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꿈을 해석하는 요셉
본문 : 창세기 40장
설교자 : 이병권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꿈을 해석합니다. 요셉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입니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오늘 이야기도 이 속담이 통할지 아니면 다르게 표현해야 할지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인 40장은 ‘만남, 두 개의 꿈과 해석, 그리고 성취’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요셉은 두 사람과 만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꿈을 해석하고 요셉이 해석한 대로 꿈은 성취됩니다.
이 일이 벌어지는 장소는 39장에 이어서 여전히 감옥입니다. 요셉은 이 감옥에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요셉의 나이가 스물여덟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2년 후에 애굽의 왕 바로 앞에 서게 되는데 그 때 나이가 서른입니다. 그래서 계산하면 지금 나이가 스물여덟이고, 열일곱 살에 애굽으로 왔으니 그로부터 11년이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 와서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11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요셉, 그의 나이 스물여덟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생애를 이미 알기 때문에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얼마나 더 감옥에 있어야 하는지 억울함은 해결될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요셉은 믿음이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면서, ‘이 꿈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꿈일까? 정말 이 꿈이 이루어 질 수 있을까‘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요셉은 지금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죄수의 신분이었고, 여전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여전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과는 달리 자신을 애굽으로 팔아넘긴 형들은 잘 지내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모함한 보디발의 아내도 잘 지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 없는 나는 이렇게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셉은 두 사람을 만납니다. 감옥에서 만난 두 사람,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입니다. 이 두 관원장은 바로에게 범죄하여 요셉이 있는 감옥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최종 결정을 내릴 때까지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는 것입니다.
관원장은 왕실의 주방장, 왕을 모시는 전속 셰프라 할 수 있습니다. 왕이 먹고 마시는 것을 책임지는 중요한 직책입니다. 독살의 위험이 있던 왕은 자신의 생명을 맡길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자를 관원장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래서 관원장은 왕의 측근이 되어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먼 훗날 이스라엘의 성벽을 재건했던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제국에서 이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일부러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관원장을 요셉은 감옥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만남을 보면서, 이것이 그냥 우연히 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원장이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 안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된 것, 그리고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섬기게 한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다만, 요셉 입장에서는 관원장의 시중을 들면서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지 알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내 삶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신 뜻과 우리를 향한 계획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을 주관하시며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쳐지나가는 작은 일들, 작은 만남들, 크고 작은 사건들, 우리 인생에 오고 가는 작은 이야기들, 우리는 무심코 지나갈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재료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작품을 만드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작은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때로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우리는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과거의 어려움과 아픔을 돌아보면 그런 경험들이 왜 필요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험들은 너무도 아프기에, 너무도 힘겨운 일이에 말처럼 쉽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 일들, 그런 아픔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고통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날이 되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지금 상황에서 요셉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왜 감옥에 있어야 하는지, 왜 이런 모습으로 지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두 관원장이 동시에 특별한 꿈을 꾸게 되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두 관원장이 서로 다른 꿈을 꿉니다.
아침이 되어서 요셉이 관원장의 시중을 들 때, 이들이 근심에 빠져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간밤에 꾼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함과 불안함으로 고민하고 있던 것입니다. 당시에 꿈은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꿈을 꾸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꿈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상황을 파악한 요셉은 관원장에게 꿈을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며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요셉이 말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8) 그러자 술 맡은 관원장이 먼저 입을 엽니다. 그의 꿈은 이러합니다. 자기 앞에 포도나무가 있고 세 개의 가지가 있는데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그 포도를 따다가 즙을 짜서 바로에게 바쳤다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나무에서 포도송이가 열리는 모습인데, 우리가 TV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영상을 보는 것처럼 묘사되는 꿈입니다.
이 꿈에 대해서 요셉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세 개의 가지는 3일을 의미하기 때문에 앞으로 3일 안에 복직되어서 다시 예전처럼 술 맡은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해석에 덧붙여서 그에게 부탁합니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자신의 억울함을 바로에게 알려달라고 합니다.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14-15) 여기 나오는 “생각하고”라고 번역된 단어는 ‘기억하다’라는 말입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술 맡은 관원장의 꿈에 대한 해석이 좋으니까 보고 있던 떡 굽는 관원장도 자신의 꿈을 요셉에게 말합니다. 꿈에서 그는 떡이 담긴 세 개의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있었고, 맨 위에 있는 광주리에는 각종 구운 음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새들이 와서 그것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들어봐도 뭔가 안 좋을 것 같은 불길한 꿈입니다. 이 꿈에 대한 요셉의 해석은 이러합니다. 떡 굽는 관원장은 3일 안에 죽을 것이고 새들이 그 시체를 쪼아 먹는다는 것입니다. 해석을 사실대로 말해주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요셉의 해석을 들은 두 관원장, 이들은 각자 다른 마음으로 감옥에서의 마지막 3일을 보냈을 것입니다. ‘정말 이 자가 해석한 대로 될 것인가’ 초조함으로 마음을 졸이며 감옥 밖에서 전달되는 소식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에게 이 3일의 시간은 어땠을까요? ‘내가 해석한대로 꿈이 성취된다면 감옥에서 나갈 수 있을 거야!’ 이런 기대로 감옥에 나가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3일이 지났습니다. 마침 이 날은 바로의 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큰 잔치가 벌어집니다. 당시 왕들은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을 기념하는 날이나 생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 죄인들을 풀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바로의 생일날, 요셉이 꿈을 해석한 대로 술을 맡은 관원장은 복직되었고, 떡을 굽는 관원장은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말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의 해석대로 된 것을 알았을 때, 요셉에게 큰 격려가 되지 않았을까요? 지금 자신의 처지와는 관계없이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꿈이 틀리지 않았구나! 내가 해석한 대로 이루어졌구나!’ 이것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도 틀리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꿈이기에 분명히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질 것이고 꿈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꿈에 대한 확신을 더욱 굳건하게 했을 것입니다. 비록 11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리고 아직도 기다리고 있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꿈이 이루어질 거라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바로 왕에게 연결될 수 있는 새로운 인맥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요셉은 또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인내해야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23) 오늘 본문의 마지막은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제 감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요셉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요셉은 그에게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특별히 기억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꿈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관원장의 꿈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보다 다음에 나오는 바로의 꿈을 예비하고 바로와 요셉을 이어주는 일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요셉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꿈들은 모두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다가올 미래를 알려주어서 그 일을 준비토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통해서 이 모든 일이 누구에게 달려있는 것인지를 알게 합니다. 요셉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해석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 아닙니까?’
해석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그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미래를 아시고 미래를 결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요셉에게는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허락하셔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미리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속담,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을 오늘 본문의 이야기로 표현하면 ‘꿈도 해몽도 하나님께 속한 것’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떡 굽는 관원장이 불쌍하다는 연민의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둘 다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무슨 잘못을 했기에 죽게 되었나?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꿈을 해석하는 요셉입니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중심은 관원장이 아니라 요셉에게 있습니다. 단순히 꿈이 아니라 꿈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누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꿈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요셉이 해석할 수 있었고, 요셉이 해석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꿈에 대해서 더욱 확신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기에 언제 꿈이 이루어지는지 모르지만, 그렇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인내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원장의 꿈에 대해서 자신이 해석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요셉 스스로가 꿈을 믿지 않고 있었다면 다른 사람의 꿈을 해석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꿈에 대한 확신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성실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어떤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요셉에게 있었던 그런 꿈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만 보여주신 특별한 것, 그런 것이 없잖아요. 정말 특별한 경험, 특별한 계시가 있다면 그것을 굳게 붙잡고 확신하며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런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으로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하시거나, 내가 해야 할 일을 분명한 꿈으로 보여주시면 다를 것 같지 않습니까? ‘네가 결혼해야 할 사람은 이 사람이다’ 딱 보여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이 없어서 우리가 확신할 수 없고 불안하고 염려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그런 것이 있으면 다를까요? 요셉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 또 다른 것이 있었나요? 성경에 보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요셉에게 보여주신 꿈이 정말 특별한 일 인거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의 조상은 어땠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직접 말씀을 하셨고 천사를 보내기도 하셨고 환상을 보여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셉은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요셉에게 단 한 번도 직접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알려주신 것은 열일곱 살에 꾸었던 꿈이 전부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충분히 불평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아버지에게 하셨던 것처럼, 왜 나에게는 직접 말씀하지 않습니까? 정말 어려운 순간에 용기가 필요할 때, 믿음이 흔들릴 때, 왜 침묵하십니까? 이렇게 투정부릴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이미 내가 너에게 보여주지 않았느냐? 나는 너에게 이미 약속했단다. 너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신뢰하고 약속이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거란다.‘
우리에게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뭔가 대단한 것을 바라고 원하지만, 정말 대단하고 위대하고 특별한 것, 그 완전한 것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시편 말씀을 한 구절 찾아보고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105:17-19)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 7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7) 하나님이 요셉을 앞서 보내셨고, 그래서 요셉은 감옥에서 매여 있는 몸이 되었습니다. 언제까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그 약속의 말씀이 요셉을 단련했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요셉의 꿈을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 요셉에게 꿈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도 같았고, 그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 꿈이 성취될 때까지 하나님은 요셉을 단련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만나는 어려운 일들, 힘든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단련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갑니다.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더 주님을 닮아가도록 하나님의 손길로 우리를 빚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 중에 있고 그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을 기대하며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본문에 나오는 관원장과는 다릅니다. 요셉은 관원장에게 은혜를 구하며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지만 관원장은 잊어버렸습니다.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언제라도 어느 때에라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 상황을 아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행하심이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뭔가를 하신다는 말입니다. 기억하시기 때문에 그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 일을 행하시고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되며 우리는 그때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눈에 더디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때가 가장 좋은 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만약 관원장의 도움으로 지금 감옥에서 나왔다면 어땠을까요? 힘들지만 2년 후에 나오는 것이 요셉에게도 훨씬 더 좋은 일 아닐까요? 우리는 바로 앞에 것만 보기 때문에 모릅니다.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인내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