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날마다 죽는 부활의 삶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29-34절

설교자: 조정의

우리는 무엇을 믿는 만큼 살아내지 못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믿는 대로 산다. 매우 일상적인 사례로 식전 기도를 들 수 있는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거나, 하나님이 음식을 선물로 주신 분이라고 믿지 않거나,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종종 식전 기도를 잊어버릴 때도 있지만, 대부분 감사 기도 후에 식사하는 이유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을 믿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죽은 자 가운데 부활이 없다고 믿었다(고전 15:12). 바울은 먼저 그것이 교리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연쇄적으로 일으킨다는 사실을 논박하고(12-19절), 교회가 마땅히 믿고 붙들어야 할 부활에 관한 바른 교훈을 설명했다(20-28절).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사례를 들어, 그들이 진정 부활이 없다고 믿으면 왜 그 믿음대로 살지 않느냐고 묻는다(29-32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활을 믿는 믿음이 요구하는 마땅한 삶을 적극적으로 살 것을 열렬히 권면한다(33-34절). 

당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진실로 믿는가? 그러면 그 믿음과 어울리는 삶과 어울리지 않는 삶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믿는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약 2:19).  중요한 건 믿음의 고백과 일치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믿음의 고백과 삶이 따로 내는 불협화음을 조율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와 확연히 다른 삶, 부활 생명의 삶을 살도록 하자.

1. 부활의 믿음과 어울리지 않는 삶(29-32절)

① 회심: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29절). 사도 바울은 다시 한번 부활에 관하여 그들이 가진 잘못된 믿음이 사실인 경우를 전제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앞서 그는 죽은 자의 부활이 확실한 사실이라고 충분히 밝혔다. 왜 다시 그들의 잘못된 믿음이 사실이라고 가정한 것일까? 그것도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이라고 과장까지 하면서. 이유는 분명하다. ‘그렇게 철저히 믿는다고 하면서 왜 그 믿음대로 행하지 않느냐’고 되묻기 위해서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29절).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해석이 어렵지 않으나 의미를 확정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기독교 역사상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를 언급하거나 지지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 어디에도 죽은 자를 위한 대리 세례를 권장하는 가르침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먼저, “죽은 자들을 위하여”를 빼고 읽어 보자: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죽은 자들을 위하여”를 빼면 ‘부활이 없다는 걸 믿으면서 왜 세례를 받으려고 하느냐’고 묻는 것이 된다.

그다음 “죽은 자들을 위하여”에서 “위하여”는 “때문에”로도 해석이 되는데, 그러니까 지금 세례를 받으려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죽은 자들 “때문에” 구원에 이르게 된 자들이 된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죽는 것을 보면서 믿음을 갖게 되어 세례를 통하여 자신도 같은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경우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인이 부활하지 않고 죽는 것으로 끝나버린다고 굳게 믿는다면, 왜 세례를 받아 그런 소망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존 폭스는 “기독교 순교사화”에서 주 후 162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의하여 시작된 박해로 젊은 그리스도인 게르마니쿠스가 그의 신앙 때문에 맹수들에게 던져졌다고 썼다. 그런데 “그가 너무나 용맹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에 여러 명의 이교도들이 그와 같이 꿋꿋함을 불어넣어 주는 믿음을 향해 회심했다”(22p). 만일 죽은 게르마니쿠스가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도대체 누가 그의 믿음 때문에 세례를 받고 그와 같은 삶을 살려 하겠는가? 부활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회심하게 된 것이다.

② 열심: 두 번째 사례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 얘기다: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30절). 그들은 언제나(“매시간”) 위험을 각오하며 복음 전파하는 일에 헌신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여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그들은 정말 매순간 여러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그것을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에서 경험한 사례를 들어 이를 확증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인간적인 동기로우리말성경)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32절). 성경엔 바울이 에베소에서 문자 그대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는 기록은 없지만, 고린도 교회에 쓴 또 다른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에베소에서 겪은 일을 회상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고후 1:8-9). 그리고 바울은 묻는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우리가 왜 우리가 이 일에 매일 목숨을 걸겠는가? 이것이 단지 인간적인 동기겠는가?” 결코 아니다.

바울은 만일 부활이 없다면 차라리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말하는 이교도들처럼 사는 것이 더 이치에 맞다고 말한다. 한 번 뿐인 인생, 죽으면 끝나는 데, 누가 사서 고생하겠는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사는 것이 나은 삶이다. 그러나 죽으면 끝이 아니라 부활을 믿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항상 맹세하며 살았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31절).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 주”라고 고백하며 같은 주님 안에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들을 친밀하게 부른다. 바울의 자랑그들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 안에서 역사한 복음, 주 안에서 그들과 함께 가진 복음이 바울의 자랑이었다(고전 9:16). 그 복음이 부활을 확실히 보장하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단언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부활을 믿는 자는 날마다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걸 수 있다. 그렇게 맹세하며 살 수 있다.

2. 부활의 믿음이 요구하는 바른 삶(33-34절)

바울과 우리 삶이 한참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를 부르신 모양과 우리를 부르신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선택되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과 우리를 부르신 모양은 달라도 목적은 같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기 위한 목적으로 거듭났다.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주로 믿을 때(롬 14:8-9).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외국으로 떠나지 않지만, 우리가 속한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복음을 전하고 살아내기 위하여 항상 힘써야 한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 맹수와 싸우거나 순교의 위험을 당하지는 않지만, 우리도 날마다 자신을 죽이고 세상의 여러 가지 유혹과 시험에 맞서 싸워야 한다(눅 9:23; 엡 4:22; 약 4:7). 이것이 부활을 믿는 모든 자에게 요구되는 복음에 합당한 삶이다.

만일 당신이 목적을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다면,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그 믿음이 요구하는 삶과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면 바울의 이 경고가 당신에게 꼭 필요하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33절). 당신은 지금 속고 있다. 몽유병 환자처럼 잠든 인생을 살고 있다.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이 세상의 삶을 전부라고 여기며 살고 있다. 당신을 더럽히악한 동무들은 누구인가? 악한 동무들은 자주 만나고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자주 듣는 유튜브 채널이나 드라마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이든 또는 누구든 당신을 복음에 합당한 삶에서 멀어지게 만든다면, 주님께서 “자신을 주심”으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셨는데(딛 2:14), 그 고귀한 구원의 목적을 방해하고 더럽힌다면 그게 바로 악한 동무다. 그것들이 당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착각하지 마라. 약간의 부정적인 문제를 일으키긴 하지만, 잘 통제하고 있으니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속지 말고(현재형) 미루지 말고 즉시 정신을 차려야 한다(부정과거형): “깨어(“정신을 똑바로 차리고”우리말성경)”(34절). 

여기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에게 합당한 삶의 방식이 있다: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34절). 먼저,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합당하고 당연한 삶의 방식인지 마지막으로 덧붙인 이 질책의 말씀을 주의하여 보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34절). 종종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이 죄에 오래 빠져 있거나 세속적인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일 때, ‘어쩌면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어’, ‘구원받은 사람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것 같아’라고 판단될 때가 있다. 배우자를 함부로 대하거나, 밥 먹듯이 분노하거나, 죄를 즐기면서 버리지 못하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거나, 세상 사람과 똑같이 돈, 명예, 인기를 좇거나, 말씀 읽는 것에 아무 흥미가 없거나, 술과 쾌락을 즐기거나, 주일에 교회는 나오고 여러 봉사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일을 행하고 싶어 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계속해서 짓는 경우 그렇다. 물론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분명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사는 것은 분명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와 다를 바 없는 삶이라서 그렇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자는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다(히 10:39). “뒤로 물러나 멸망할 자”의 삶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의 은혜에 합당한 행함이 함께하는 자다(약 2:24, 26). 부활을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산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기 때문에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그분께 “열납”되기를 원한다(시 19:14). 이 세상의 삶이 끝난 후 부활하면 자신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상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매일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이다(빌 3:14). 부활을 믿는 자는 부끄럽지 않게 산다.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34절). 부활의 믿음이 요구하는 바른 교훈을 따르도록 돕는 몇 가지 방법에 관하여 조언하기 원한다. ① 선한 동무들과 항상 함께 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주의 강림, 부활의 날)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다(히 10:25). 그 이유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다(히 10:24). 악한 동무들은 부활의 삶을 더럽히지만, 선한 동무들은 오히려 격려한다. 혼자 타는 장작은 금방 꺼지지만, 함께 타는 장작은 오래 간다.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는 그만큼 의를 행하고 죄와 싸우는 일을 지속적으로 힘쓸 수 있다.

② 죄와 싸우라, 피 흘리기까지(히 12:4).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6). 그러나 우리는 자주 미혹되어 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다시 한번 사도는 ‘속지 말라’고 경고한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7-8). 당신에게 자주 발견되는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친밀하게 두지 말라. 치열하게 싸우라. 그 뿌리인 정욕까지 죽이라(골 3:5). 

③ 부활의 주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2). 사도 베드로는 불에 타서 녹아질 땅에 속한 것을 사모하지 말고, 구원을 가져다주실 주님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권면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격려했다(벧후 3:18).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하고 그분을 더 많이 알수록 우리는 시시한 세상의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만물을 바라보면서 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될 것이고(시 19:1), 말씀을 대할 때도 순결하고 정직하고 완전한 지혜의 하나님을 발견하며 순금보다 말씀을 더 귀하게 여기고 꿀보다 더 달게 먹을 것이다(시 19:10).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의를 행하고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한다. 부활의 믿음이 요구하는 것은 결국 영원히 사귐을 누리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