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본문: 고린도전서 4장 6 – 13절
설교자: 조정의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왕 솔로몬은 성령의 지혜로 정금같은 격언을 기록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 이 격언이 참 진리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에게 각각 그들이 행한대로 갚아주시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 3:34; 약 4:6).
고린도 교회 성도는 교만했다. 지도자를 앞세워 자기를 내세우려는 마음은 거만한 마음이었다. 죄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교만이 발견된다. 시기와 분쟁 그 뿌리 깊은 곳에 교만이 가득하다. 교만은 개인과 가족, 교회를 죄로 물들게 하는 강력한 원수의 무기이며, 죽지 않고 살아서 우리를 괴롭히는 징글징글한 옛 본성이다. 바울은 교회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는 교만이라는 암세포를 박멸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왜 그래야 하는지 아주 강력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을 발견하고 완전히 제거하기 원한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겸손한 성도가 모인 교회를 하나님께서 건강하게 세우시기 때문이다.
1. 권면: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라(6절)
먼저, 바울은 사도와 평신도, 선생과 제자의 관계를 강조하며 고압적으로 ‘교만한 마음을 버리라’고 호통치지 않았다. 주 안에서 함께 형제자매된 친밀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온유하고 겸손하게 그리고 본을 보여 이끌어주는 방식으로 권면했다: “형제들아.”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먼저 가르쳤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6절). “이 일”은 분쟁을 다룬 편지 초반의 내용 전체를 가리킨다. 성도가 바울과 아볼로를 앞세워 각각 자신을 높이고 남을 끌어내리려할 때, 두 사람은 사람을 자랑하지 않고, 사람의 지혜를 추구하지 않고, 사람의 판단과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주가 상 주실 것을 바라보며 맡기신 일에 충성했다. 자라나게 하시는 분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그리스도의 터 위에 어떻게 세울지 주의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거룩하게 행하며, 교회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했다.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육신은 교만을 사랑하고, 교만은 전염병처럼 쉽게 전파된다. 하지만 바울와 아볼로가 힘써 본을 보인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6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겸손히 동역하며 주님과 성도를 섬기는 일꾼을 보고 배웠어야 했다. 그들이 품어야 할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겸손한 마음이었다(빌 2:5-11).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지만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사람의 모양을 입고 종처럼 평생 섬기는 삶으로 또 낮추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데까지 낮추신 그 마음. 주님은 자기를 따르려는 제자라면 누구든지 주님처럼 “자기를 부인”할 것을 요구하셨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낮출 각오를 하라고 하셨다(마 16:24). 또한 제자들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마 11:29).
바울과 아볼로는 주님께 겸손을 배웠고, 성도들 앞에서 겸손의 본을 보였으며, 성도들은 그들이 주님께 배운 것처럼 일꾼의 본을 통해 마땅히 겸손을 배웠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배우지 못했다. 교만한 마음을 가졌고 그 결과 서로 대적했다. 교만은 항상 시기와 분쟁을 낳는다. 나와 남을 나누고, 경쟁하게 만든다. 성도가 아니라 원수, 동역자가 아니라 라이벌로 대적하게 한다.
교만은 수평적 관계만 적대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그보다 먼저 수직적 관계에서 반역을 일으킨다: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6절). 이 문장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문맥 안에서 크게 어렵지 않게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성도가 서로 대적하는 분쟁의 문제는 그 전에 이미 하나님의 뜻(기록된 말씀)을 거역하며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수직적 관계에서의 교만이 있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에덴동산의 모든 나무 실과를 임의로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딱 하나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담은 그 말씀 밖으로 넘어갔고, 이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교만한 마음이 일으킨 반역 행위였다. 그리고 그 결과 수평적 관계(아내, 자식)에서 서로 대적하는 교만의 문제가 따라왔다.
‘성경이 꼭 그런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기록된 말씀의 의미를 아는 것이 그렇게까지 중요한가요?’ ‘누가 이대로 지킬 수 있나요?’ 이런 말은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마음은 반드시 사람을 대적하는 열매를 낳는다. 시편 119편을 읽어보라. 시편 기자의 본을 보고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겸손한 마음을 반드시 배워라.
2. 이유1: 주시지 아니한 것이 없다(7절)
바울은 이제 두 가지 강력한 이유를 들어서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대적하는 성도들을 본격적으로 책망한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스스로 자랑하는 것 중에서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7절).
실제로 하나님은 고린도 교회에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을 풍족하게 주셨고,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게 하셨다(고전 1:5, 7). 좋은 은사가 그들 중에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들이 만일 겸손했다면 주께서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며 함께 협력하여 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품은 거만한 마음은 주님이 주신 좋은 선물을 모두 망쳐놓았다. 교만은 주께 받은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가지고 서로 구별하고 비교하고 자랑하며 분쟁하게 만든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의 기준과 가치를 가지고 각각 바울과 아볼로를 구별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속한 일꾼과 더불어 그들 또한 남다른 우월함이 있다고 자랑했다. 바울은 ‘반박할 수 없는 팩트로 상대방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준다는 뜻’ 곧 팩폭으로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꾸짖는다. ‘너희가 자랑하는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냐? 왜 너희가 타고난 것처럼, 원래부터 너희의 것인 양 자랑하느냐?’
당신에게 지혜가 있다면 그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당신에게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남다른 체력과 끈기를 가졌다면 그 또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고, 은사가 탁월하다면 하나님이 성도를 섬기라고 더 많이 맡기신 것이다.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말씀이 좋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일꾼을 사용하시는 것뿐이고, 리더십이 건강하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나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남달리 갈등과 분쟁이 없고 평안하다면 주께서 교회를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모두 다 주님의 은혜인데, 왜 다른 성도 혹은 다른 교회와 비교하면서, 나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들을 내세우며 자랑하고 교만한 마음을 품는가?
주가 개인과 교회에 주신 모든 것은 가족과 이웃, 교회 안팎의 성도를 섬기라고 맡기신 것이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겸손하다면 두 달란트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 앞에서 자기가 받은 것을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많이 맡은 자로서 적게 맡은 자보다 더 힘써 섬기고 함께 일할 것이다. ‘대체 저 인간은 왜 저러는 거야?’라고 하지 말고, 주께서 당신에게 주신, 그 사람에게 없는 은사로 어떻게 섬기고 도울 수 있을지를 생각하라. 겸손의 왕이신 주님을 생각하라. 아버지의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분께서 겸손히 받은 그 모든 것으로 제자 중에 섬기는 자로 계셨다는 것을 기억하라(눅 22:27). 거만한 마음으로 자랑하거나 판단하거나 비교하고 싶을 때,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만 자랑하고, 판단과 비교를 그치며, 충성스럽게 주와 성도를 섬겨라.
3. 이유2: 아직은 도달한 것이 아니다(8-13절)
고린도 교회가 겸손을 배워야 했던 두 번째 이유는 상당히 길게 진술됐다(6구절). 요약하면, 그들은 아직 도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온전히 이룬 사람 처럼 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처럼 겸손한 태도로 이렇게 고백해야 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그런데 그들은 이미 다 이룬 것처럼, 왕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책망한 것이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8절).
분명히 비꼬는 말이지만, 단순히 비웃으려고 한 말은 아니다. 바울은 분명히 언젠가 그들이 왕이 되기를 원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8절). 그들이 주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그날에 그들과 함께 왕 노릇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아직은 그때가 아니었다. 이어서 바울은 이미 배부르고 풍성하며 왕이 되었다고 자랑하는 성도들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바울과 복음 동역자들(사도인 우리)이 처한 상황을 길게 설명한다. 마치 10년 목회한 사람이 ‘목회가 뭔지 이제 완벽하게 다 알았다’고 자랑하고 있을 때, 그 옆에서 50년 목회한 사람이 ‘나는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많다’라고 말한 셈이다. ‘나는 완벽한 성화를 이루었다’라고 말하는 초신자 옆에서 ‘나는 죄인 중 괴수다’라고 오래된 성도가 말하는 셈이다.
9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9-13절).
바울은 당시 로마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개선 행렬 끄트머리에 끌고 들어온 포로에 자신을 비롯한 하나님의 사도들을 빗대어 설명했다. 그들은 동물 가죽을 뒤집어쓰고 맹수와 싸우도록 경기장에 세워져 수많은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충성하여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한 자로 취급되었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한 자로 대우받기를 원했다. 편지를 쓰는 그 순간에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계속해서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고 친히 손으로 일했지만(부끄럽게 여기는 노동),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배불러 했고 풍성함을 자랑했으며 왕처럼 군림하기를 원했다. 사도들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오물, 만물의 찌꺼기 취급을 받으면서도 모욕을 축복으로, 박해를 인내로, 비방을 권면으로 갚아주려고 애썼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서로를 모욕하고 박해하고 비방하면서까지 자신을 높이려고 애썼다.
편지가 읽혔을 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한없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의도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는 것이었다(14절). 영적인 아버지 바울이 아직 도달하지 않은 것처럼 겸손하게 주님 가신 길을 뒤따르는 삶을 산다면, 그 사랑하는 자녀 또한 그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이미 얻고 온전히 다 이룬 것처럼 교만하게 굴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시점은 주님을 마침내 만날 그때뿐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은퇴란 없다. 과거에 주님을 뜨겁게 섬기고 사랑했던 경험을 앞세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어느 수준에 이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성경에 관하여 알만큼 다 안다고 자랑하는 것(단지 순종하지 않고 있을 뿐) 또한 교만이다. 악을 선으로 갚지 않고 악으로 대응하는 것 또한 교만이고, 남들보다 강하고 지혜롭고 존귀한 대우를 받으려고 싸우는 것 또한 교만이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3:16-17). 당신의 주인, 당신에게 일을 맡겨 보낸 분이 어떻게 이 땅에서 본을 보이셨는지 생각해 보라. 그분의 종인 당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보냄을 받은 자)이자 종인 바울은 정확하게 자기 주인의 본을 따라 살았고, 그래서 담대하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말했다(고전 4:16). 항상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며 그분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고 겸손이 그 본을 따라 사는 삶이 바로 주가 약속하신 복이 있는 삶이다.
<아래로 성장하는 삶>이란 책에서 저자 닉 톰슨은 이렇게 말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리스도를 높이는 겸손이다. 이 겸손을 소유한 교회는 살아서 활력 있게 성장할 것이고, 이 덕성을 갖추지 못한 교회는 무기력하게 죽어갈 것이다”(295p). 당신은 이 겸손을 소유했는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