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
본문: 갈라디아서 5장 16~24절
설교자: 이병권

 

오늘은 제헌절, 헌법을 제정하고 공포한 것을 기념하는 국경일입니다. 오늘이 법을 제정하고 공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하니까 특별히 로마서 8장의 말씀이 생각나서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자유로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다른 복음을 듣고 율법을 통해 의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매여서 주님이 허락하신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오해했고 자유를 잘못 사용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셨지만 우리도 자유를 오해함으로 내 욕심을 위해 잘못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통제된 자유이며 사랑으로 섬기는 자유입니다. 자유는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주님께서 자유를 허락하셔서 그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고,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어느 성도님과 공부를 하면서 이런 고민을 듣고 교제한 적이 있습니다. 구원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성도님이었는데, 그분은 자기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자기가 어떻게 이런 사랑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정말 주님께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자기 마음의 큰 짐이 있다는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 감사하니까 더 잘해야 될 것 같고 잘하고 싶은데 이런 것들이 자기에게 너무 스트레스가 되고 괴롭다는 것입니다. 생각처럼 잘 안 될 때가 너무 많아서 그렇게 자꾸 실수하고 잘못하니까 주님께 너무 죄송스럽고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고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이 실망스럽고 이게 정상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도 그래요 저도 똑같아요.’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 해야 되는 일들이 짐스러울 때도 있고 하기 싫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싫고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내 원하는 만큼 잘 안되니까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마음이 다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분에게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그 가운데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갈등을,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말합니다. 우리 안에서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싸움의 실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싸움이 왜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

서로 대적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싸웁니다. 절대로 함께 할 수 없고 조화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육체와 성령입니다. 여기서 육체는 죄 된 본성을 말합니다. 하나님 성품에 반하는 것으로 죄를 좇는 것입니다. 죄로 즐거워하고 죄를 따르려고 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육체는 성령을 거스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서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가지가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싸움입니다. 저 바깥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아닙니다. 눈과 귀를 닫으면 그냥 무시할 수 있는 그런 싸움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내 마음이 전쟁터입니다.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계속 싸우는 중입니다. 이길 때도 있지만 질 때도 많습니다. 이 싸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면서 또한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입니다. 시간을 정해두고 싸우기도 하고 쉴 때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싸우고 또 싸우고 또 싸웁니다. 끝이 없습니다.

정말 치열한 싸움이 우리 안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힘겨운 싸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 이런 싸움이 있는 걸까요? 싸움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 싸움의 이유는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기에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은 원래 육체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짓고 죄를 따르며 죄를 좇아 살았습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이 익숙한 우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내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 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성령님이 계시기에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육체의 몸을 입고 사는 날 동안에는 싸움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괴롭고 힘들지만, 하지만 이 싸움은 내가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는 감사한 일이기도 합니다. 내 영혼이 살아있기에, 내 안에 성령이 계시기에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싸울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육체의 욕심으로부터 저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따라 살지 않고 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시기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다면 싸움도 없습니다. 싸움이 없다면 성령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싸움이 있습니까? 죄와 싸우려는 치열한 싸움이 있으십니까? 육체의 욕심을 버리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지겹도록 계속되는 싸움,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그러한 싸움이 없다면 여러분은 스스로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왜 나에게 그러한 싸움이 없는지, 성령님이 정말 내 안에 계시는지, 성령님이 정말 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그러한 싸움이 없다면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성령님이 없거나 아니면 영적으로 크게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초자연적으로 들어오셨고 그분의 뜻대로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죄로 오염된 우리 마음에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오염된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며 내 삶에서 죄를 몰아내십니다. 내 마음이 죄와 싸워 이기게 하시려고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싸우고 계십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의 이유, 그 이유는 성령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왜 싸움이 있는지 알았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어떻게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싸움의 방법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명령을 의미 그대로 말하면 성령을 따라 걸으라는 말입니다. ‘행하라’라고 번역된 단어가 ‘걷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계속해서 성령과 함께 걸어가라 라는 명령입니다. 다시 말하면 삶에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기억해야 하는 방법은, 우리가 배우고 습득해야 하는 기술은 성령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가면, 그분에게 발맞추어 걸어가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내 삶을 정렬하면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며 우리의 방향을 안내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걸으면 그 결과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을 따르면 자연스러운 결과로 육체의 영향력은 떨어지게 됩니다. 성령을 따르고 가까이 할수록 육체는 힘을 잃고 멀어지게 되는 겁니다.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써 우리는 육체로 만족하는 삶을 피할 수 있습니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육체의 욕구를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싸움에서 지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의 지배를 받아 성령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 그분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 싸움의 방법입니다.

마치 시소 같습니다. 한쪽에 무게를 두고 한쪽에 힘을 줄수록 다른 쪽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가 싸움에서 이기려면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싸움의 기술, 단 하나의 방법은 성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싸움의 방법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성령을 잘 좇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가 성령을 따라 잘 살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성령을 좇아서 살아간다면, 성령을 따라 걸어간다면, 그렇게 우리의 삶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그 결과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싸움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싸움의 열매는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싸움의 열매라 할 수 있는 두 가지 대조되는 목록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심으로 나타나는 열매와 반대로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열매를 대조한 것입니다. 먼저 육체의 욕심을 따랐을 때 얻는 결과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바울이 이렇게 여러 항목들을 기록하는 것은 하나하나의 항목들을 세세하게 구분하고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또 그와 같은 것들”(21)이라고 하면서 여기 언급된 목록이 전부가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단지 일부를 말하고 있고 이 외에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항목들을 말한 것은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어떻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까?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누군가에게 이러한 열매가 계속해서 나타난다면 그것은 그 사람 안에 성령이 없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에 빠져서 그 죄에 맞서 싸우지 않고 계속해서 육체의 욕심을 위해 사는 사람은 주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을 아직은 새롭게 하지 않으셨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이렇게 강한 경고를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 구원의 확신을 흔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안일한 생각과 오해를 바로 잡으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가 육체의 욕심을 따랐을 때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 너무도 쉽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으니 이런 죄들과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죄의 무게와 무서움을 너무도 가볍게 여기는 겁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거나 화를 낸 경우에도 그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좀 안 좋은 일을 했지만 주님께서 용서해주셨으니 넘어갑니다. 다른 사람과 다투고 화를 풀지 않고 여전히 원수 맺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나누어진 상태로 있으면서도 여전히 술 취함이나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으면서도 마치 그래도 되는 것처럼 괜찮은 것처럼 덮어두고 넘어갑니다. 내 마음에 따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내 뜻대로 선택하는 겁니다. 내 마음이 아니면 죄를 따르면서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성령이 없는 자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죄에 대해서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뉘우치며 돌이키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싸움의 열매는 이런 열매가 아닙니다. 정반대에 있습니다. 육체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을 좇아 살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이 원하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사람의 모습으로,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 성령의 열매라고 할 때 아홉 개의 항목을 나열하면서 복수가 아닌 단수로 기록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개의 열매가 아닌 하나의 열매라고 합니다. 마치 포도가 여러 알갱이가 모여서 하나의 포도송이를 이루는 것처럼 성령의 열매도 나눠진 아홉 개의 열매가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이 맺게 되는 하나의 열매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떤 열매는 있지만 어떤 열매는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은사와 다릅니다. 성령의 은사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은사들이 서로 다르게 주어지지만 성령의 열매는 믿는 자가 맺게 되는 공통되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싸움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욕심을 따라 맺어지는 육체의 열매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떤 열매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이 성령의 열매를 더 풍성히 맺기 위해서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

성령의 열매는 단순히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우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 그 일을 합니다.

여기 말씀에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우리에게 행해진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은 우리 자신입니다. 바울은 2장 20절에서 자신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했었는데, 여기 말씀에서는 그와 다른 측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육체의 욕심과 죄를 따르려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내가 못 박았습니다. 내가 과거에 한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계속 그 일을 기억하며 십자가에 못을 받은 자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기 위해서 성령을 거스르는 육체를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살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내가 주인 되고자 하는 자아, 나의 이기심과 죄악 된 욕구와 육체의 욕심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을 십자가의 형벌로, 십자가에 못을 박는 것으로 말합니다. 육체의 욕심에 대해서 철저하게 등을 돌리고 거절하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육체의 욕심에 대해서 조금의 기회도 주지 말고 정말 냉혹하게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이렇게 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방해가 있을 것이고 주저하는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호하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 열매를 풍성히 거두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면 상관없습니다. 어떻게 살든 어떤 열매를 맺든 육체의 욕심대로 살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하였고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다르게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이 그러합니다.

혹시 아직도 버리지 못한 육체의 욕심이 있다면, 아직도 가지고 있는 육체의 열매가 있다면, 아직 정리하지 못한 죄가 있다면, 아직 버리지 못한 죄의 습관이 있다면, 과감하게 나의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 바랍니다. 죽이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주님께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에 있는 주님이 미워하시는 육체의 욕심을 버릴 수 있도록, 정말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곳에서 구하지 않도록, 주님 안에서 내가 어떤 자인지 잊지 않도록,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말씀을 통해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대해서 싸움의 이유와 싸움의 방법, 싸움의 열매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에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성령님을 따릅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분을 좇아 살아갑니다. 그러면 우리는 삶에서 성령님이 주시는 열매를 풍성히 거두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지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 끝이 온다는 것입니다. 끝이 없어 보이지만 분명히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옵니다. 그래서 싸움이 끝나는 날에 우리는 진정한 승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의 최종 결과는 이미 확정되어 있고 결국은 우리의 승리로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승리가 보장된 이 싸움, 힘겹지만 그래도 싸워볼만하지 않습니까? 이 싸움에서 성령님이 함께 하시니 우리가 그 능력을 의지함으로 힘을 다해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