골 3:5), 음란에 빠진 성도는 도리어 죽을 때까지 스스로 그 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 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죄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누가 이런 몸을 복음의 능력으로 자유를 얻은 몸이라 부르겠는가?
고린도 성도들은 아마도 당시 유행했던 말을 사용하여 이렇게 변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13a절). 무슨 뜻인가? 식욕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고, 그래서 음식을 먹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닌 것처럼, 성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고, 그래서 성관계를 맺는 것은 그 본능에 충실한 일일뿐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13절b). 몸이 느끼는 식욕과 성욕이 몸의 본질적이고도 영구적인 기능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시적인 욕구를 모두 제거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몸은 단순히 욕구를 채우기 위해(음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몸은 궁극적으로 주를 위해서만 있다. 주께서 우리 몸의 주인이시다. 근거는?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14절). 하나님께서 주를 다시 살려 새로운 몸을 입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될 것이다. 부활한 몸은 복음이 우리에게 약속한 온전히 자유로운 몸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말하는 몸의 참된 자유는 이 몸을 입었을 때나 부활의 몸을 입었을 때나 해롭고 얽매이기 쉬운 죄로부터 자유를 얻어 오직 주를 위하여 몸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난 몸(벧전 2:24),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몸이다(롬 12:1).
② 복음이 이루어낸 몸의 연합(15-17절)
성경은 성관계를 “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6절). 단지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부 관계를 정의할 때 성경이 사용한 표현처럼 “둘이 한 육체가(몸이) 된다”는 말이다(16절; 창 2:24). 성관계는 단순히 육체적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연합을 말한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성관계를 억지로 맺은 미혼 남성에게 피해자 여성과 결혼할 것을 요구하고(신 22:28-30), 음행은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부부의 연합을 끊어내는 이례적인 이유가 되는데(마 5:32; 19:9), 타인과 성관계를 맺은 것 자체가 배우자와의 연합을 스스로 끊고 타인과 한 몸을 이루려는 행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연합의 원리를 복음의 능력으로 주와 연합한 성도에게 적용한다.
성도는 믿음으로 주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됐다. 바울은 이를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라고 강력하게 표현했다(17절). 매우 친밀하고 견고하며 배타적인 관계, “너희는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하는 신비로운 연합의 관계를 가리킨다(요 15:4).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남편과 아내로 신비롭게 묘사하기도 했다(엡 5:32). 복음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 된 교회를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연합의 관계로 단단히 맨다. 그리고 성도의 몸은 그 연합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 곧 지체다(15절).
그런데 성도가 그 몸으로 창녀와 합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16절). 그리스도와 전인격적으로 연합된 그 관계를 끊어내고 창녀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였는데 거기서 자신을 뜯어내 창녀와 합한 몸의 일부로 바꾸는 행위다. 복음의 지혜와 능력을 아는 자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한가? 바울이 성도의 마땅한 답을 요한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5절).
③ 복음이 요구하는 몸의 사용(18-20절)
복음은 성도에게 “음행을 피하라”고 명령한다. 먼저,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했던 것처럼, 성적인 죄를 하나님 앞에서 큰 악이라고 여겨야 한다: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18절). 성적인 죄는 신성한 연합을 해치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죄라는 점에서 다른 죄보다 더 큰 결과를 가져오는 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도는 그 악을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피해야 한다. 요셉이 붙잡힌 그 옷을 버려두고 밖으로 급히 피한 것처럼, 성적 유혹이 잦은 장소와 시간, 상황을 계속해서 피하는 것이 음행과 싸우는 지혜로운 방법이다. 강인한 힘을 키우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겠다는 자에게 솔로몬은 이렇게 조언한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잠 6:27-28). 화상을 입지 않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불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다.
음행을 피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두 가지 복음의 지혜가 있다. 첫째, 우리 몸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다(19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도 교회 안에서 음란한 일을 대범하게 저지르지 않는다. 성스러운 곳을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배당이 아니라 우리가 성전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 몸에 죄를 범하는 음행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그 범죄로 모욕하고 더럽히는 일임을 기억하라.
둘째,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값으로 사셨다(19-20절):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기사, 몸은 자동차라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자차가 아니라 차주가 있고, 우리도 그 차주가 고용한 기사다. 그러면 운전하는 것은 내가 맞지만, 원하는 대로 차를 다루거나 이용할 수 있는가? 아니다. 주인이 원하는 대로 차를 관리하고 운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어떤 값을 주고 사셨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몸값으로 사셨다(벧전 1:18). 성자의 몸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가?
주님은 자기 몸을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신 적이 없다. 얼마든지 육신의 안락과 출세와 부요함을 누리실 수 있었지만, 자기 몸 둘 곳 하나 없이 사셨다. 아버지가 가란 곳에 어디든 가시고,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 모욕과 수치와 핍박과 고난이 가득한 십자가에 그 몸을 바치셨다. 성자의 그 귀한 몸값으로 성도는 산 것이 되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과 믿음으로 한 몸이 되게 하셨다. 그러면 우리 몸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시는 것, 내가 표출하고 싶은 방식이 아니라 그분이 기뻐하시는 방식, 내가 사용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그분이 영광을 얻으시기 합당하도록 내 몸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 성적인 죄를 이기는 힘은 죄를 얼마나 더 미워할 것인가에 달려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얼마나 더 사랑하는가에 달려있다.
복음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날마다 새롭고 충만하고 아름답고 분명하게 나타낸다. 복음의 지혜와 능력이 가득한 성도는 그래서 성적인 죄를 이기고 자기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