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낙심하지 않게 하는 믿음
본문 : 고린도후서 4장 16~18절
설교자 : 최종혁
다른 제목은 ‘보물이 모든 것을 바꾼다’입니다. 오늘 우리가 볼 말씀이 보물을 발견한 사람,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바꾼 사람이 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비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죽어서 가는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 다르게 말하면 구원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 것도 포함되겠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구원을 받는 것’, ‘영생을 얻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로 비유하십니다. 뜻밖의 보화를 발견한 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단순하고 짧은 비유입니다.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구원의 가치, 영생의 가치가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진 모든 것보다 크다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가 실제 상황이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소작농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소유가 있었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소유를 팔아서 밭을 산 것을 보면 그 정도의 재산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밭을 가지지 않고 소작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당연히 더 나은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밭을 살 이유가 그에게는 전혀 없었습니다. 집도 없고 살림살이도 없이 밭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어리석은 일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 어리석은 일을 한 것입니다. 집에 아내가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평소와 다름없이 밭일을 하러 나갔던 남편이 헐레벌떡 돌아오더니 집문서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모든 살림살이를 다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져다 다 팔겠다고 합니다. 그걸 다 팔아서 밭을 하나 사겠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무슨 정신 나간 짓이냐고 뜯어 말릴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회사 갔다 온 남편이 엄청난 사업 아이템이 있다고 집 다 팔고 그거 하자고 하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이 두 사람의 생각을 전혀 다르게 만들었을까요? 하나의 일에 대해서 한 사람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한 사람은 정신 나간 짓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을까요?
보물이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더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포기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매일 아침 힘든 몸을 일으켜 직장을 향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얻을 가치가 내가 아침에 일어나는 것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얻는 것보다 잃는 가치가 더 많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직장을 바꿀 생각을 합니다. 자연스럽고 현명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정말 중요합니다. 무엇의 가치를 더 높게 혹은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선택과 행동,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보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보물을 발견했을 때 분명 다른 선택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달라진 삶은 보물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볼 때는 꽤나 극단적이고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보고 있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바꾼 사람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종교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좋지 뭐. 의지할 수 있고 위로도 되고 보람도 느낄 수 있고. 사이비만 아니면 무슨 종교든 나쁠 것 있나.’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대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광신도’를 싫어 합니다. 적당히 종교 활동하면서 사람들하고 어우러져 살면 되는데, 굳이 다른 사람들을 전도하려고 하거나 혹은 다른 것보다 종교 활동을 우선시 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삶의 의지도 되고 위로도 됩니다. 또한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삶 속에 삶의 보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단지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아닙니다. 그것이 전부라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신을 믿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굳이 하나님 믿는다고 힘들게 살 필요도 없습니다. 그 정도의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는 것은 세상에도 많습니다. 보람 있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하실 정도로 엄청난 가치를 지불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의지와 위로, 보람, 평안을 위해서 그렇게 할 이유는 없습니다. 과도한, 혹은 어리석은 투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어리석은 일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것을 택했습니다. 그의 배경이나 그가 받은 교육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바리새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춘 사람입니다. 그의 학력, 지식수준, 열정을 생각해 보면 그는 뭐가 되도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빌 3:7-9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바울이 그가 가지고 있었던 누리고 있었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선택해서 그분을 전파하는 일에 일생을 바칩니다. 이런 선택을 했으면 결과적으로 뭔가는 좋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의 삶을 보면 ‘그럼 그렇지. 유망한 청년이 예수 때문에 인생 망쳤네.’라는 말이 나올 법합니다.
바울이 당했던 일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 때문에 바울이 당했던 일들 –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함”, “답답한 일을 당함”, “박해를 받음”, “거꾸러뜨림을 당함”,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8~10절)이 있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바울이 당했던 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고후 11:23-27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이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바울은 처음 구원 받고 세우심을 받을 때부터 이런 고난을 당할 것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행 9:15-16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실제로 바울은 구원을 받은 직후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일을 시작했고 얼마 되지 않아서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행 9:23). 그가 예루살렘으로 도망해서 그곳의 성도들과 교제하려고 했지만 그들조차도 바울과의 교제를 두려워했습니다(행 9:26). 바나바의 노력으로 성도들의 영접을 받고 또 다시 예수님을 담대하게 선포했지만 사람들을 또 다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행 9:29). 바울은 예수님을 믿은 직후 계속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힘썼고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고 힘썼습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했다”(고후 4:12)는 그의 고백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눈 앞에 두고 하루 하루를 살아갔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주변에서도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겠지만, 바울 자신은 어땠을까요? 바울 스스로도 후회스럽고 왜 이런 삶을 내가 살아야 할까 회의감도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바울의 고백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16절)
바울은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낙담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힘이 속에서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이런 것을 원합니다. 좀 더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려운 상황들이 사람을 그렇게 만듭니다. 그럼, 바울은 전혀 낙심하지 않을 만한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저 고난없이 평안한 사람이 하는 배부른 소리였을까요? 어려움 중에 낙심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몰라서 그래.” “네가 이런 일 당해 봤어?” 같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의 말이 더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나보다 더한 어려움을 당한 사람의 말은 어떤가요? 바울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요?
앞서 언급한 바울의 삶을 생각해 보면 그는 분명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기록할 때 바울은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겉사람이 낡아져 가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감당했던 일을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을 감당하기에는 육체적으로 점점 더 힘든 상황이 되어갑니다. 바울은 여러모로 점점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낙심하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힘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가 당했던 모든 일들은 그가 하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 때문에 그는 그런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멈추면 그만입니다. 그 일만 하지 않으면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의 비결
그 비결에 대해서 17~18절에서 설명합니다.
- 그가 알고 있었던 사실
- 그가 보고 있었던 영원
그가 알고 있었던 사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17절)
먼저 바울은 그가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울이 처한 상황, 환난에 대한 사실입니다. 어려움, 환난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할까요?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갑니다. 낙심하게 하고 좌절하게 합니다. 바울의 경우 그런 환난이 없다면 더욱 기쁘고 즐겁게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그것을 위해서 기도했던 적도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우리도 어려움 중에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만 벗어나면, 이것만 넘어가면 주님 잘 섬기겠습니다,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환난이 우리에게 하는 일이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입니다. 고통은 고통이고 괴로움은 괴로움입니다. 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을 싫어하는 우리가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다른 측면의 사실을 말합니다. 환난이 하는 일은 영광을 이루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환난과 영광을 대조합니다. 환란은 잠시이고 영광은 영원하다고 말하고, 영광은 중하고 환란은 경함이라고 말합니다.
환난은 잠깐이고 가벼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환난이 만들어 내는 것은 영원하고 중한, 즉 가치 있는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지극히 큰 것이어서 무엇과 비교할 수도 없는 영광입니다. 환난이 고통을 준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이 또한 사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단지 지금은 환난이 있지만 후에는 영광이 있을거다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순서상의 차이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이 상황을 버티면 좋은 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지금의 환난과 나중의 영광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환난이 영광을 이루고 있다고 말합니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정말 일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훈련을 합니다. 좋게 표현해서 훈련이지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일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고통이 가져오는 영광스러운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고통이 영광을 만들어낸다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고통과 그들이 받을 영광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들의 경우 영광은 반드시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때로는 많은 노력을 해도 불의의 사고나 부상 등으로 영광을 얻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영광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영광은 반드시 보장되어 있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이렇게 말합니다.
벧전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극한 환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매일 더 힘을 얻어서 담대하게 주님을 위해 살 수 있었던 첫 번째 비결은 이것입니다. 지금의 환난이 직접적으로 영원한 영광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결은 이 연장선 상에 있습니다. 이 알고 있는 사실에 기초해서 계속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 노력이 위의 사실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이런 노력이 없이는 위에서 말한 사실도 아무 의미 없는 사실이 되어 버립니다. 그 노력은 무엇입니까?
그가 보고 있었던 영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8절)
바울은 자신이 주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말 그대로 ‘주목하는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그렇게 주목해서 보았습니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해서 봤습니다. 사실 바울은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보이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보였습니까?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고 말합니다. 뭐든 잠깐인 것들이 지금 우리 눈에 보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라질 세상에 속한 것들이 보입니다. 바울에게는 낡아져가는 겉사람이 보였을 것입니다. 지금 당하는 환난이 보였을 것입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벽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와는 다르게 세상과 타협하면서 즐겁게 살고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도 보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만약 이런 것들을 주목했다면 그는 더 이상 그렇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사람들 보기에 행복한 삶을 그도 추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보이는 것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눈을 돌렸습니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이고 자신이 계속해서 경험하고 싸워야하는 것들이었지만 그것에 시선을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했습니다.
그럼 바울이 주목했던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원”입니다. 영원한 것들을 주목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그 영원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 상급을 바라 봤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봤고 영원을 사는 이 땅의 영혼들을 바라 봤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불 가운데서 구원 받은 자처럼 서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환난 중에 인내하고 자신의 약함을 오히려 기뻐하고 자랑하며 오직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기를 바라며 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며 산 것입니다.
어쩌면 참 모순적인 말입니다. 보이는 것을 봐야지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이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있습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해주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미래의 것을 현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실제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데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해주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믿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리석은 삶이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지혜롭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만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예를 계속해서 제시합니다. 그들 역시 세상의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고 이해하기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광신도’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보는 것을 따라 살다가 그것을 위해 죽었습니다. 더 나은 것, 더 가치 있는 것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결국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 11:15-16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것이 바울이 그 환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지금의 상황에서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온전하지 않아서 자주 실패하지만 매일 새로운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 그것을 믿고 바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매일 새로운 힘을 얻기를 원한다면, 잠시의 것에서 눈을 떼고 이 영원한 것에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보물이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다시 예수님의 비유로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울은 천국이라는 보물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그리고 거기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천국이라는 보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라보며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보물이 그들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천국이라는 보물을 발견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발견한 보물도 우리의 삶을 바꾸었습니까? 그 변화가 너무 희미해서 잘 알아보기도 힘들다면, 우리가 발견한 보물의 문제일까요? 바울이 찾은 보물은 전 재산을 다 팔아도 될 만큼의 값어치가 있었는데, 우리가 찾은 보물은 일요일만 팔아도 되는 그런 보물인가요? 내 이기심을 팔아 버리기에는 부족한 그런 보물입니까? 세상 속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의지할 수만 있게 해주는 그 정도의 보물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찾은 보물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물을 보는 우리의 눈,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보물의 가치를 그 정도로 보고 있는 우리의 눈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낙심합니다. 낡아져 가는 겉사람 때문에 실망합니다. 환난 중에 좌절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을 힘들어 하기만 합니다. 그 안에 즐거움이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지 않고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전 재산을 팔아 보물이 숨겨진 밭을 살 돈을 들고 주인에게 가는 사람이 재산을 판 것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곧 얻게 될 것으로 인해서 기뻐하며 뛰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야 합니다.
천국의 소망 가운데 사는 것은 죽음을 앞두고 드려야 할 기도가 아니라 우리 삶을 통해 계속해서 드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며 삽시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삽시다. 지금의 내 삶이 영원과 직결되어 있는 삶임을 잊지 말고 하루를 살아갑시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기대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합시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나의 상황 가운데 함께 하시며, 나의 약함 가운데 일하시고, 나의 환난을 통해 영광을 이루심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주목해야 할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낙심하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힘을 얻어 오늘을 살게 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이 낡아져 가는 만큼,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져서 주님을 보게 되는 그날까지 소망 가운데 힘차게 우리 앞에 있는 경주를 달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