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 Part.1 “그 사랑의 깊이”
본문: 에베소서 2장 1-3절
설교자: 조정의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어떤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일을 하셨는지 찬송한다(1:1-14). 이어진 바울의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은 소망, 기업, 그리고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을 성령을 통해 알게 해달라는 간구이다(1:15-23).
그리고 이제 바울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우리의 구원을 통해 얼마나 풍성하게 나타났는지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한다(2:1-10). 구원받은 우린 모두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입은 자들이다.
본문은 우리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힘이 아닌 다른 것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일곱 구절로 나눈 하나의 긴 문장 마지막에 나오는 “은혜”다.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7절).
은혜를 세 가지로 수식하는데, 첫째, “그”라는 정관사가 붙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임을 알려주고, 둘째, 명사 “풍성함”을 통해 하나님 은혜의 특별함이 ‘차고 넘치’고 ‘충만’한데 있다는 걸 말한다. 마지막 셋째, “지극히”라는 현재분사는 하나님 은혜가 계속해서 ‘능가하’고 ‘뛰어넘는’ 특징을(현재형) 가졌다는 걸 강조한다(엡 3:19). 그래서 바울은 구원의 목적에 대하여 “이는…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라고 말했다. 풍성한 하나님 은혜는 과거 한 시점에서 잠깐 충만했던 것이 아니라 오는 여러 시대에도 변함없이 차고 넘치도록 충만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받은 은혜가 그러하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제대로 알고 누리고 있는가? 그렇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구한다.
바울은 특별히 “지극히”에 해당하는 단어를 3장 18절에서 다시 사용했다: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은혜의 또 다른 이름, 사랑). 그 사랑의 크기를 헤아리는 방식으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고 말했다(3:19).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너비에 있어서 모든 사람, 성별, 인종, 국적, 신분 등 모든 것에 차별이 없는 사랑이다(롬 3:22). 또한 창세 전(영원 전, 엡 1:4)에 시작되어 영원까지 계속되는 길이에 제한이 없는 사랑이다(롬 8:39). 죄인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실 만큼 지극히 높고, 지옥 밑바닥에 있는 죄인을 찾아와 베푸신 사랑이라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넘치는 사랑’ 다른 말로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받았다.
특별히 에베소서 2장 1-3절은 풍성한 하나님 은혜의 깊이를 헤아리게 한다. 은혜받기 전 우리의 처지, 소망 없는 밑바닥 현실을 보여준다. 4-10절은 지극히 충만한 하나님 은혜의 높이를 가늠하게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얻게 된 높고 빛나는 영광을 노래한다. 은혜받기 전 우리의 상태를 돌아보며 받은 사랑의 지극히 풍성한 깊이를 측량해보자.
1. 죄인의 상태: 죽음(1절)
1절[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는…살리셨도다’는 5절이 되서야 나온다(함께 살리셨고). 긴 문장을 매끄럽게 재구성하기 위해 개역 개정은 1절에 그 내용을 반복했다. 원문에서 바울은 우리말 성경이 번역한 것처럼 “여러분 또한, 여러분의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때에(2절) 곧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에 에베소 성도들의 처참한 상태를 한 마디로 정리한 것이다: 그들은 ‘죽었다.’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영적 죽음을 말한다. 죽음은 기본적으로 ‘분리’, ‘단절’의 개념을 갖는데, 육체의 죽음은 영과 육의 영구적 분리/단절을 의미하고,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완전히 나누었는가? 허물과 죄다(사 59:2).
허물과 죄를 구분하여 정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기본적인 의미를 통해 배울 점이 있다. 허물(파랍토마)은 ‘벗어나는 것’,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고, 죄(하마르티아)는 ‘목표나 기준, 목적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죄인의 문제는 단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하는 데 있지 않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결함, 하나님이 인생에 두신 목적에 결코 미치지 못하는 무능력함에 있다. 가끔 오류를 일으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자가 있는 상태라는 것이 문제다. 죄를 범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라서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마 12:35).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것을 바울은“죽었던”이란 표현으로 설명했다. 여기 사용된 동사는 현재형 be동사로(‘~이다’) 죽는 행위가 아니라 죽어 ‘있는’ 상태에 주목한다(현재형=지속). 사람은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결함 있는 상태가 영원히 지속된다. 그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요일 1:5). 예수님은 죄를 범하지 않으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벧전 2:22), 죄를 알지도 못하신다(고후 5:21). 성령님의 이름은 Holy(거룩한) Spirit(영)이시다(벧전 1:2). 삼위일체 하나님은 죄와 절대로 함께하실 수 없으시다. 그래서 죄와 허물 안에 ‘있는’ 상태로 태어나 영속적으로 머무는 자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영원히 그 상태에 머물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생뿐만 아니라 영원한 내생에서도.
2. 죄인의 원수: 육체, 세상, 마귀(2-3절)
1) 육체(3절)
죄인의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세 원수가 있다(어둠의 삼인조). 첫째는 바로 ‘자신’이다. 3절에선 육체와 마음이라 말했다.
3절전에는 우리도 다 그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하나님 은혜를 입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것. 여기 사용된 “욕심”(에피뚜미아), “원하는 것”(뗄레마)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눅 22:15, 마 26:42). 그러므로 무언가를 원하고 갈망하고 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문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의 육체와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있다.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 기준을 알려달라. 그 기준에 이르면 될 것 아닌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 뜻을 벗어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이 그랬다(막 10장).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단 한 마디로 보이셨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숨은 욕망도 드러내셨다(근심, 재물 사랑, 떠남).
죄인은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무능력함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 기준을 만족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 강력한 욕구, 원함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죄인은 악한 것을 좋아서 행한다. 더러운 말을 원해서 내뱉는다. 성적인 욕망을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갈망하기 때문에 채운다. 갖고 싶기 때문에 빼앗고, 얻고 싶어서 잘못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욕구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하라고 하신 것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욕구는 어떠한가?
거룩하고 싶지 않다. 선하게 살기 싫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싶지 않다. 하나님을 알고 싶거나 그 뜻에 따르고 싶지 않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싶은 욕구와 반항심이 언제나 육체와 마음 곧 전인격을 더럽힌다. 이것을 ‘전적 타락’이라 부른다(롬 3:10-18). 하나님 은혜 없이는 누구도 자신의 타락한 육체와 마음, 사망의 몸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빠져나오길 원하지도 않는다).
2) 세상(2절)
두 번째 원수는 죄인을 둘러싼 세상이다. 죄인의 육체와 마음이 악을 지향하는 것처럼, 세상도 그렇다. 예수님은 그래서 이 세상을 ‘악한 세대’라 부르셨다(마 12:45).
2절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그 때는 너희 곧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기 전을 가리킨다. 그들은 “그 가운데서 행하”였다. 앞에 있는 허물과 죄 가운데 살았다는 의미다: 말, 생각, 느낌, 행동. 그런데 성령은 그런 삶을 또 다른 표현으로 “이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풍조에 해당하는 단어는 아이온(‘시대’, ‘세대’)으로 바울은 이를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렇게 사용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여기서 죄인의 두 번째 원수가 발견된다. 이 세상의 정신, 악한 시대정신은 죄인을 더욱 죄로 이끄는 원수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를 고발한다(18절). 개인의 불경건과 불의는 세상의 불경건과 불의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양산한다. 대표적인 예로 세상은 창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말살한다. 모든 만물에 찍힌 하나님의 지문을 제거하고 하나님이 없이 모든 것이 저절로 생겼다는 주장을 주입하고 강요한다.
세상은 하나님 창조 질서도 무너뜨린다. 개인이 결정한 성을 객관적 진실과 상관없이 무조건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종용한다. 남자 수영 선수가 여자로 성별을 바꾸고 여성 수영 경기에 출전하여 신기록을 달성하고 상을 독식하는 것을 박수치며 환영한다. 우린 그런 악한 세상에 지금 살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멸시하고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을 적극 지지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경고된 불의를 행하면서도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는 지경이다(1:32). 대표적인 예가 살인이다. 그 어떤 지독한 전염병도, 극악무도한 정부도 낙태로 죽인 아기만큼 많은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 놀랍게도 세상은 그것을 ‘옳다’고 말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최고라고 가르치는 이기주의, 물질이 최고라고 조장하는 물질주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만물의 주인이며 자기 삶의 주인이라 주입하는 인본주의, 절대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상대주의 등 이 세대가 만든 정신은 죄인을 앞서 말한 타락한 본성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부추긴다(요일 2:16). 결국 하나님에게서 더욱 멀어지게 만든다.
3) 마귀(2절)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인, 그 죄인을 더욱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세상. 그리고 그 배후에는 원수의 우두머리가 있다.
2절…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공중은 세상을 통제하는 영이 활동하는 영역을 가리키고,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쥐고 있기 때문에(눅 4:6) 이 영적 존재를 가리켜 ‘세상의 임금’이라고도 부른다(요 14:30; 요일 5:19).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마귀다.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우리 싸움의 대상이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 말했는데, 이는 마귀 그리고 그와 함께 타락한 천사들(귀신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6:12).
마귀는 또한 악한 일을 도모하기 때문에 “악한 자”로도 불린다(요일 5:19). 그 마귀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한다(요 8:43-4). 죄인이 부패한 전인을 따라 악을 행하도록, 세상이 모든 불경건함과 불의를 따르도록 역사한다.
영적 세계를 점점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성경은 명백하게 영적 세계를 가르친다. 모든 사람은 마귀 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 성령이 그 안에서 역사하거나 마귀가 그 가운데서 역사한다. 성령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게 하지만, 마귀는 정반대다. 마귀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모든 방편으로부터 죄인의 눈과 귀를 막아버린다.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하지 않는 반항심을 키워 마음을 돌처럼 완고하게 만든다.
어린 아기를 입양하여 씻지 않은 젖병으로 먹여 아기를 병들게 한 뒤 건강 보험금을 계속 타 먹다가 아기가 죽자 또 다른 아기를 입양한 여자가 뉴스에 나온 적이 있다. 그녀는 두 번째 아기도 죽이고 세 번째 아기를 입양하여 같은 일을 하다가 발각됐다. 조금이라도 아기를 위한다고 할 수 있을까? 절대로!
마귀가 그렇다. 그는 영혼이 잘 되는 것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 유일한 관심사는 자기를 위해 예비된 불못에 한 영혼이라도 더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벧후 3:9). 죄인이 타락한 자기 육체와 마음의 원함대로 살도록 실컷 유혹하고, 그렇게 사는 삶이 정상적이고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인정하는 세상을 만들어 아무도 회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모두 멸망하도록.
3. 죄인의 운명: 진노(3절)
전적으로 타락한 육체, 불의가 가득한 세상, 초인적인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영혼을 불못으로 인도하는 마귀. 이렇게 삼인조가 영혼을 삼중으로 꽁꽁 싸매 아무도 예외 없이 하나님 진노의 심판대 앞으로 이끈다.
3절…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다른 이들은 에베소 성도들과 달리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모든 사람은 같은 운명을 타고난다(4절). 본질상은 ‘태생적으로’와 같은 의미인데,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진노의 자녀라는 것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한한 심판, 그 심판에 쏟아질 하나님의 맹렬히 타는 진노가 나면서부터 모든 사람에게(당신에게) 정해진 운명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큰 사랑은 완전한 반전을 만든다(4절).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가 어떤 상태였고 어떤 문제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개입 없이 우리는 어떤 삶을 이 땅에서 그리고 이 땅을 떠나서 살게 되었겠는가?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잘 알지 못하는가?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어떤 상태에서 놓임을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얼마나 밑바닥 인생을 살았는지, 은혜 없이는 얼마나 소망없는 운명이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