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그리스도인의 소망
본문 : 베드로전서 1장 3~7절
설교자 : 조성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3-7)
아담으로 인해 우리 인류는 완전히 망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에는 하와가 식사를 준비했다거나 아담이 출근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편안하게 살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빠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로 인간들의 삶에는 죽을 때까지 안식이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담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세상에서 품는 모든 희망은 헛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아이의 장래에 대해 기대를 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깨집니다. 인간이 품는 모든 소망은 다 깨지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시스템 자체가 거짓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에 기초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습니다. 부모들은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자신들의 상황이 나아질 거라 생각하지만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한 이후에도 부모의 손을 떠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조부모가 손자, 손녀까지 키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갖게 되는 유일한 소망은 고통없이 죽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다가도 병원에서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면 당황하게 됩니다. 죽을 때까지 사람들은 속고 사는 것입니다.
저희 동네에 사시던 부유한 할머니가 치매기가 있는 남편을 돌보며 사셨는데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월수입이 넉넉함에도 평상시에 택시비를 아끼려고 집에서 먼 거리에서 내려서 집까지 걸어오시곤 하셨답니다. 마귀가 인간들을 속여서 평생 고생하다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소망이 없습니다. 인간은 인생에 대해 항상 기대하며 삽니다. 생활이 윤택해지고 편안해지면 앞으로의 삶이 점점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부족함을 느낄 뿐입니다.
행복지수가 제일 높은 나라는 부자나라가 아니라 가난한 나라입니다. 행복지수가 제일 높은 부탄은 모두가 가난하기에 행복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소망이 없습니다. 장례식에서 사람들은 고인에게 ‘거기에서는 편하게 쉬라’고 하지만 지옥에 간 사람들에게는 고통만 있을 뿐입니다.
베드로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산 소망은 거짓되지 않은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인간의 삶을 보면 참 불쌍합니다. 사람들은 비싼 옷을 사서 외출복으로만 입습니다. 그러나 그 외출복은 나갈 때만 입을 뿐 집에서는 남루한 옷을 입습니다. 살림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낡고 좋지 않은 것을 쓰다가 손님이 올 때만 좋은 것을 꺼내 씁니다. 아끼던 것들도 유행이 지나면 버리고 맙니다. 얼마나 인간이 불쌍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돌아가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기에 우리에게는 산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죽은 소망 가운데 소망을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 안에서 옛 육신 가운데 있을 때 품었던 소망은 헛되고 거짓입니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를 기억하십시오.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되고 지혜롭게 된다고 했으나 그 결과는 쓰디쓸 뿐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더 좋은 집을 짓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직장을 가면 더 행복할 거라는 사탄의 유혹은 거짓입니다. 이번에 청년들과 대화하면서 결혼할 대상의 우선 조건이 무엇이냐고 묻자 외모라고 답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다 사탄의 꼬임입니다. 육체의 소욕, 탐심과 시기와 질투가 인간 안에 있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행복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것뿐입니다. 벤츠 차를 타거나 외모가 준수한 남편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보기와 실제는 다른 것입니다. 행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소망만이 진정한 소망입니다. 우리의 썩지 않을 기업은 하늘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라는 한 사람이 우리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합니다. 모든 것을 절망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돈이 많다고 해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희 동네의 부유한 자식들을 둔 노부부의 삶은 남루하고 초라합니다.
아담이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은 지옥, 사망, 죄악, 탐욕, 불행,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망과 율법을 폐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진정한 평화, 기쁨, 소망, 하늘나라의 기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담이 물려준 것은 날마다 우리가 체험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것은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 가서 누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나라의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늘나라는 이미 너희 마음 안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미 우리는 하늘나라의 법에 적용받고 있고 하늘나라의 주님을 왕으로 섬기고 있으며 모든 것이 완전히 바꾸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면 이 기쁨이 그들의 마음속에 없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잘 모르기에 이런 축복을 하늘나라에 가서 누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살아있고 헛되지 않은 복된 소망입니다. 왜 복된 소망일까요? 여러분이 손자가 커서 사회적으로 성공하리라고 확신한다면 다른 이들의 비웃음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품은 소망은 확실하고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 가운데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돌도 안 된 자녀의 진로를 놓고 싸운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인간이 꾸는 꿈이 바로 이렇게 헛된 꿈입니다. 속아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 산을 넘으면 평야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지만 계속 산이 이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진 소망은 산 소망입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 하늘에 간직하신 기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소망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살아갈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는 우리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잠시 동안 고난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머지않아 주님이 오시면 하늘나라에서 영원토록 새로운 몸을 산다는 사실 말입니다.
기독교 서적 중에 한 책에서 저자는 천국의 화장실이 황금으로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하늘나라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저자는 천국에 대해서 아름답게 묘사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늘나라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생명수 강가에서 생명나무 과일을 먹을 수 있고, 배고픔과 질병이 없는 곳입니다. 오직 영광과 찬송과 즐거움만 있는 곳입니다. 육체의 악한 정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속성으로 창조된 새로운 몸을 가지고 영원토록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새로운 몸, 새로운 영광, 새로운 환경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다는 소망만 가지고도 우리는 기쁘게 살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만일 오늘밤 천국에 오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주님 제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라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죽음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나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잔치를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드디어 그 곳에 가게 되었다고 기뻐해야할 것입니다. 저는 처음으로 외국에 나갈 때 설레어서 전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제가 외국에 가게 되는 날 왜 하필이면 나냐고 물었을까요? 하늘나라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담의 정죄 아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도 고난 가운데 있고, 평생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 쉬운 직장을 구해주고 고생 없는 편안한 삶을 살게 하겠다는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딸들이 출산의 고통 없이 아기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해도 그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정죄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습니다. 사망, 고통, 근심, 걱정이 사람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아닌 천국에서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현재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소망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소망을 두고 이 세상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는 새로운 몸,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감사해야합니다. 현재의 내 삶이 괴로울지라도 하늘나라의 소망을 두고 기뻐할 수 있어야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엄청난 복을 받은, 살아있는 소망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저는 하늘나라에 대해서 상당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상급에 대해서도 기대가 됩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런 복을 받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가 믿고 싶어서 믿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내 눈을 여셔서 주를 보게 하시고 주를 믿게 하시고 하늘의 복된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여러분이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날마다 기뻐해야하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이 땅에서 사는 것도 좋지만 갈 수 있다면 빨리 가고 싶은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늘의 소망이 없다면 내가 살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굉장히 불쌍한 삶입니다. 허무하게 세상에서 살다가 고통 가운데 죽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도 아담의 범죄로 인한 고통스러운 삶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힘들게 일해야 하고 건강을 위해 애쓰고 내 속에서 악한 정욕이 일어날 때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싸워야하고 욕심을 억눌러야하는 고통에서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복되고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위에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인생의 고달픔, 육신의 쇠잔함, 외로움과 고통을 이기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돼지 농장에 가서 돼지를 보면서 복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돼지의 운명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병아리사육장에서 병아리를 보면서 복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없다면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든지 그 마지막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어떠하든지 그는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럼 우리 이제 얼굴을 밝게 합시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라면 우울한 표정을 짓진 않을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천국의 소망은 우리 삶속의 고통으로 인해 잊힐 정도의 기쁨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차고 넘치는 기쁨입니다. 사도바울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헐벗고 굶주렸고 맞고 정처가 없었지만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을 산 소망과 하늘에 두고 기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