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본문: 사도행전 27장
설교자: 조정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출발하여 로마까지 호송되는 긴 항해 여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누가는 뱃사람이 아니라 조금은 어설픈 표현을 사용했지만, 현장에 없던 사람은 절대 꾸며낼 수 없는 상세한 표현으로 이 과정을 기록했다(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1절). 이 여정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했다(2절). 그는 에베소 폭동 때 극장에 끌려간 성도로(행 19:29; 20:4), 바울의 수행원으로 동행했고 누가는 배에 필요한 주치의로 함께 했을 것이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은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겨져 배를 두 번 타는데, 첫 배는 시돈에서 무라까지 가는 연안선이었고 아무 문제 없이 항해했다. 하지만 두 번째 배는 무라에서 로마까지 가는 큰 배였으나 폭풍을 만나 파선했다.
21세기에도 배가 침몰하면 사람들은 혼돈에 빠진다. 아무리 구명조끼 및 안전 도구가 잘 구비되어 있어도 깊이를 알 수 없고 끝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배가 침몰하면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이천 년 전 항해는 더더욱 안전과 거리가 멀었다. 수시로 부는 광풍과 폭풍 때문인데, 10월 중순에서 3월 중순까지는 항해가 아예 불가능할 정도였다. 항해술도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이어서 나침반도 없이 별을 보며 운항해야 했다.
한달이 넘게 표류하는 배에서 모두가 불안과 공포에 떨 때, 자유로운 단 한 사람이 있었다. 모두 영혼의 파멸을 피부로 느낄 때 영혼의 안전함을 확신했던 사람, 바울이다. 어떻게 바울은 침몰하는 배 안에서 평안을 느낄 수 있었을까?
긴 항해를 종종 인생에 비유한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시로 부는 광풍과 폭풍을 만난다. 오래 표류하기도 하고 심지어 믿음에 관하여 파선할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딤전 1:19). 어떻게 우리는 험악한 바닷길 같은 인생에서 ‘내 영혼이 안전하다’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 영혼 평안해’라고 노래할 수 있을까?
1. 바울의 여정(1-20)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육로를 통해 시돈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해변을 순항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탔다(2절). 백부장 율리오의 호의로 시돈 성도에게 대접을 받은 바울 일행은 곧 거기서 떠나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렀다(4-5절). 서방 사본에 따르면 이 여정은 약 2주를 소요했다. 여기까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일행은 이달리야 행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탔다(6절). 로마의 주된 곡식을 운송하는 큰 배로 많은 양의 곡물과 사람(276명, 37절)을 태울 수 있었다. 이때부터 풍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틀이면 도착할 니도에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도달했지만 더 이상 갈 수 없어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삼아 항해하기로 했다(7절). 일단 그레데 섬 라새아 부근 미항에 멈췄다(8절).
여기까지 오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누가는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다고 했는데, 많은 학자가 지지하는 59년에 이 일이 있었다면 유대인의 금식하는 대 속죄일인 10월 5일이 지난 시점 즉 항해가 불가능한 시점이 된 것이다(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9절: 짧은 낮, 긴 밤, 조악한 시야, 구름, 폭풍, 폭우, 폭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10절). 수년간 전도를 위해 여러 번 지중해를 항해한 경험에 의하면 미항에서 겨울을 나는 것이 백번 옳았다. 하지만 바울이 선장인가? 선주인가? 한 죄수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래서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대로 미항보다 겨울을 나기 좋은 항구 뵈닉스까지 가기로 했다(11-12절). 하루면 갈 수 있는 짧은 거리였다. 마침 순한 남풍이 불어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안심한 그때 갑자기 유라굴로라는 광풍(타이푼)이 크게 불어닥쳤다(14절).
이때부터 배는 통제 불능이 됐다(15절). 하루만 이동해서 겨울을 편안하게 보내려고 했던 계획은 순식간에 망가졌고 거의 한 달간 불안과 공포에 벌벌 떨며 혼동하는 표류에 빠졌다.
그래도 한 달을 그들이 버틸 수 있었던 건 가우다라는 작은 섬에서 긴급 조치할 틈을 얻었기 때문이다(16절). 그들은 1) 거루를 잡아 끌어올리고 2) 줄로 선체를 둘러 감고(배를 꼭 잡아 맴), 3) 연장을 내렸고(큰 돛대의 하활을 내림), 4) 짐과 기구를 내버렸다(16-19절). 파도와 폭풍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배를 가볍게 하여 더 떠오르게 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20절). 아무 소용이 없었다. 희망의 마지막 불씨까지 모두 꺼져버렸다.
2. 바울의 확신(21-26)
타고 있던 비행기 양 날개의 엔진이 멈춰버렸다고 상상해보라. 우리는 인생이란 항해에서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위기를 종종 겪는다.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모든 노력과 수고가 소용 없을 때, 아무리 생각해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을 때. ‘이제 끝이구나’ 자포자기 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때 바울은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 식음을 전폐한 사람들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21절). ‘내가 뭐랬어’라는 타박이 아니다. 그들을 동정하고 마음을 헤아리면서 동시에 자기 말의 신뢰성을 높이는 말이다. 그가 하는 다음 말을 믿어 주길 바랐다.
모두가 구원의 소망이 전무하다고 느꼈던 그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22절). 안심하라고? 혼자 다른 배에 타고 있는건가? 큰 풍랑이 그대로 있는데? 무엇을 근거로 안심하라고 하는가? 어떻게 바울은 평안한가? 무슨 근거로 모두 안전할 거라고 확신하는가?
여기 바울이 확신했던 근거가 나온다. 그의 영혼이 폭풍 중에 평온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3-24절)
바울도 폭풍 중에 크게 흔들리는 배 위에 있었다. 눈앞엔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나아질 것 같은 기미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를 둘러싼 상황이 하는 말이나 그 상황에 압도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염려와 근심으로 자기 영혼이 내는 소리도 안 믿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다. 말씀하신 그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은 종종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이와 같은 믿음을 발견하기 원하신다. 그럴 수 없을 때에 하나님 말씀을 붙들기를, 말씀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믿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그들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때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신다(롬 4:18). 그리고 말씀하신 그대로, 믿음대로 이루신다.
그분은 생리가 끊어진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앞에는 바다, 뒤에는 군대가 에워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서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행하는 구원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앞에 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폭풍을 만난 배 안에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주무시다가 일어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타이르신다.
결국 상황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든 내면의 소리가 내는 소리가 무엇이든 상관 없다. 우리 믿음을 하나님께 두면 우리는 안전하다. 우리는 평안하다. 결혼, 출산, 양육, 취업, 건강, 구원, 사업 등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모두 세세히 말씀해주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다음을 확신할 수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롬 8:3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롬 8:39).
하나님이 우리 삶에 두신 뜻을 온전히 이룰 그 날까지 그 무엇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 바울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사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달려갈 길을 다 마칠 때까지 반드시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실 것이다. 당신은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는가?
3. 바울의 구원(27-44)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되게 하셨을까? 바울의 믿음대로 됐을까? 벌써 열 나흘째가 됐다(27절). 여전히 배는 파도와 폭풍에 따라 정신없이 이리 저리 쫓겨가기를 자정까지 계속했다. 그런데 보니까 육지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물 깊이를 재어 보니 스무 길(37m)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27m), 점점 뭍을 향해 가는 게 분명했다(28절). 하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암초에 부딪힐 위험이 컸다. 그래서 일단 네 닻을 내려 배를 고정하고 날이 밝으면 뭍으로 가기로 했다(29절).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몇몇 사공들은 도망하려고 닻을 내리는 척하면서 몰래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바울이 이를 알고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말했고, 이에 군인들이 거룻 줄을 끊어 거룻배를 떼어 버렸다(31-2절). 바울이 그만큼 신뢰받는 상황이었고 또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그가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날이 새어 가자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음식을 권했다. 그들은 혼돈과 공포 속에 음식을 잘 챙겨 먹지 못한지 십사일이나 됐다(33절). 그들의 원기 회복을 위해(구원, 34절) 음식이 분명 필요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격려한다. “너희 중 머리 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34절).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배에 있는 이백칠십 육명의 사람들도 바울의 확신에 찬 말에 안심했고 음식을 먹었다(36절). 폭풍 치는 바다 위에서 하나님 말씀에 확신에 찬 바울이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대표로 하나님께 축사 기도하는 장면은 참 아름답다.
식사 후 남은 모든 곡물(밀)을 바다에 버렸다(38절). 배를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배를 댈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의논하여 결정한 후(39절), 닻을 끊고 키를 풀어 배가 육지를 향하게 하고, 돛을 올려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해 전속력으로 나아갔다(40절). 살기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이 한 번의 기회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배는 그만 바다와 바다가 만나는 곳에 형성되는 끈끈한 진창, 모래톱에 처박혔다. 이물 곧 배의 앞부분은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됐고, 뒤쪽에서 부딪치는 거대한 파도가 배를 점점 부서뜨리기 시작했다(41절).
바울은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22절). 배는 손상됐다. 하지만 배에 탄 사람은 아직 아무도 생명에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군인들이 죄수들을 죽이려고 했다(42절). 이 틈을 노려 뭍으로 도망쳐 사라지면 군인들이 그 죄수가 당할 형벌을 대신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백부장을 통해 바울을 보호하셨다(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43절). 헤엄칠 줄 아는 사람은 헤엄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널조각이나 배 물건을 의지하여 육지에 나가게 했고 마침내 모든 사람이 다 상륙하여 구조됐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된 것이다(44절).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는 일들, 조바심 나게 하고 낙심하게 만드는 일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상세히 말씀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쉽게 믿을 텐데. 어쩌면 이런 마음 깊은 곳엔 얕은 해안 주변을 다니며 아주 작은 믿음만 가지고 살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인생의 긴 항해, 망망대해를 지날 때 어떤 위험과 환난이 불어닥칠지 모르는 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믿음을 배운다. 조롱과 핍박, 무거운 죄의 짐과 그 위에 쏟아져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목숨이 끊어지는 고통 중에도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될 것을 믿으셨다(믿음의 주, 히 12:2).
기독교의 믿음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고 막연한 믿음에 ‘예수님’ 이름만 차용하는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심지어 목숨을 잃게 될지라도 나의 하나님이 반드시 말씀하신 그대로 선을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는가? 주님은 언제나 그것을 물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