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는 항상 예배중입니다
본문: 로마서 12장 1-2절
설교자: 조정의

 

목회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여기저기서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대답하기 애매하고 힘든 많은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질문,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선택의 관계에 관한 질문, 고통의 문제에 대한 질문, 술을 마시는 것이 죄인가?… 그중 단연 최고는 이 질문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의 삶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요?”

예전에 상담을 하면서 “우리 부모가 보여주는 삶이 진정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라면 나는 차라리 예수를 따르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그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무신론자와 채팅으로 논쟁을 한 적이 있는데 그가 사용한 강력한 무기가 있었습니다. “왜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우리보다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더 못한 삶을 사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럴 때 뭐라고 반박해야 할까요?

물론 그들의 질문은 극단적이고, 그들이 아는 몇 사람의 예시에 국한된 비약적인 질문입니다. 실제로 주님을 믿는 사람 중에 훌륭한 본을 보이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그런 의문이 남는 영역이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왜 우리는 복음을 믿으면서, 입으로 복음을 시인하면서, 복음에 반대되는 삶을 살까요? 한 가지 분명한 대답은 그것이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믿음과 복음에 합당한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초보운전이라고 붙여놓은 자동차가 기가 막힌 운전솜씨를 보이면 우리는 그 안에 초보자가 타고 있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믿는 자라고 말하지만 삶이 복음과 완전히 동떨어져있을 때 우리는 그 삶을 운전하는 분이 성령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 중이라는 현실은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이루고자 하시는 이상(그리스도의 형상)과 현실의 격차는 매우 큽니다. 하지만 그 격차를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복음이 일으키는 삶의 변화가 극도로 적어서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음에도 거의 그 차이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라면 우리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복음 안에서 자라는 것을 막고 있는지 찾아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이유 때문일 수 있습니다. 혹은 바울의 책망을 받았던 자들처럼 신령한 자가 되어야 하는데 육신에 속한 자,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고전 3:1). 히브리서 기자가 꾸짖었던 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초보자로 듣는 것이 둔하고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여 생긴 문제일 수 있습니다(히 5:11-14).

무엇이 되었든 기본적으로 복음을 아는 것과, 복음을 살아내는 것의 느슨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있는데 그것이 삶으로 터져 나오는 관이 막혀있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하기 원하는 것은 본문 말씀을 통해 그 중간의 막힌 것을 뚫는 일입니다.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을 통해 복음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을 분명히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우리 삶의 전부를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영적 예배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만일 이것이 로마서 1장 1절이라면 매우 갑작스러운 명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삶을 하나님께 산채로 바치라! 하지만, 본문은 12장입니다. 갑자기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1에서 11장까지 바울이 설명한 모든 것, 복음의 내용 뒤에 따라오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명령에 앞서 거룩하신 하나님(1), 그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영원히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1-3), 그리고 그 사람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4-8)를 말했습니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1:16). 그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삶에 복음의 목적인 아들의 형상을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도 합니다(6-8).

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2장 1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한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입었다면, 마땅히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대로 너희 자신을 전부 드려야 한다고 권하는 것입니다(엡 2:7). 복음과 복음에 합당한 삶은 결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주 이 사실을 기념합니다.

주가 우리 대신 찢기신 살을 기념하는 떡과, 우리 대신 흘리신 보혈을 상징하는 잔을 먹고 마시면서 우리는 실질적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합니다. 나를 대신하여 죄를 씻으신 그분께 감사합니다. 나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온전히 의롭다 고 선언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에 합당한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고, 우리에게 부어주신 자비에 합당하지 못한 삶을 뉘우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핵심으로 둔 복음이 바울이 12장부터 말하고 있는 모든 내용의 강력한 능력이자 동기가 됩니다(고전 1:2-5).

이것을 양자됨으로 설명하면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자들에게 ‘자, 이제 이분이 너희 아버지니까 사랑해봐’라고 말하며 사랑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주 오랜 지면을 활용하여 체계적이고 감동적으로 그 아버지가 자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설명합니다. 자녀의 과거, 그 더럽고 추악한 것을 씻기 위해 아버지가 얼마나 큰 값을 지불했는지(자기 독생자의 생명), 지금 얼마나 높고 고귀한 가족의 일원으로 초청한 것인지(하나님의 자녀), 앞으로 얼마나 더 위대하고 놀라운 유업을 누리게 할 것인지 설명합니다(영원한 생명, 영광). “그러니, 이 자비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니?” 바울은 그렇게 묻는 것입니다.

본문은(1-2절) 바울이 12장부터 편지 마지막인 16장까지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내용의 요약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너희 몸”이라는 말이 있고 그것이 “산 제물”이라는 말이 있으며,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너희 몸(your bodies) = 제물(sacrifice) = 영적 예배(Spiritual Worship)

로마 성도는 유대인의 오랜 예식인 양을 제물로 바치는 것에 익숙했는데, 이제는 “그들 몸”이 바로 제물이 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양으로 거룩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였다면, 이제는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여기서 “너희 몸”, “거룩한 산 제물”, “영적 예배”가 각각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너희 몸”은 제물의 양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물로서 어느 정도를 드려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물은 우리의 일부가 아닌 전부입니다. “너희 몸”이 가리키는 것은 단지 신체적인 몸이 아닙니다. 2절에 “마음을 새롭게 함”이라는 표현을 보면 바울은 단지 몸이 아니라 마음을 포함한 전인격적인 사람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전부 내어드립니다. 로마서 6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미 “너희 자신을…하나님께…드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 편지하면서 바울은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 몸에 성령이 계시고, 우리 몸을 그리스도가 값으로 사셨으니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했습니다(고전 6:20). 우리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주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지 않습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롬 14:7-8).

둘째로, “거룩한 산 제물”이 강조하는 것은 제물의 질입니다. 우리가 어떤 제물인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바쳐지기 위해 구별된 거룩한 제물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은 아주 신중히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제물에 관한 기록을 보면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이 “이는 여호와 앞에 거룩한 것이라”입니다. 합당치 않게 만지거나, 먹거나, 다루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우리가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 바치기 위해 구별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냥 제물이 아니라 “산 제물”이라고 합니다.

살아있는 제물이라는 말은 뭔가 어색한 말입니다. 물론 살아있는 상태로 제물을 제단 앞에 가져오지만, 죄인을 위해 제물은 반드시 제단에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히 9:22).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께 구별한 거룩한 존재로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래서 “산 제물”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3절에서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하는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드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제물처럼 여겨야 합니다. 살아있는 제물로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을 거룩하게 구별한 것처럼 우리 삶이 그와 같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예배는 제물이 드려지는 방식을 강조합니다. 우리 삶의 전부를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제물로 드릴 때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에 관한 대답입니다. “영적 예배”라는 말은 마음에서 흘러나와 삶으로 나타나야 할 진실한(true) 예배를 가리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참된 예배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껍데기나 행위만이 아니라 중심에서부터 올바른 예배,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준을 만족시키는 참된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바리새인들은 입술로 하나님을 공경하나 마음은 먼 종교생활을 철저하게 행했습니다(마 7:6). 그건 예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진실한 예배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는, 즉 내면(마음)과 외면(입술의 말, 행위)이 모두 포함된 참된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가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져야 합니다(마 23:23).

많은 사람이 주일 만찬 시간을 예배로 보고 나머지 삶의 영역은 배제하는 경향이 있지만, 진실한 예배는 삶의 모든 영역을 포함합니다. 라디오 생방송 시간에 On Air(방송중)를 켜두는 것처럼 우리 삶은 언제 어디서든 ‘예배중’에 불이 켜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언제 어디에 있든지 등 뒤에 ‘나는 지금 하나님을 예배중입니다’라고 써붙이고 생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운전 중에도, 직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도, 학교에서도, 아내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눌 때도, 혼자 방 안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만질 때도 우리는 예배 중입니다. 복음이 그렇게 만듭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 육체의 소욕과 세상의 풍조를 섬기던 나를 언제 어디서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기게 한 것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예배 중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예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소중한 사람에게 주기 위해 특별한 선물을 고를 때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 삶을 드릴 대상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하나님입니다. 천지의 주재시고, 우리가 철저히 의존하는 아버지며,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사랑의 주님입니다. 복음이 자비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 삶은 그분께 드려질 제물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허투루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시 19:14).

셋째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마음이 쏙 빠져나간 껍데기만 바라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여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복음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은 껍데기만 남은 외식주의자와 열매 맺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거짓말쟁이를 참된 예배자로 바꿉니다. 우리 아버지는 영으로 그리고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요 4:23).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방법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 삶의 전부를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을까요? 2절입니다.

①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②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③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울은 먼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대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 세대”를 가리켜 “악한 세대”라고 말합니다(갈 1:4). 빌립보서에서는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라고 말합니다(빌 2:15). 이 세상은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 세상입니다(고후 4:4). 그것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NIV영어 성경에는 “더 이상”이라는 말이 붙어있습니다. 예전엔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습니다(엡 2:2).

그런 삶은 절대로 하나님께 열납되는 예배자의 삶이 아닙니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복음을 몰랐을 때의 일입니다.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자비를 얻은 자는 이 세상 속에서 살지만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 생각을 빚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대의 삶을 은근히 좇으며 흉내내서는 안 됩니다(흙수저, 갑을, 데이트). 그럼 무엇이 복음에 합당한 삶일까요? 어떻게 내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칠 수 있을까요?

②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이것이 우리가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문제의 본질은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7:21-23).

다른 많은 종교에서는 사람의 겉을 깨끗하게 하면 속이 깨끗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적 수련과 고행을 감행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종교인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부르십니다. 겉은 번지르르해도 속은 부패한 시체가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시작점이 다릅니다. 안에서 시작해서 밖으로 흘러갑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삶을 변화시킵니다.

“변화를 받으라”는 표현은 성경에 총 4번 등장하는데, 흥미롭게도 모두 예수님의 변화되신 모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절과 마가복음 9장 2절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신 것을 언급하는데, 마태복음 말씀에 따르면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여졌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다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말합니다.

결국 “변화를 받으라”는 주의 영 곧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신 영광스러운 형상이 이루어지는 변화에 대한 설명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이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복음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고,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변화를 일으키는 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변화하라”가 아니라 “변화를 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오랜 과정에 꼭 필요한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주신 새 마음, 성령이 기뻐하시는 뜻에 합당한 생각으로 우리의 오래된 옛 생각을 계속해서 새롭게 바꾸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치 있게 우리 생각을 “리프로그래밍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더글라스 무, 756).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의 생각, 가치관으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날마다 바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원리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동시에 우리가 참여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유사한 가르침을 전합니다(엡 4:17-24). 17~19절까지 말씀을 요약하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입니다. 20~21절까지의 말씀은 “너희는 예수님께 배우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합당한 삶의 변화의 과정은 22-24절에 나옵니다. 22절은 옛 사람을 버리는 것, 24절은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특징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려는 것이고, 새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것입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 생각의 방식, 가치관을 보입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변화, 이 변화는 어떻게 일어납니까? 23절에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가 바로 그 비결입니다. 우리의 마음, 생각, 가치관이 새롭게 교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롭게 변화된 마음으로 첫째,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일, 둘째, 하나님이 지으신 새 사람을 입는 일을 합니다.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③”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마지막 바울의 표현은 앞서 말한 것을 중복하여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가 우리 마음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제 삶으로 이어진 결과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분별하라”는 말은 아직 마음과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분별하다”를 흠정역은 더 정확하게 번역했는데, 바로 “입증하라”입니다. 이 말은 “실행하여 사실임을 확인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증된 것으로 받아들이다’(BDG)는 뜻을 가집니다. 누가복음 14장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간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시험하는 것이 바로 여기서 사용된 “분별하다”의 뜻입니다.

우리는 변화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하지만 단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여 정말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고, 선하게 여기시는 뜻이며, 온전하신 뜻이라는 것을 확증하여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고 맺게 하시는 열매를 보면서 그분의 방법과 뜻이 옳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확증된 하나님의 뜻, 우리 삶의 각 영역에 두고 계신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하고 기뻐하시는 뜻을 12장 3절부터 15장 13절까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세상에서, 사회에서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되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삶으로 그 지식을 실현해야 하는지, 복음을 살아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그것에 관해 나중에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 설교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절대 가치 없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삶입니다. 고귀한 가치를 갖습니다. 여러분 삶의 어떤 영역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간, 물질의 일부가 아니라 여러분 자체가 전부 다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으로 새롭게 지으심을 입은 하나님의 예배자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 우리 하나님만 섬깁니다. 언제 어디서나 여러분은 예배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그런 예배자로 살기 위해 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따르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알고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로 변화되십시오. 주야로 그 뜻을 알고자 성경을 묵상하십시오.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아는 것을 삶으로 확증하며 살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전도 아닙니까?

사람들은 질그릇 같은 우리를 보며 비웃을지 모르지만 우리 안에 담긴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보면 비웃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웃, 직장 동료, 가족이 그리스도인이 왜 그렇게 사냐?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냐고 물을 때,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답하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