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어지고 세워지다

본문: 에베소서 2장 11-22절

설교자: 최종혁

 

구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가장 기초적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 주로 죽음 이후의 세계로서의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말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배우다보면 구원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한 것임을 알게 된다. 천국에 가는 것이 작고 보잘 것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 좋은 곳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간다는 의미다. 창세기를 보면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 창조의 가장 큰 특징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상 대리인으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창조한 사람을 하나님의 임재를 두신 에덴 동산에 두셨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되기를 원했다. 그것이 죄의 본질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 내셨다. 그리고 그들이 그곳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셨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끊어졌던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사람에게는 ‘죽음’이라는 형벌이 내려졌다. 이 죽음은 세가지 측면이 있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육체적인 죽음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죽음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영원한 죽음이다. 죄인이 된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고 육적인 죽음을 통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영원히 사랑의 하나님과 관계적으로 분리되어 고통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지옥이다. 

구원 받으면 천국에 간다는 것은 바로 이 영원한 운명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말은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구원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은 기본적으로 ‘관계’의 문제이고, 그런 면에서 죽음은 그 관계의 단절이고 부활은 관계의 회복이다. 그리고 영생은 그 회복된 관계의 기쁨을 누리는 영원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에베소서 2:1-10의 말씀이 바로 이에 대한 말씀이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탄을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사람들이 새생명을 얻어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앉게 되었다. 10절에 따르면 이는 새로운 창조와도 같은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는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들, 즉,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 바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생명으로 참된 삶을 사는 자들이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각 개인이 들어오는 것으로 구원은 그 목적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성도가 되는 것 뿐 아니라 우리가 교회가 되는 것도 하나님은 계획하셨다. 하나님과의 관계적 회복 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적 회복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바울은 2:1-10에서 구원의 개인적이고 수직적인 면을 강조하여 기록한 후에, 11-22절에서는 구원의 공동체적이고 수평적인 면을 강조하여 기록했다.

이 두 단락은 “그러므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 편지를 처음 받은 사람이라면 “그러므로” 뒤에 무슨 내용이 올 것을 기대했을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자는 내용을 기대했을 수 있다. 혹은 10절 끝에서 말한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 이어서 실제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이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을 수 있다. 하지만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는 이미 1장에 기록되어 있고, 실제적으로 그 가운데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는 4장부터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우리 모두가 다 동일한 상태에서 동일한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내포된 또 다른 중요한 진리를 이제 소개하려 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진리다. 

그 진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관계를 단절시켰던 막힌 담은 허물어졌고, 그렇게 구원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서 지어져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어지고 세워지다”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다. 따라서 교회는 구원에 추가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구원의 한 측면이다. 무엇보다 오늘 이 사실 하나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이 자리를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 진리를 이방인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생각하라”(11절)는 1-3장에 나오는 유일한 명령어로서 성도들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교회로서의 신분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억해야 했던 것처럼, 신약의 교회도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 것이다. 단순히 한번 생각해야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기억해야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본문)

13절이 기억해야하는 내용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데, “전에 멀리 있던 너희”에 대한 설명이 11-12절이고,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에 대한 설명이 14-18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절(“그러므로”) 이하가 이 단락의 최종 결론이다. 먼저 11-12절에서 “전에 멀리 있던 너희”에 대한 설명을 보자.

전에 멀리 있던 너희(11-12절)

바울은 구원 받기 전 “그 때”의 성도들에 대해서 “육체로는 이방인”이라고 간단하게 표현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바울은 조금은 장황하면서 특이하게 이 말의 의미를 설명한다. 

2:11 …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바울은 유대인은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즉 불리는 자들’로 그리고 이방인은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불리는 자들’로 표현한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의 표로 주신 것으로서(창 17장)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그들에게 수치가 된다고 말했었다(창 34:14). 
  • 모세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은 애굽으로 향하는 모세를 죽이려고도 하셨었다(출 4:24-26). 
  •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을 위해 요단 강을 건넌 후에 가장 먼저 했던 것도 그 동안 행하지 못했던 할례를 행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할례 없는 자’로서 전쟁을 치를 수 없었다(수 5:2-9). 
  •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인 후 삼손은 목이 말라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삿 15:18). 
  • 요나단이 블레셋과 싸울 때,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사울이 전쟁에서 죽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할례 받지 못한 자”(삼상 14:6; 17:26; 31:4)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로마서 3-4장을 보면 유대인들은 할례를 언약의 표 이상으로 여겨서 할례를 받는 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이며 따라서 구원, 칭의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곧 그들의 정체성이었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신분의 상징과도 같았다.

하지만 바울은 할례 받은 무리와 할례 받지 않은 무리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렇게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고 표현했다. 누가 유대인을 할례 받은 무리라고 부르고, 누가 이방인을 할례 받지 않은 무리라고 불렀을까? 서로가 그렇게 불렀고, 그것은 경멸의 표현이었다. 유대인들의 경우 앞선 예에서 이미 알 수 있는 것처럼 할례 받지 못한 자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했고 그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상황이 그러하니 이방인들의 입장에서 그런 유대인과 할례를 좋게 볼 이유가 없었다. 로마인과 헬라인들은 할례는 불필요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할례 받는 유대인을 그들은 비웃고 조롱했다고 역사가 요세푸스와 필로는 증언한다.

이렇게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중요한 할례를 바울은 “손으로 육체에 행한”이라고 표현해서 단순히 그것이 ‘외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할례는 언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할례를 거부했던 이방인들은 12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여러 영적인 특권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 때”의 이방인들에게 진짜 문제였다. 외적인 할례를 거부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와 함께 영적인 영역에서 하나님과 단절된 것이 궁극적인 문제였다.

바울은 다섯 가지 면에서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단절되었다고 말한다.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먼저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죄가 시작된 시점에서 이미 주어진 구원자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말씀을 통해 구원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방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지, 어떻게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갔다. 그들에게 구원자가 필요함도 알지 못하고 살아갔다.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다.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누리지 못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특별히 택하셨고 그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셨다. 그들에게 특별히 자신을 드러내셨다. 기적을 통해, 말씀을 통해, 선지자를 통해 그렇게 하셨다. 그들의 제도와 절기도 모두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고 말했던 것이다(신 33:29). 시편 147편의 저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들을 나열한 후에 이렇게 결론 맺었다.

147:20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이스라엘은 그 어떤 나라도 누리지 못한 복을 누렸고, 반대로 이스라엘이 아닌 나라들은 이러한 복을 누리지 못했다는 말이다.

셋째로 이방인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사랑의 관계로 매어두셨다. 그러하기에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파기하지 않으실 것을 믿고 살아갈 수 있었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현실이 될 것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언약이 현실이 될 때 이스라엘은 수혜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은 이런 언약하고는 관계가 없다. 아무리 좋은 남편이 있어도 그 사람이 내 남편이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이방인에게 있어 언약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넷째와 다섯째로 이방인은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다. 바울은 이방인들의 궁극적인 상태를 ‘어떤 소망도 없는 절망적인 상태’로 말하고 그 궁극적인 이유를 ‘하나님이 없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앞에서 나열한 이방인들의 상태에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이다. 하나님이 없는 그들에게 어떤 소망도 의미가 없다.

사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없다’는 표현은 참 아이러니한 표현이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당시의 신들을 믿지 않고 유일신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신이 없는 사람들’로 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이방인들이 믿고 있는 그 많은 신들 중에 참된 신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신이 없는 자들,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참된 하나님이 없기에 그들에게는 참된 소망도 없었다. 그들이 소망을 두는 모든 것들이 결국은 사라질 세상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에 멀리 있던” 이방인들의 상태였다. 어쩌면 이방인들의 입장에서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바울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육체로” 이방인으로 태어난 것 뿐이다. 스스로 이방인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최소한 태어나고 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중에 선택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이방인으로 태어났을 뿐인데, 이런 신분과 상태라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2:1-3에서 묘사하는 인류의 상태가 억울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었던 것처럼, 여기 이방인들의 상태도 마찬가지다. 로마서 1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밖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핑계할 수 없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롬 1:19-20).

또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들은 궁극적으로 모든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그가 복의 근원이 되어 그를 통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12:2-3).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자신을 드러내시고 이스라엘을 특별한 민족으로 만드신 것은 이방인들이 그것을 보고 그들도 하나님 섬기기를 원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왔던 사람들과 민족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가지고 있는 영적인 특권들이 남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 되었다.

따라서 11-12절에서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의 억울했던 과거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이 아니어서 겪었던 설움에 공감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에서 멀어졌다. 이것이 “전에 멀리 있던” 우리의 상태이기도 하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서 멀어져 있었다.

이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그리스도의 피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다.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4-18절)

그런데 13절의 요약은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있는 것 같다. 뭐가 어떻게 가까워졌다는 말일까? 이에 대한 요약적 답은 18절에 있다.

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둘”, 즉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게 하시는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관계 없이 누구든 함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워진 것인데 한 성령 안에서 둘이 함께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유대인에게든 이방인에게든 파격적이다. 둘 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2:1-10에 기록된 것처럼 죄 가운데 죽은 자들이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감사할 수 있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각자가 그런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꽤나 충격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굳이 왜’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선포하면서 설명하기 시작한다.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

11절에서 바울은 넌지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분열을 말했었다. 이런 분열과 싸움은 이기적 욕심을 채우려는 욕구의 결과인데, 그러한 이기적인 욕구가 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언제나 분열과 다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이다.

그런 세상에 예수님은 평화를 가져오셨다. 예수님은 태어나시기 전부터 “평강의 왕”이라 불렸고(사 9:6),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천사들은 이렇게 찬송했었다.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렇게 사람들에게 평안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었다.

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먼 데 있는 너희는 이방인들이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은 유대인들이다. 멀리 있든, 좀 더 가까이에 있든 상관없다. 좀 더 가까이에 있다고 해서 스스로 평안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에게 평안이 필요했고 오직 예수님이 그들 모두에게 평안을 전하실 수 있으셨고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자들은 이 참된 평안을 누릴 수가 있다. 

실제로 예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평으로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바울은 14-16절에 기록했다.

2:14–16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원수 된 것”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적대시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던 것이 “중간에 막힌 담”이었다.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장소였던 성전은 여러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 레위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 유대인 남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유대인 여자는 여인의 뜰에 있어야 했고, 성전에서 가장 먼 곳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다. 이방인의 뜰에는 담이 있었는데,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돌 중에는 이런 경고문이 적혀있다고 한다. “이방인은 이 담 내부와 성전 주위의 뜰로 들어올 수 없다. 들어가다 발각되는 사람은 그 결과로 죽임을 당해도 본인의 책임이다.”

이방인의 뜰은 이방인도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올 수 있게 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반대로 이방인은 이 이상 절대 넘어올 수 없다는 분리와 배척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방인들 입장에서는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 굳이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 있던 담은 “중간에 막힌 담”으로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원수됨, 분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는 잘못된 소문으로 인해 죽임을 당할 뻔한 일도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셨다. 물리적으로 그 담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더 이상 그런 육신을 따르는 민족적인 구분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은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도덕법이 아닌, 유대인을 구분하고 분리하기 위해 주어졌던 법들은 모두 폐하여졌다는 말이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구분하는 모든 것을 폐하시고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15절).

예수님은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만들거나, 유대인을 이방인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혹은 반씩 섞지도 않으셨다. 이제 그 둘은 예수님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창조되었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존재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그런 존재다. 그리고 교회는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로 한 몸이 되어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사람 사이의 원수된 것을 허무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원수 된 것도 예수님은 십자가로 소멸하셨다.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어떻게 이 모든 원수된 것이 소멸되었을까? 어떻게 사람과 하나님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열의 장벽이 허물어졌을까? 모든 분열이 죄의 결과였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래서 저주의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축복의 십자가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린 모든 죄의 문제에서 자유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모든 막힌 담은 허물어졌다.

결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가지 강조할 것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으로서 예수님 안에 있든 자들을 예수님의 피로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신 것이 아니다. 즉, 구원 받은 자들은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십자가로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드셨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한 몸이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 안에서 한 새 사람, 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간다. 이것은 가능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결과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믿는 자가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은 부가적인 문제가 아니라 필수적인 문제인 것이다.

전에 멀리 있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서로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워졌다. 이제 이 사실의 결과를 정리해보자.

결과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구원 받기 전에 ‘멀리 있었던’ 사람들은 구원 받은 후에도 스스로 외인처럼 혹은 나그네처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전에는 차이가 있었고 구분이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모두가 동일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고 하나님의 가족이다. 누구는 더 특별한 시민이거나 더 사랑받는 가족이거나 하지 않다. 모두가 동일하다.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에도 유대인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 이방인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는 있었을 것이다. 주인들이 많은 교회가 있고 종들이 많은 교회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상황과 편이에 의해 그렇게 구성원이 정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차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모두가 동일한 시민이고 가족이다.

그리고 끝으로 바울은 건물의 비유를 통해 교회의 모습을 설명한다.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도와 신약의 선지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으로 교회의 터를 놓았다. 그 터의 모퉁잇돌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교회가 세워져간다는 의미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건물의 각 부분은 아주 정교하고 확실하게 연결되어 간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는 계속해서 함께 지어져 간다. 

그 안에는 유대인도 있고 이방인도 있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도 있다.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다. 각자가 좋아하는 것이 다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재능도 다르고 은사도 다르다. 사실 이런 것들 때문에 교회 안에는 갈등이 있기도 하고 다툼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것들은 교회의 분열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그 모든 분열은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어졌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차이는 이제 정교하게 들어맞아서 빈틈없이 튼튼한 성전으로 지어져갈 것이다. 교회는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어지고 세워지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도전

처음에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잊어서는 안된다. 내가 구원 받았다는 말은 교회의 지체로서 살아간다는 말을 포함한다. 특히 요즘처럼 공동체 보다는 개인을 더 우선시 하는 문화 속에서 교회도 그렇게 삶의 뒷자리로 밀려나는 공동체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개인의 구원이 중요한 만큼 교회로서의 부르심도 중요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한 새 사람으로도 지음을 받았다. 내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라면 또한 나그네나 외인이 아니라 교회로서 하나님의 가족임을 잊지 말고 그에 합당한 책임감을 가지고 성도들을 대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교회를 대할 때 어쩌면 전보다 성도들을 대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이상한 것은 아니다. 멀리서 가볍게 관찰자로서 누군가를 대하는 것과 가깝게 책임감을 가지고 가족으로서 누군가를 대하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그렇게 할 때 앞서 말한 여러 차이들이 벽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그럴 때 이 말씀을 기억하라. 예수님은 그 모든 벽을 허무셨고 우리를 함께 세워가고 계시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함께 지어져 가고 있을 뿐이다. 혼자가 편할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드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무 의미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안을 전하셨고 우리의 화평이 되셨다. 우리를 하나로 만드셔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다. 편하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불편함을 기쁨으로 감수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