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본문: 누가복음 22장 21절~34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 본문은 사람의 연약함을 낱낱이 보여줍니다. 가룟 유다는 돈 몇 푼 때문에 삼 년이나 가르치고 돌봐준 스승을 언제 팔아넘길지 고민합니다. 나머지 열 한 제자는 곧 있으면 잡혀 처형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스승 앞에서 그러면 이제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라고 말하며 싸웁니다. 그 제자들 중 으뜸인 베드로는 좀 다를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왜 이리 연약할까요? 금방이라도 주님을 위해 목숨도 내어 줄 수 있을 것처럼 각오했는데, 얼마 있다가 별 거 아닌 일로, 육체의 정욕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처럼 기뻐하다가도, 얼마 있다가 주를 버리고 다른 것으로 마음을 채웁니다. 크게 낙심하고, 넘어지고, 후회하고… 그것을 무한 반복하는, 사람은 참 연약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교회의 기둥이었던 사도들 역시 그런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제가 사도 중 한 사람이었다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 장면만큼은 편집해달라고 누가에게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부끄러운 그들의 연약한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누가를 통해 이 사건을 분명하게 기록하셨고, 거기에는 우리 모두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은혜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 가운데 의지할 수 있는 참된 위로와 힘이 되길 원합니다.
1. 첫째 장면: 가룟 유다(21~23절)
배경: 오늘 사건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눴던 니산월 14일 목요일 저녁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준비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전통 예식에 따라 식사하시면서 유월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유월절 떡은 죄인을 위해 찢길 예수님의 몸, 포도주는 죄인을 위해 흘릴 예수님의 피를 의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몇 시간 후부터 예수님에게 일어날 일은 바로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영원한 평화 언약을 맺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창세 전에 계획되어 구약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예언되어 온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요 1:29). 이제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은 요한의 말대로 세상 죄를 대신 지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화목 제물이 되기 위해 잡힐 것이었습니다. 유월절 날 양이 잡혔던 것처럼 말입니다.
죽음을 몇 시간 앞두고 있을 때 사람의 마음이 어떨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병상에서 평온한 죽음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사형대 위에서 죽는다면 어떨까요? 종종 우리는 잊어버리지만, 사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죽음, 그것도 가혹한 심문과 사형을 눈 앞에 두고 계셨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으로서(고후 5:21) 한 번도 범한 적이 없었던 죄, 그것도 인류의 모든 죄를 떠안을 예정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습니까? 그리고 그 죄로 인해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누렸던 친밀하고 달콤한 관계가 단절되는 슬픔을 당할 것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곧 버림받을 것이었습니다(마 27:46).
우리가 아무리 그 마음을 헤아려보려 한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다락방을 떠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땀 흘리며 기도하셨을 때, 그 슬픔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정말 이 땅에서 가장 연약해질 수 있는 시간에 이르렀습니다. 얼마나 괴로웠던지, 후에 제자들에게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4:34). 그리고 지금은 그 괴로운 심령으로 한 상에 둘러앉은 제자들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요 13:21).
21절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방금전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몸이 찢어지고 내 피가 흘러 너희와 하나님 사이의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끝까지 사랑하신 제자들, 한 상에서 함께 그 의미를 기억하며 떡과 잔을 먹던 그들 가운데, 예수님을 팔아 넘길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기하던 수많은 서기관이나 대제사장 중 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헤롯을 따르던 헤롯 당원도 아니었고, 심지어 귀신 들린 사람이 마귀의 계략에 따라 예수님을 판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삼 년이나 따로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치고 돌본 사랑하는 식구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가르침과 놀라운 기적을 눈으로 보고 경험한 제자, 아름다운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을 모두 맛본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배반했을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을까요?
우리는 그가 가룟 유다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가 대제사장을 은밀히 찾아가 은 삼십에 예수를 넘기기로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마 26:14~16). 그때부터 그는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단돈 은 삼십, 노예 한 사람값에 자기의 스승, 한때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돈 때문에 그는 예수를 팔았습니다.
사탄이 그에게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고(요 13:2), 그는 그 악한 욕구에 따라 푼돈에 구세주를 팔아넘깁니다. 그는 도둑이요(요 12:4~6), 악인이며(요 6:70), 멸망의 자식이었습니다(요 17:12). 그런 유다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죄인 중의 괴수로 판단할 때가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의 모습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수많은 이유로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내 건강이 예수님보다 먼저이고, 자식이 예수님보다 더 중요합니다. 유다처럼 돈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자존심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한때는 사랑의 주님, 내 삶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다가도, 내 손에 은 삼십이 쥐어지면, 내 자존심이 다칠 것 같으면, 안락과 명예를 얻을 수 있다면, 심지어 육체의 정욕, 욕심, 탐심 등 무엇이든 내가 갈망하는 것이 쥐어진다면, 언제든 예수님을 쉽게 팔아버립니다.
여러분, 이렇게 한없이 연약하고 악한 내 육신의 실체와 마주한 적이 있으십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런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한 상에서 먹고 마시며 자기를 팔아넘길 기회를 엿보는 이 배은망덕한 제자를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그래 이 놈아, 배신자는 바로 너다”라고 밝히 드러내며, 그 자리에서 엄벌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 자리에서 멸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2절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팔려서 잡히는 것은 모두 다 너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다 너의 죄 때문이라고 호통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가 이렇게 팔려서 심문받는 곳으로 끌려가는 것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으로 하나님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시편 41편 9절을 보면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행 2:23) 가까운 친구의 배신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에게 화를 퍼붓지 않으시고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실 화에 대해 사랑으로 경고하십니다. “나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비록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허락된 일이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을 판 죄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죄의 대가를 그가 고스란히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화를 받을 유다를 염려하십니다. 그래서 유다에게 어쩌면 마지막으로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너는 네 뜻대로 하겠느냐?”
유다의 연약함에 예수님은 윽박지르지 않으셨습니다. 저주를 퍼붓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끝까지 유다를 사랑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연약한 순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예수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윽박지르지 않으십니다. 저주를 퍼붓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돌이키기를 끝까지 원하십니다. 연약하여 넘어졌을 때, 돌아서서 손을 내밀고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손을 붙잡고 회개하며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23절을 보시면 ‘그들 중 한 사람이 예수를 판다’는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도대체 누구인가? 서로 묻기 시작했습니다.
23절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고 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2. 둘째 장면: 열 두 제자들(24~30절)
24절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조금은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갑자기 왜 그들은 누가 크냐고 싸우기 시작한 것일까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크냐’고 싸우고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어찌 보면 상황은 매우 자연스럽게 흘러갔습니다. 처음엔 서로 “네가 주님을 팔 사람이 아니냐?”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서로 아니라고 말했겠죠. 그러다가 그들은 예수님께 “주님, 저는 아니지요”라고 묻습니다(마 26:22). 조금 유치하지 않습니까? 자기는 아니라는 확답을 주님께 받고 싶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나는 아니지만, 너는 그럴만 해’라는 마음이 감춰져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얼마나 예수님과 가까운지, 예수님에게 충성된 사람인지, 예수님이 자기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베드로였다면, 물 위를 걸어본 적이 있냐고 묻거나,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빛나는 영광을 눈으로 본 적이 있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누가 크냐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곧 잡히셔서 심문당하고 고통과 치욕을 받고 죽게 되시는데, 그 제자들이라는 사람은 누가 가장 큰 자인지 싸우고 있습니다. 이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두 번도 아니고, 길에서 누가 크냐고 싸우고, 엄마를 동원하여 예수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로비를 하질 않나, 그 소식을 듣고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분을 내질 않나, 실컷 떡과 잔의 의미를 설명하며 가장 겸손한 십자가의 자리로 내려가실 예수님 앞에서 또다시 누가 가장 큰지 싸우며 교만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제자들… 정말 너무하지 않습니까?
저 같으면, 상을 뒤엎고 “됐다, 너희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내가 너희를 내 사도로 삼고, 교회의 기둥으로 삼으려 했다니…” 이렇게 호통치며 후회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기꺼이 그들에게 다시 한번 온유하게 가르쳐주십니다. 처음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삼 년 내내 수없이 말씀하셨을 겸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절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예수님은 여러 번 이와 유사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마 18:2; 20:26; 막 9:35). 한 번은 직접 어린아이를 앞에 세워 두고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춰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 임금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권력자들은 권위를 가지고 위에서 군림하는 일을 하고, 권력을 잡고 있는 집권자들은 사람들에게 “은인”이라고 칭함을 받지만(당시 로마 황제, 군주, 신들에게 은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그 권위를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찬양했습니다), 너희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칙은 세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큰 자가 젊은 자와 같다.” 우리말 성경에 따르면, “너희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돼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장 어린 사람은 유대 사회에서 마땅히 연장자를 존중하고 겸손히 섬기는 자세를 갖습니다. 가장 큰 사람은 마땅히 그렇게 섬기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말씀도 동일한 원리입니다.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높임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약 4:6). 교만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겸손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절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이것은 예수님의 실물 교육입니다. 말씀으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 생각해봐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당연히 너희처럼 그렇게 자리에 비스듬히 앉아 시중을 받고 건네주는 음식을 먹는 자가 큰 자가 아니냐? 이 땅에선 노예가 서서 봉사하고, 주인이 앉아서 먹지 않느냐? 그런데 봐라.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있지 않으냐?”
그들이 자리에 비스듬히 앉아 서로 누가 가장 큰 자인지 싸우고 있을 때, 정작 그 옆에 서서 그들을 섬기고 있던 분은 그들이 “주”와 “선생”이라고 말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봐라, 하나님 나라에서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다”라고 예수님은 직접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사뭇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28절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절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절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의 힘이 느껴집니다. 그분은 자기 눈앞에서 서로 가장 크다고 싸우는 교만한 제자들에게, 그들이 받을 복에 대해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주님과 항상 함께 한 그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이 맡기신 나라를 맡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그 나라에서, 내 상에서 먹고 마실 것이고, 보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교만하게 서로 높아지려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쉽게 교만이라는 죄에 빠집니다. 성도 안에서 자존심을 내세우고, 서로 비교하며 판단합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교만은 다른 모든 죄가 자라는 토양이자 모든 죄를 낳는 부모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번 죄를 짓고 넘어지는 우리의 연약함 그 뿌리에는 교만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왜 사람을 미워합니까? 교만해서입니다. 왜 성도를 용서하지 못합니까? 교만해서입니다. 왜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지 못합니까?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이유 역시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눈으로 자신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축복에 충분히 감사하지 못하는 죄, 그 근본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내가 진정 어떤 자인지 잊어버리고 감히 교만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감사한 것은 교만한 우리 중에 예수님은 지금도 섬기는 자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 보좌 옆에서 중보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온유하게 하나님의 뜻을 성령을 통해 계속해서 반복하여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에 대해 계속해서 확증해주십니다. 우리를 그 은혜로 이끌어 가십니다
연약할 때, 교만하여 넘어질 때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분이 연약한 우리에게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 때,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복을 보여주실 때, 우리는 다시 일어나 주님 앞에 원래 우리의 자리로, 그 겸손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제자들 중 으뜸, 수제자 베드로를 만날 차례입니다.
3. 셋째 장면: 베드로(31~34절)
31절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제자로 부르심을 받기 전 이름인 “시몬”을 두 번 반복해서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31절에 “사탄이 너희를(복수)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기 위해 밀을 까불고 다듬을 때 이리저리 흔드는 것처럼, 사탄이 베드로와 제자들의 믿음을 뒤흔들기 위해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욥을 시험하려고 사탄이 하나님께 요구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모두 자기를 버릴 것을 아셨지만, 그 배신감으로 그들을 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니 돌이키고 다른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세워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럴 일은 전혀 없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33절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저는 주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심지어 함께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다시 한 번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그것이 베드로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드릴 수 있을만큼 주님을 사랑한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34절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아마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아니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주와 함께 죽일지언정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마 26:35). 그것이 베드로의 진심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베드로의 뒷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한 그 날,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진짜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두려운 마음에 연약하여 넘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렇게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데, 정말 진심인데, 왜 이렇게 넘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베푸신 사랑과 은혜에 정말 감사한데,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것이 진심인데, 왜 자꾸 그분이 미워하시는 일을 골라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해서, 죄를 사랑해서, 나를 너무 사랑해서, 주님을 부인하는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할까요?
베드로의 뒷 이야기를 살짝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야기는 54절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셨고,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갑니다. 한 쪽에서 예수님은 심문을 당하고 조롱과 핍박을 받고 계셨고,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에 베드로는 몰래 앉았습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의 얼굴을 보면서 “이 사람도 저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실이라면 예수님과 함께 그 자리에서 심문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곧바로 베드로는 “이 여자야, 내가 그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조금 후에 또 다른 증인이 등장합니다. “너도 분명 예수파다”라고 하자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한 시간). 예수님의 심문은 계속 진행중이었고, 베드로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또 다른 증인이 나타나 장담하면서 “이 사람은 참으로 저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한다”고 이야기 하고(맹세, 부인, 마 26:72),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닭이 울었습니다. 닭 울기 전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주와 함께 옥에 갇히고 죽겠다고 말했는데, 진심이었는데, 닭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자신의 한없는 연약함이 여실히 드러나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때 61절을 보시면,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왜 보셨을까요? “거봐, 내가 뭐랬어? 니가 그렇지 뭐” 그런 의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신 것은 이런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야, 나는 네가 연약하다는 걸 이미 알고 너에게 이야기 했었다, 그러니 기억해라.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는 것을, 반드시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해야 한다”
닭 울음 소리에, 한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통곡하였지만, 또 한 사람은 그 소리에 연약한 제자를 생각하여 그를 돌아봤습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낙심하지 않고 돌이켜 믿음을 굳게 세우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연약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반할 때도 있고, 제자들처럼 교만할 때도 있고,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연약할 때, 회개하라고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교만할 때, 온유하게 가르치시고 영원한 축복을 은혜로 약속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믿음이 약하여 넘어질 때,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기도하시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연약하여 넘어질 때마다, 돌이켜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