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2)

본문: 시편 118편

설교자: 최종혁

지난 시간에 언급한 것처럼 이 시편은 세 사람의 노래다. 1차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했던 오랜 옛날 하나님의 백성의 노래이다. 그리고 이 감사와 확신의 노래는 십자가를 향하시던 예수님의 노래가 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 노래를 믿는 모든 자의 노래가 되게 하셨다. 오늘은 이 관점에서 본문 말씀을 살펴보자.

감사(5-28절)

이 시편은 고난의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고난 중에 기록된 것은 아니다. 고난이 지난 후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었음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간증). 이 사실을 5절에서 요약해서 말한다.

개인적(5-18절)

118:5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시편 기자는 “고통 중에” 있었는데, 10-12절을 보면 그는 적들에게 “에워싸이는” 고통 중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사용된 “고통”이라는 단어도 문자적인 뜻은 좁은 곳에 갇혀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매우 답답한 상태다. 같은 단어가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직전의 마음 상태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창 32:7,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나를 위협하는 적은 분명히 보이는데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모르고 안다고 해도 내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사실만 분명한 상황인 것이다. 뭔가를 해야하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황인 것이다. 그런 답답함 가운데 시편 기자는 있었다.

이 답답함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동반되어 있었다. 단순히 답답한 상황이 아니라 생명이 위협 받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10-12절의 표현은 분명 전쟁 중 겪을 수 있는 상황이다. 정말로 자신을 죽이려는 적들에게 포위된 상황이다. 13절은 “너는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라고 그 상황을 표현한다. 단순히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죽이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17-18절을 보면 당시에 시편기자는 ‘죽음’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 뿐이었고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5절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로 번역된 표현은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여호와를 불렀더니”다. 비슷한 의미이지만 좀 더 다급함이 묻어나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하나님께 무엇을 요청할 겨를도 없어 하나님의 이름만 부른 것이다.

그것 외에는 한 것이 없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큰 제사를 드리거나 하지 않았다. 감동적인 기도문도 없다. 이 시편의 어디를 봐도 시편 기자는 고통 중에 하나님을 부른 것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문자 그대로 여호와의 이름만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르짖음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던 것이다. 그를 도우셨고 구원하셨다. 좁고 두려운 곳에서 그를 건지셔서 넓고 안전한 곳에 세우셨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은 본문에 없다. 그에 가장 가까운 진술은 27절의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는 것은 은혜 베푸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제외하면 그런 언급이 없다. 몰라서도 아니고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너무 당연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인자하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래서 이 시편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하고 그 사실을 말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한 시편 기자의 이어지는 간증을 보면 그가 이 일을 통해서 배운 사실들을 알 수 있다. 물론 전에는 이런 것들을 전혀 몰랐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 더 크게 깨닫고 또한 확신하게 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는 사실이다(6-7절).

118:6–7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7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원수가 아니라 같은 편이시다. 어쩌면 그가 경험했던 고통 속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내 편이 아니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1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118:18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도다

직접적으로 그를 위협했던 자들은 적군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심을 고려하면 그들을 통해 그를 다루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사람의 입장에서는 지나치다고 느낄 수 있고 그럴 때 마치 하나님이 원수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욥이 극심한 고통 중에 이런 말을 했었다.

13:24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호의를 베풀지 않으신다는 의미다. 욥은 극심한 고통이 계속되고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실 때 하나님이 자신을 원수처럼 대한다고 느꼈었던 것이다. 다른 시편을 봐도 시편의 저자들(특히 다윗)이 고난 가운데 탄식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시편 118편의 저자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적들에게 둘러싸여서 살 수 있는 소망까지도 끊어진 것 같은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까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이 되기까지 가만히 계시는 하나님이 정말로 내 편이 맞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를 구원하셨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편이며 그를 해하는 자들이 아닌 그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신 사실을 통해 시편 기자는 두 가지 결과를 기대한다. 하나는 사람이 내게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고(6절) 다른 하나는 결국 그를 미워하고 대적했던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응하시는 것을 그가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7절). 시편 기자는 사람들이 그에게 “어찌하는 것”을 경험했다.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서 답답하게 만들었고 거의 죽음에까지 그를 몰고 갔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의 편인 이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시편 기자를 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한, 그리고 허락하시는 한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될 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 일에 대해서도 보응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한다. 고통은 또 반복될 수 있지만 그 고통에 동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인간적인 면에서 두려움은 있겠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두려운 위협과 위험을 다스릴 수 있는 분이시고, 그런 분이 내 편이시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의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의 객기 같은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기 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확신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통해 시편기자가 확신하게 된 또 다른 사실은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8-9절).

118:8–9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9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절 구분에 따르면 성경에는 총 31,174절이 있는데, 그 딱 중간인 15,587번째 구절과 15,588번째 구절이 바로 방금 읽었던 이 말씀이라고 한다. 사실 성경의 장절 구분은 원문에는 없었던 부분이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내용 자체 만으로도 이 두 구절은 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잘 대변한다. 다른 어떤 것을 신뢰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낫다. 시편 기자는 고난을 통해 이 사실을 더 확신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안다면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한 원리다. 상황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낫다. 연약한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강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낫다. 제한된 지식을 가진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낫다. 이 두 선택지가 있을 때, 누구나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낫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눈 앞에 적이 있을 때는 이 당연한 원리가 좀 멀게 느껴진다. 적은 눈에 보이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외세의 위험이 있을 때 애굽이나 앗수르와 같은 다른 대국들을 의지해서 당장의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했었다. 9절에서 말하는 ‘고관’들이 아마 그런 나라의 왕들을 의미할 것이다. 어쩌면 이 시편 기자도 그렇게 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도움을 구했지만 결국 도움을 얻지 못했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하고 이렇게 고백하는 것 일 수 있다. 시편 119:71이 말하는 것처럼 고난 당한 것이 그에게 이런 면에서 유익이 되었다.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낫다는 말씀을 배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시편기자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통해 확신하게 된 사실은 여호와께서 승리를 주신다는 것이다(10-16절). 10-12절은 이렇게 말한다.

118:10–12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11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12그들이 벌들처럼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 같이 타 없어졌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시편 기자는 그를 에워싼 적들을 결국은 끊어버릴 수 있었다. “끊는다”는 이 상황에서 매우 독특한 표현인데, 이 단어가 다른 모든 곳에서는 할례를 행한다(표피를 벤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적군에게 할례를 행하게 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시편 기자는 그를 에워싸고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던 적을 “떼어냈다”는 뉘앙스를 주려고 이 단어를 선택한 것 같다. 특히 그를 둘러싼 적들이 이방인들이었을 것을 가정해 보면 언어유희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에워싼다”와 “끊다”와 함께 반복되는 표현은 “여호와의 이름으로”다.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때문이었던 것이다. 13-14절도 확실하게 이 부분을 인정한다.

118:13–14 너는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도우셨도다 14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대적들은 시편 기자를 넘어뜨리려 했지만, 즉 죽이려고 했지만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셨다. 그렇게 그의 능력과 찬송과 구원이 되어 주셨다. 시편 기자는 이것이 자신만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모든 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임을 노래한다.

118:15–16 의인들의 장막에는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16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인자하심, 구원, 승리로 인해서 의인들은 기뻐하며 구원의 찬송을 부를 수 있음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자신도 이 찬양을 함께 할 것임을 말한다.

118:17–18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18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도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죽음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죽음은 모든 사람처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땅에서의 삶을 허락하시는 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겠다고 다짐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을 이 땅에 선포하기 위해 죽지 않고 살겠다고 다짐한다.

공적(19-28절)

이어지는 19-28절의 말씀은 기쁨으로 그렇게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지금까지는 개인적인 간증과 감사였다면, 여기부터는 좀 더 공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118:19–20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20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의인들이 들어가는 문을 의의 문들이라고 부르며 그 문으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 감사의 이유는 21절에서 다시 간략하게 말한다.

118:21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22-24절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감사와 기쁨을 표현한다.

118:22–24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24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이 문맥에서 건축자의 버린 돌은 시편 기자 자신 혹은 그가 대표하는 이스라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다른 나라들에게는 버림을 당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장 중요한 자리에 두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역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은 기이한 일이었고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라는 설명 외에 다른 설명은 불가능했다. 사실 이스라엘은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으로 역사 상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였다. 아마 시편 기자가 경험했던 상황도 그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집 모퉁이의 머릿돌을 삼으셨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그 일의 수혜자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뻐하고 기뻐해야 했다.

그리고 이 기쁨의 감사는 미래의 승리에 대한 간구로 이어진다.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주실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26절은 그들의 지도자(왕)을 축복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그리고 27절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의 예배를 드려야할 것을 강조하고 28절은 다시 개인의 감사로 마무리가 된다.

118:27–28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28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그럼, 이 모든 말씀이 예수님께는 어떻게 적용이 되었는지 보자.

예수님

먼저 예수님도 여기 시편 기자와 같은 고통 중에 계셨다. 예수님은 대적들에게 둘러싸여계셨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고발하려고 둘러샀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둘러쌌다. 십자가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둘러쌌다. 반면에 항상 예수님을 둘러싸고 다녔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났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다고 노래하실 때 예수님은 이런 모습을 이미 마음에 두고 계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으셨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셨다. 그래서 십자가에서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크게 소리치시고 돌아가셨다(눅 23:46).

이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라는 말씀을 붙드셨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탄식하셔야 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예수님의 편이 되셔서 예수님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실 것을 믿으셨다. 물론 시편 기자의 경우는 실제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했지만, 예수님은 더 놀라운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알고 계셨다.

그렇게 예수님은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말씀을 궁극적으로 성취하셨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영원한 구원을 이루시고, 친히 교회의 머릿돌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이 구원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해하지를 못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자 지혜라고 선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전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이방인들은 이것을 어리석다고 했고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기쁨을 주는 구원이 없다. 예수님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빛을 어둠 가운데 있던 우리에게 비추셨다. 그렇게 시편 118편은 믿는 우리의 노래가 되었다.

우리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을 경험한 우리는 시편 118편의 저자와 같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는 수사적인 질문으로 정해진 답이 있고, 그 답은 “없다”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은 내가 참 많은 일을 한다. 나를 배신해서 좌절하게 만든다. 비난하는 말로 나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실제로 육체의 상해를 가할 수도 있다.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람이 내게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맞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2:4–5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정말 두려워할 자는 우리 영혼을 심판하실 하나님이시지, 몸만 죽이고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가할 수 있는 최고의 해는 그저 70-80년 살다가 끝나는 이 땅에서의 삶을 좀 일찍 끝내는 것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을 결정하신다. 하나님께서 내 편이시고, 사람이 그런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또한 우리는 시편 기자와 함께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궁극적인 구원, 인자하심을 나타내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이 질문을 해야 한다. 나는 시편 118편을 진심으로 노래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내 편임을 신뢰하며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기대하며 살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때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내 편이 맞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진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셔서 구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삶이 힘들고 답답할 때 그런다.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 정말 내 편이신 것이 맞느냐고 따지려고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신뢰한다.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기도한다. 그리고 오히려 사람에게 기대한다. 그 사람이라면 나를 위로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그 사람이라면 나의 부족함을 채워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사람이 나를 도울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승리하게 되더라도 그 승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얻은 승리가 아닌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가 아니라 사람이 준 승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에게는 감사하는데 하나님께는 감사하지 않는다. 그저 형식적인 감사의 말을 할 뿐이다. 반대로 패배하면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다.

이것이 내 삶의 모습에 대한 묘사와 유사하다면 나는 이 시편의 명령에 정확하게 불순종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선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별 것 아니라는 거짓이다. 내 입의 노래뿐 아니라 내 삶의 노래를 점검해야 한다.

도전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시편, vol. 3, 968, “저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선하심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억압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그는 공격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원수에게서 구해주셨다. 그는 쓰러질 뻔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일으켜 세우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는 중요한 일을 맡기셨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자들도 다르지 않다. 우리도 죄에서 해방되었고, 구원 받았으며, 해야 할 일이 주어졌다. 이것이 당신의 경우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일을 시작하라.”

내가 구원 받은 자이고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지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항상 기억하고 또한 매일 베푸시는 그 인자하심을 맛보는 것이다.

24절에서 말하는 “이날”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이 모든 시편의 말씀을 이루실 재림의 때를 의미한다. 하지만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매일이 이날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