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리스도인과 직장 2 – 본이 되신 그리스도

본문 : 베드로전서 2장 21-25절

설교자 : 조정의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 오늘 본문 말씀의 앞부분, “이를 위하여”는, 18-20절에서 사환들에게 했던 명령, 즉 ‘주인에게 순종하라. 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을지라도 선을 행할 때 하나님 앞에 칭찬이 있다’는 말씀과 이어집니다. 또한 이 말씀은 베드로서의 전체 주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서의 전체의 주제는 ‘고난’이고 ‘고난 중의 성도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1:6). 당시 여러 시험과 고통 중에 있던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베드로는, 그 고난이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1:7)고 말합니다. 그들의 믿음을 정결하게 해주는 고난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칭찬, 영광, 존귀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2:12)고도 했습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2:15).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선을 행하면, 그것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말을 막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부당한 고난을 받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으면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3:14),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4:13). 그러므로 베드로는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칭찬과 영광, 존귀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5:10).

베드로서는 이 ‘고통’이라는 주제를 매 장마다 다루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어떻게 순종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 받기 위해, 그 고난 가운데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클라우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숙명이 아니라 부르심이다’(152p).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부르심은 예수님께서 직접하시기 말씀과 동일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행인, 나그네),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너희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2). 예수 그리스도도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셨습니다. 여기서 “본”이라는 말은 특이한 단어입니다. 요즘 아이들도 글자 따라 쓰기를 하는데, 당시에도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글자를 처음 가르칠 때 글자를 희미하게 써놓고 그 위에 덧대어 쓰도록 가르쳤습니다. 또는 화가들이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덧칠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있는 것을 따라 쓰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대로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확실한 본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 가운데 고난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대로 살면 됩니다. 그 확실한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여기서 “자취”라는 말은 발자취를 말합니다. 눈이 많이 온 날, 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 발자국이 있으면 희망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국, 그분이 하신 일, 걸어가신 발자취가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주님일 뿐만 아니라 선생님이셨습니다. 입을 여시어 가르치셨고 가르치신 것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게 배우라”고 하셨고, 직접 온유함과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를 좇으라”고 하셨고 어디로 가야할 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라고 가르치셨고, 주님께서 직접 허리를 숙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가장 낮은 자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잠깐 전해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과 항상 함께 했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한 장소까지 데리고 갔던 핵심 제자, 수제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분의 선하심과 가르침, 삶을 모두 보았고 핍박 당하시고 돌아가시는 장면까지 지켜본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고난 가운데 어떻게 순종하셨는지,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맺게 되었는지 그는 생생하게 경험했고 그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우리가 고난 중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생생하게 그려낸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22~25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베드로가 이사야 53장의 여러 구절을 사용하여 표현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습이며 한 마디로 베드로의 이사야 53장에 대한 강해설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 째, 그리스도가 당하신 부당한 고난, 둘 째, 그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순종의 본, 셋 째, 그 결과 입니다.

1. 부당한 고난(2: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22). 이 구절이 새번역에는 과거형으로 번역됩니다.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새번역).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실 이유가 아무것도 없으셨다는 말입니다. 죄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도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서 시작된 죄는 보통 말과 행동이라는 두 가지 경로로 표출된다. 미움이라는 마음의 죄는 폭언이나 폭행으로 표출됩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술로도 행동으로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혀를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 무엇보다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입에서 악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3년 내내 따라다닌 사람이 한 말입니다. 가족이 한 번도 악한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입술로 거짓과 악을 내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삶의 어떤 행동에서도 아무런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무결점하신 분이라는 것을 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마 27:4; 요 8:29; 고후 5:21; 히 4:15; 요일 3:5).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니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성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인성도 가지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죄를 지으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당연히 죄를 지으실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끊임없이 사단이 예수님을 죄로 넘어뜨리려고 노력했던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사단의 모든 시험을 말씀으로 이겨내셨을 때 사단은 다음 기회가 오기 전까지 잠시 피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끊임없이 사단에게 유혹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유혹에 노출되었지만 입술로도 행동으로도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분은 오늘 하루 죄 지은 것만 해도 50번이 넘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했을 때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나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욥의 친구들도 그런 점에서 욥의 양심을 건드려 괴롭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런 죄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 고난은 결코 합당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죄에 있어서 온전히 순결하신 분으로서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입에 담지도 않으셨고 행하지도 않으셨으며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곁에서 지켜본 요한도 그분에게서 드러나는 성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고 모든 성품에서 아무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당하는 고난에 대해 ‘이런 억울한 일은 누구도 참을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예외 사항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따를 수 있는 완전한 본이 되십니다.

2.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의 순종의 본(23~24절)

1) 하지 않으신 일: 죄(23절)

예수님께서 말할 수 없는 부당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하셨는지를 보겠습니다. 23절은 그리스도께서 ‘하지 않으신 일들’이고 24절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신 일들’입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23). 입술에서 조금의 거짓과 악도 없으셨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시면서 수많은 욕을 당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불렀던 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술주정뱅이, 귀신들린 자, 바알세불의 힘을 입은 자, 백성과 국가를 위협하는 자, 신성 모독 하는 자 등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욕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사역을 시작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끊임없이 조롱과 기만, 후욕, 비방, 모욕 등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구세주이면 내려와 보라’고 했고, ‘누가 와서 구하나 보자’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어디 한번 지어봐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의 제자로서 그 모든 조롱의 말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저들은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이간질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더욱 침묵하셨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고, 부당한 고난 중에 입술로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셨지만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초기부터 위협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이적으로 좋은 일들을 해도 사람들은 동네에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절벽으로 끌고가서 죽이려고도 했고 돌로 치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공모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을 앞에서 심문과 시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을 출교시키는 일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기간에는 그 핍박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셨고,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질을 당하셨으며, 나무에 높이 달려서 저주받은 자처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모든 참혹하고 치욕스러운 고난을 다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록에 보면, 당시 십자가에 처형됐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저주하며 ‘하나님이 너를 벌하실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마카비안순교자)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입만 열어서 말씀하시면 병든 자가 일어나고 소경된 자가 눈을 뜨며 죽은 자가 살아나고 파도가 잔잔해 지는 분께서, 하나님께 요청하면 열두 군대나 되는 천사를 보내실 수 있는 분께서 위협하지 않으시고 갚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권세를 목격한 베드로에게 주님의 침묵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23). ‘부탁한다’는 것은 최종판결자에게 위임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계속해서 의탁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순간에 위협하지 않으시고 이 모든 일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 곧 하나님께 계속해서 부탁하셨다는 것입니다(1:17). 이것이 예수님이 고난을 겪으실 때 가지셨던 자세입니다. 직장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부딪칠 때, 죄와 싸울 때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와 같은 본에 따라 고난을 참아낼 수 있습니다.

2) 하신 일: 순종(24절)

24절은 이사야 54장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24). 이사야 53장에는 고난 받는 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옮겨달라고 하신 주님은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었던, 메시아가 백성을 위하여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순종으로 이뤄졌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그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라는 구절은 이사야의 말씀을 살짝 수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의 말씀을 왜곡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전쟁 중에 수류탄이 떨어졌을 때 장교가 그것을 대신 짊어지고 멀리 떨어져서 순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도 우리 대신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스스로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희생 제물로서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죄에 대한 모든 진노와 심판을 그리스도께 부으셨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죄가 씻겨 내려간 것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24). 로마시대의 채찍은 가죽 끈 끝에 날카로운 쇠를 달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법에서는 횟수에 제한이 있었지만 로마의 법에는 제한이 없었습니다. 집정관이 그만 하라는 지시를 하기까지 때리는 형벌이었습니다. 주님은 채찍에 맞으실 때마다 그 몸이 상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상하심 때문에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음”은 ‘치유’를 말합니다. 우리는 죄의 저주에서 완전히 치유를 받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나아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죽으셨을 때 가능했습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24). 이것은 예수님의 희생의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얻었고 의에 대해 다시 살아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으니 너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무조건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예수님이 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열심히 노력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룩한 자로 부르셨기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셨을 때 가능했습니다.

3. 결과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25).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결과, 우리에게 나타난 변화입니다. 우리가 양과 같이 길을 잃었다는 것은 이사야 53:6을 인용한 것입니다. 양은 목자가 없으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삽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구원받기 전의 사람들을 가리켜, 조상의 헛된 행실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양들처럼 그저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순종을 통해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을 만난 것입니다. 목자는 돌보는 분, 인도하시고 공급하시는 보호자입니다. 목자가 그 양을 사랑하고 아끼며 돌보는 것처럼(시 23) 모든 것을 감독하여서 보호하는 것처럼 이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나는 육체의 소욕대로 사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2:10).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셨습니까? 어떻게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던 자에서 영원한 기업을 누릴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세상 어떤 고난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부당한 고난을 당하시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신뢰함으로 악을 행치 않고 선을 행하셨을 때 우리에게 임한 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고 있고 그 은혜를 맛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어두움 가운데서 너희를 불러내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여러 고난들 가운데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은 하나님의 당연한 부르심이다,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이라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의 기업을 이어받을 자라면 그분의 고난에도 참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에 참여함으로, 세상과 우리의 이웃과 믿지 않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선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주와 선생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따라오라고 하신 본입니다. 여러분이 그 밑그림 그대로 그려 내신다면 그리스도의 삶을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