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리스도인과 직장

본문 : 베드로전서 2장 18-20절

설교자 : 조정의

벧전 2:18-20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오늘 본문까지의 말씀을 조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1장 시작에서부터 2장 9절까지 베드로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지에 대한 ‘교리부분’을 다루고 있고, 그 이후부터는 그것을 어떻게 삶에 적용할지에 대해 ‘적용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두움과 멸망 가운데 있던 자들로서 전도서 기자의 유명한 말처럼, “헛되고 헛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던 우리였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불러내셔서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영원한 기업을 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2:9). 우리의 신분이 이렇게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불순종과 멸망의 자녀, 하나님의 원수, 약속 밖의 사람들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함이라”(2:9).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라고 밝히고, 그 이후의 말씀부터는 그 목적에 맞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는 것과 정치 체계 안에서 권세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 맞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물론 오늘 본문 말씀이 직장생활에 대한 모든 지혜를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외에도 직장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성경의 원리들이 있습니다(엡 6:5-8, 골 3:22-25, 고전 7:21, 딤전 6:1-2, 딛 2:9-10). 그중에서 오늘 말씀은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직장인들은 연간 2,163시간을 일한다고 합니다(OECD국가 중 6년 연속 2위). 눈을 뜨면 일터로 나가서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이 직장이라는 것이 제품을 만들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버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에게는 또 다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를 불러내신 하나님의 구원 목적에 부합하는 큰 의미가 우리의 직장생활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명령: 순종하라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18). 베드로가 편지를 썼을 당시에 “사환”은 ‘노예’, ‘종’을 가리킵니다. 당시 교회 안에 부와 명예가 높은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 아마도 이 편지를 읽었을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사람들(노예층)이었을 것입니다. 로마 제국은 영토를 확장하며 여러 민족을 침략하면서 그곳의 포로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길거리에 유리된 사람들이 노예가 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빚이 너무 많은 사람은 스스로 노예가 되기도 했고, 어머니가 노예인 사람의 자식은 자동적으로 노예가 되었습니다. 로마 시대의 노예는 많게는 전체 인구의 반이었고, 적게는 1/5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도 노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사환들’은 어떤 집에 소속된 노예들입니다(눅 16:13, 행 10:17, 롬 14:4).

여러분들은 아마도 ‘나는 노예가 아닌데’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제가 당시 노예들이 했던 일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건축업 관련업자, 교사, 어린이 돌보는 사람, 학원, 의사, 농부, 광부, 어부, 요리사, 상인, 경호원, 주택관리, 음악가 등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하시는 일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당시에 사셨다면 대부분 노예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 사회를 경제적으로 지탱하고 있었던 계급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의 노예들은 봉사에 대한 급료를 받았습니다. 주인으로부터 받은 급료를 모아 자유권을 사서 일반 평민보다 나은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반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평민보다 낮은 계층이었고 법적 문제에 있어서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고 원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권리와 이주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주인에게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을 가리켜 “살아있는 도구”라고 말했는데, 그들이 일하는 성과에 따라 주인의 명예가 높아지고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주인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에 따라 종에게 신체적인 폭력을 가하거나 생명을 빼앗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는 노예들, 화형이나 십자가 형을 당하는 노예들도 많았습니다.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종의 대우가 달라졌던 것입니다. 선하고 너그러운 주인을 만나면 명예와 지위를 누리지만, 까다롭고 악독한 주인을 만난다면 부당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많은 노예들이 있었던 교회에 베드로가 이와 같은 명령을 한 것입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18). 이것은 앞에서 “인간의 모든 제도에 순종하라”(13)와 같은 명령입니다. 이 순종은 즉각적이고 자발적이며 의지적인 순종입니다.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는 순종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순종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무슨 명령이든지 순종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법을 어기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을 신처럼 여겨 순종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상사 위에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직장에서도 크리스천입니다>라는 책에서는 그러한 자세로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감사’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빌 2:14) 내 위에 권위를 하나님이 세우셨다면 어떤 상황에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복종’입니다. 속으로는 욕하면서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권위에 복종하는 태도를 말합니다(골 3:22). 셋째는 ‘기도’입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딤전 2:1-2). 우리에게 세우신 상사들, 주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넷째는 ‘겸손’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거짓 없는 겸손을 행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경건’입니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태도를 말합니다. 감사, 복종, 기도, 겸손, 경건은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춰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18). 베드로는 이러한 순종의 태도를 말하면서 “두려워함으로”라고 말합니다. 보다 정확한 번역은 “모든 두려움으로”(흠정역)입니다. 이것은 주인에게 두려워 떨면서 순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라는 표현은 베드로전서에서 인간에게 쓰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표현하는 말입니다(1:17).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두렵고 무서워서 마지못해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높이는 태도입니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18).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주인에게 순종할 때,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순종하라는 명령입니다. 주인 중에는 선하고 관용적인 사람도 있을 것이고, 까다로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를 선대하는 상사에게는 순종하기 더욱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까다로운 상사는 어떻습니까? 여기서 “까다로운”은 다른 번역으로 “고약한”(공동번역)입니다. 이는 까탈스럽고 별나고 변덕스럽고 불공정하고 상도를 벗어나고 난폭하고 만족할 줄 모르는 야만적인 주인을 말합니다. 부당한 지시, 터무니없는 급료, 잘못한 것에 혹독한 징계를 내리는 주인, 차별대우 하는 주인, 신체적인 학대를 가하는 주인도 포함됩니다. 말씀은 선한 주인이든 악한 주인이든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인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힘으로 이러한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도 힘든 직장생활을 잘 견뎌냅니다. 까다로운 상사를 대할 때도 잘 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참는 이유는 그들과 다릅니다.

이유: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우니라(19-20)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19).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참는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도들도 많은 부당한 고난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분노와 슬픔, 낙심, 원망이 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상사의 부당한 대우에 이러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참아야 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를 갈면서 억지로 참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습니다. 하나님께 그들을 벌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앞에서 말씀했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들을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모든 일의 주권자이시라면, 내가 직장에서 겪는 모든 일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을 보호하고 계십니다(1:5). 그것을 믿는다면 부당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유업을 하늘에 간직하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1:4). 지금 상사 앞에서 슬픔을 당하고 있지만 여러분에게는 하늘의 영원한 기업이 있습니다. 그분은 다 아실 뿐만 아니라 다 갚아주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1:7). 우리가 당하는 슬픔, 고난, 낙심을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할 때 참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낮은 모습으로 모든 것을 감당하시기 위해 죽음까지 이르렀기에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 되어 어두운 데서 불러내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들입니다. 고난당하고 있는 현재의 환경을 보고 나를 괴롭히고 있는 상사를 본다면 우리는 참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제대로 생각한다면 고난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인정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칭찬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눅 6:32; 2:20). 고난 중에 참는 것은 우리에게 칭찬이 된다는 것입니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런 취급은 그리스도인의 섬김이 얼마나 독특한지 보여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 부당한 학대를 인내심 있게 참음으로써 그들은 노예적인 비굴한 태도와 반대되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보여 준다……악을 인내심 있게 참으면, 그는 주님의 능력 안에서 속박의 사슬을 끊어 버린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보여준다.”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다른 동료들도 이러한 고난을 참을 수는 있지만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과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싸우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을 참아내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어려움 중에서 하나님을 인정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맺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20). 직장에서 우리가 지각을 하거나 성실하게 일하지 않아서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사에게 순종하지 않고 부정직하게 일하며, 성격이 별나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악행을 하여 고난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스로의 죄 때문에 받는 고난, 그것을 참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20). 여기서 말하는 “선을 행함”은 단순히 좋은 일이 아니라 앞에서 강조했던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즉 ‘순종하라’는 명령을 말합니다. 주인에게 순종할 때 고난 받는 것, 그리고 그것을 참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21).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직장 안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뜻을 품고 계실까’로 고민하고 계십니까? 고민하지 마십시오. 선을 행하는 것, 고난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 이것이 구원의 목적이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이 계명은 성경 전체에서 중요한 두 번째 명령,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이 때 여러분의 직장 상사와 동료들은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오늘 말씀을 통해 명령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상관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을 성도들, 노예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받고 있는 부당함과 불공정함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서 전체의 주제는 ‘고난 가운데 성도의 기쁨’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라고 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빛 가운데로 불러내신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는 또다시 내일이 되면 직장에 나가실 것입니다. 상사를 만날 것이고 업무 스트레스보다 더 큰 스트레스인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겪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직장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나태함이나 게으름이 아닌,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로 직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깊이 묵상하신다면 이 무겁고 힘든 일을 해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