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라

본문: 에베소서 6장 5~9절

설교자: 최종혁

에베소서 3장까지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배웠고, 4장부터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있다. 이런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옳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있어서는 설명이 좀 필요했다. 워낙 세상이 이런 성경적인 가치관에서 멀어져 있고 세상 속에 있는 우리도 그런 가치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왜 아내가 복종하고 남편이 사랑해야 하는지, 왜 자녀가 순종하고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조금 다른 면에서 설명이 좀 필요하다. 앞서 결혼과 자녀양육에 대한 세상의 가치관은 분명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다루는 종과 상전(주인)은 관계는 어떤가? 이는 분명 당시의 ‘노예 제도’를 전제로 하고 있는 말씀이다. 결혼이나 가정은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세상도 성경도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질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함을 배웠었다.

하지만 ‘노예 제도’는 어떤가? 우리가 생각하는 노예 제도를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의도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세상도 노예 제도가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종과 주인에 대한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종은 어떠해야 하고 주인은 어떠해야 한다가 아니라, 그 제도 자체를 없애야 한다가 아닐까? 그런데 왜 성경은 세상에서도 악하다고 말하는 노예 제도를 그냥 묵인하는 것처럼 보일까?

먼저 확실히 할 것은 성경은 ‘악한’ 노예 제도를 묵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구약의 율법에서도 노예에 대한 규례를 보면 당시에 행해지던 그런 ‘악함’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불법적으로 누군가를 노예 삼는 것은 금지되었다(출 21:16). 노예를 학대하지 말아야 했고, 심한 상해를 입히면 그를 놓아 주어야 했다(출 21:26-27). 관련된 말씀을 종합해 보면 종과 주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일방적인 학대와 착취의 관계라기 보다는 오늘날의 피고용인과 고용인의 관계와 유사하게 서로 이익을 주고 받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노예 제도 뿐 아니라 어떤 형태의 악이라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보다 근본적으로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바로 우리가 직면하는 세상의 ‘악’의 근원이 무엇이냐다. 성경은 우리가 들고 있는 칼이 악이 아니라 칼을 들고 있는 우리가 악이라고 말한다. 노예 제도를 생각해 보라. 선하고 관대한 주인이라면 그를 섬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평생을 그렇게 하고 싶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오늘날의 고용 관계도 마찬가지다. 노예 제도는 없지만 노예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물론 제도가 어느 정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사람 안에 있는 죄는 항상 방법을 찾아낸다.

근본적인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고 그 안에 있는 죄다. 그렇기 때문에 악의 문제의 해결은 밖에서 안으로가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관점이다. 즉, 우리의 상황이 동일하더라도 그 자리에 있는 우리가 변하면 상황이 바뀐 것과 동일한 결과를 우리는 마주할 수 있다. 노예 제도를 비롯한 세상의 악에 대해서 성경은 제도, 상황 등 외부에서 문제를 찾지 않는다. 악은 근본적으로 내적인 문제이고 영적인 문제다.

메시아의 오심이 두 차례로 나누어져 있는 것도 이런 성경의 관점을 반영한다. 예수님을 심문하던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 그리고 이어서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물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왕이라고 하여 가이사를 반역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요 19:15) 빌라도로서는 당연한 질문을 했던 것이다.

질문을 한 빌라도는 몰랐겠지만 그의 질문은 예수님이 왕이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의미인지를 자연스럽게 설명하기에 좋은 질문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은 “내 나라”, “내 종”이라고 표현하심으로서 자신이 왕임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왕이신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속한 나라의 왕이었다면 당연히 그 세력 확장을 위해 다른 나라를 힘으로 제압하여 굴복시키려 했을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아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포로기에서 돌아 왔지만 계속해서 이방 나라들의 압제에 시달리던 유대인들은 약속된 메시아가 와서 그들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모든 나라를 굴복시키고 다스리는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허황된 기대는 아니었다(cf. 시 2편; 사 9장). 예수님의 탄생을 알렸던 가브리엘 천사도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었다.

눅 1:32–33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유대인들의 이런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절정이 이르렀던 그 때,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그들에게 오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과 놀라운 능력은 그런 사람들의 기대를 채우기에 충분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사람하고도 달랐다. 그랬기 때문에 만약 예수님께서 “자, 이제 칼과 창을 들고 저 악한 로마를 무너뜨리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유대인들을 이끄셨다면, 그들은 기꺼이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삼으려고 할 때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피하셨다. 사람들이 어떤 왕을 기대하고 있는지 아셨기 때문이고, 예수님은 그런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 베드로가 칼을 꺼내 반항하려고 하자 그를 막으시면서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마 26:53-54). 예수님은 이 땅의 나라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구약의 예언서나 요한계시록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세상을 심판하고 정복할 왕으로 오실 것이지만, 그때는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종들도 그런 기대를 가지고 살아서는 안되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었지만(행 1:6), 예수님은 여전히 ‘그때’는 이르지 않았고 제자들이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들이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행 1:7-8).

그후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삶을 살았다. 그들은 왕이신 예수님의 종들로서 이 세상에서 살았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의 백성들로서 이 세상에서 산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이 세상을 힘으로, 외적으로 무너뜨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그들과 함께 로마에 대항하거나 불합리한 사회 제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이 세상에 속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영적인 측면에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했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가르쳤다. 그것이 그들 삶의 최우선순위에 있었다.

세상이 핍박하면 기꺼이 핍박을 받았지 세상과 맞서 싸우지 않았다. 대신 복음을 전해서 세상의 사람들이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되게 하였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는만큼 참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어떠한지 세상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천하에 퍼진 전염병’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그 일에 힘썼다. 그들은 세상을 전복시키는 자들이 아니라 복음으로 전염시키는 자들이었다.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으면 그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았던 것이다.

이것이 정확히 오늘 본문에서 강조되는 부분이다. 있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라는 것이다(5, 6, 7, 9절). 종에게 자유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하지 않는다. 주인에게 종을 풀어주라고 하거나 그동안 주인으로 많은 것을 누렸으니 이제는 종이 되라고 하지 않는다. 노예제 폐지를 위해 힘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종이면 종으로서, 주인이면 주인으로서, 그보다 앞서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신분을 기억하고 그에 합당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다.

고전 7:20–24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종이어도 걱정할 것 없고 자유인이라고 교만할 것도 없다. 기회가 되어 자유롭게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이 땅에서의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고, 또한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동일한 신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종처럼 살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

지금까지 에베소서 5:21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가족 안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로 그 범위를 확장하며 배웠다. 여기에도 사실 같은 원리가 적용되어 있었다. 결혼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결혼 제도를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바뀌어야 했다. 가정의 문제도 제도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가 바뀌어야 했다. 각자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할 때, 악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이것이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 방법이다.

오늘 본문은 거기서 좀 더 확장된 가족의 문제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과 종의 관계인데, 에베소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경제 활동의 중심도 가족이었기 때문에 주인과 종의 관계는 여전히 가족 안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주인과 종의 관계는 사회경제적 관계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관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사회에서 맺어지는 여러 관계들은 앞선 다른 관계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는 동일하지만 역할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즉, 어떤 식으로든 갑과 을의 관계가 형성된다. 그런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상대와 나 중에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이냐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지금 내 자리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먼저 ‘종’의 자리에 있는 경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자.

종들아, 주인에게 주께 하듯 하라(5-8절)

엡 6:5–7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종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한 마디로 “주인에게 주께 하듯 하라”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육체의 상전”이 종의 진짜 주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 받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진짜 주인은 9절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시다. 육체의 상전은 그저 그리스도께서 종에게 하라고 하신 일의 상대방일 뿐이다. 그러니 육체의 상전이 어떤 사람인지는 여기서 주어진 명령과 전혀 관계가 없다. 종이 주인에게 그리스도께 하듯 하는 이유는 진짜 주인인 그리스도께서 종에게 원하시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순종’이다. 즉, 주인이 종에게 원하는 것을 정확히 하는 것이다. 어떤 것들은 기본적인 업무로 주어지고 어떤 것들은 구체적인 지시가 있을 수도 있다. 농사일을 하는 종이라면 기본적으로 농사를 잘 해서 수확을 얻는 것이 기본 업무고 거기에 주인이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지시를 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에 순종하는 것이 주인이 원하는 것을 수행하는 순종이다. 주인이 말로 한 것은 잘 순종했는데 기본 업무는 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그 반대라면, 그것은 제대로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종이라면 주인이 말로 하라고 한 것만 다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업무)에 충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런 순종과 관련하여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마음이다. 그냥 기계적으로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첫째,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5절). 믿는 자라면 당연히 그리스도에게 이렇게 한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마땅히 그리스도께서 내 위에 권위를 가지고 계심을 알기에 그에 합당한 존중의 마음을 갖는다. 위선적으로 그런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종들이 주인에게 그렇게 하기를 원하신다. 다른 이유는 없다. 주인이 그럴만한 인품을 가졌거나 혹은 힘이 있거나 돈이 있거나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심지어 어떻게(정당/부당) 그 사람이 나의 주인이 되었는지도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종들이 이런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기가 쉽지 않다. 주인이 나쁘면 나쁜대로 좋으면 좋은대로 그렇다. 나쁜 주인에게는 진심으로 순종하기가 어렵고 좋은 주인에게는 존중하며 순종하기가 어렵다. 나쁜 주인은 싫어하고 좋은 주인은 무시하는 것이다. 바울은 믿는 상전이 있는 자에게는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길 것을 말했고(딤전 6:2), 베드로는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순종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벧전 2:18). 결국 사람을 생각하면 그만큼 순종하기는 어렵다. 종들은 자기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스도께 순종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둘째, 억지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6-7절). 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누가 시키니까, 안하면 혼나니까 하는 일과 기뻐서 하는 일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는 일을 최소한으로 한다. 여기서는 “눈가림”이라고 표현했다. 사람이 볼 때만 혹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정도만 일하는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일을 최대한으로 한다.

아이들에게 “한 시간 공부해”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초까지 따져가면서 1초라도 더 공부하면 억울하게 생각한다. 심지어 부모가 보지 않을 때는 딴 짓을 하기도 한다. 중간에 심부름을 5분하면 그것은 공부시간에 들어간다. 하지만 “한 시간 놀아”라고 말하면, 시간이 되어 그만하라고 해도 “좀만 더”를 외친다. 부모가 보든 안보든 최선을 다해서 논다. 심부름 시간 5분은 제외되어 노는 시간에 5분이 추가된다. 억지로 하는 것과 기꺼이 하는 것의 차이다.

종은 자기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그런 마음이 잠깐이라도 들 때는 통장이 돈이 들어올 때다. 결국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궁극적으로 그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종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진짜 주인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종이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을 섬기는 일인 것이다.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되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다. 자녀에게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주인에게 좋은 종이 되는 것도 주님을 섬기는 일이다. 따라서 그 모든 일에 대한 보상도 주님께 받는다.

엡 6: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종들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그렇게 해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나만 힘들 뿐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만약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수치화 되어 정확하게 그에 비례하여 보상이 늘어난다면, 다들 그렇게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저렇게 하는 사람들은 손해만 본다. 오히려 적당히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더 인정 받고 대접 받는다. 그런 모습을 보면 기운이 빠지고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고 있나하는 회의감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사람에게 어떤 보상을 받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참된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어떤 보상을 받는지가 중요하다. 그리스도께는 어떤 것도 숨겨지지 않는다. “그대로”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엡 2:8). 하지만 심판과 보상은 정확히 행위에 따른다. 심판 받는 자들도 자기가 행한대로 받게 될 것이고 보상을 받는 자들도 자기가 행한대로 받게 된다. 종으로서 주인을 진심으로 존중하며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섬긴다고 해도 주인은 그것을 전혀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주님은 아신다. 종의 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반드시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절대 헛된 섬김은 없다.

주인들아, 종들에게 주가 하듯 하라(9절)

다음으로 주인에게 주어지는 말씀은 한 구절로 짧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이와 같이”를 사용하여 앞서 언급한 것을 반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엡 6: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주인들에게 “이와 같이” 하라는 것은 종들이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주인도 종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앞뒤 문맥 상 그런 의미가 될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6절 끝의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가 가장 적절하다. 주인이라고 해서 절대 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들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종이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위협을 그치는” 것이다. 위협한다는 것은 자신의 귄위를 오용하거나 남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이다. 권위를 가진 자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위해 사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시는 죄다. 당시 로마의 노예 제도를 고려해 보면 주인은 종에 대해 그야말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로마의 노예 제도도 변하고 있었고 노예들의 지위도 높아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주인은 종들을 위협하고 학대하고 착취할 수 있었다. 어떤 종들은 가족과 같은 대우를 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도 얼마든기 가능했던 것이다.

바울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합당하지 않음을 말하며 위협을 그쳐야 할 것을 강조한다. 그나 그의 종이나 동일하게 하늘에 있는 상전, 즉 그리스도의 종이고, 차별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에게 있어 그나 그의 종이나 동일하니 그렇게 권위를 넘어서서 종을 위협하는 일은 주인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바울의 논리다. 과거 유럽과 미국의 노예 제도가 그러했듯이 피부색에 따라 본질적으로 노예와 주인이 결정되는 것이라면 주인은 마음대로 자기의 권위를 사용할 수 있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주인이든 종이든 그런 자리에 있을 뿐이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니 주인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에 대하여 편지하면서 빌레몬에게 이렇게 말했다.

몬 1: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빌레몬은 오네시모의 주인으로서 도망한 종에 대한 권위를 사용하여 그를 벌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정당한 권위의 사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바울은 빌레몬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좋은 종으로 대우하는 것 뿐 아니라, 더욱 나아가서 사랑 받는 형제 이상으로 대하는 것이 마땅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종인 우리를 친구라고 하신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요 15:15).

즉, 권위를 부여 받은 주인들에게 주어진 명령을 정리하자면 이렇게 할 수 있다. 주인들아, 종들에게 주가 하듯 하라.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대하셨는지를 생각해 보고, 그대로 내가 종을 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주인의 모습이다.

권위와 질서가 강력했던 과거에는 ‘순종하라’는 명령이 지키기 어렵기는 했겠지만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 하고, 부모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하고, 주인에게 종들을 위협하지 말라는 이런 명령은 이상할 뿐 아니라 혁명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마땅한 삶이고, 그렇게 하나님은 믿는 자들이 세상을 안에서부터 변화시키기를 원하셨다.

생각해 보라. 종과 상전이 이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산다면, 여전히 그것을 우리가 ‘노예 제도’라고 부를 수 있을까? 노예 제도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 말에 어떤 부정적인 요소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내적인 변화가 외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세상의 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칼과 창으로 세상을 뒤집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 때 세상은 그 빛을 보고 빛으로 나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음 주에 배우게 되겠지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죄와의 싸움이고 죄의 세력과의 싸움이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싸움이다.

도전

사실 오늘 본문은 대개 직장 생활과 관련하여 적용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 주인과 종의 관계와 가장 유사한 것이 오늘날의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고용인은 순종하고 고용인은 위협을 그치라고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일부러 그렇게 직장 생활이라고 범위를 한정하지 않고 말씀을 나눴다. 꼭 직장 생활 뿐 아니라 사실 감옥이나 군대, 학교 같은 곳에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서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서 적용되어야할 원리가 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혹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반드시 이 원리를 기억하기 바란다. 구원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산다. 즉, 우리는 주가 하듯 하고 주께 하듯 한다. 즉, 주님께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자기 권위를 남을 위해 사용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 순종하듯 다른 사람에게 순종해야 한다. 복잡한 사회에서 우리는 과거로 치면 종이기도 하고 주인이기도 하다. 언제든 주가 하듯 하고 주께 하듯 한다는 원리를 기억하고 그렇게 행하라. 주님의 종인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세상은 우리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고 그분이 다스리는 아름다운 나라를 우리와 함께 소망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